제3장 한국 시계 부품 생태계의 과거 현재 미래

by 김진산

제3장 한국 시계 부품 생태계의 과거 현재 미래



3-1멈춰버린 심장, 사라지는 손길들


정밀 기계로서 시계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겉으로 보이는 디자인이나 브랜드뿐 아니라 그 이면, 곧 부품 생태계의 건강성까지 들여다보아야 한다. 시계는 수십에서 수백 개의 부품이 정밀하게 맞물려 작동하는 복합 기술의 결정체다. 아무리 디자인과 마케팅이 뛰어나도, 무브먼트와 주요 부품의 안정적인 공급과 품질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것은 모래 위에 지은 성에 불과하다.

불행히도 지금의 한국 시계 부품 생태계는 '붕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심각한 상황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은 일본 다음가는 시계 부품 기술 강국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중국의 개방과 더불어, 인건비 문제로 많은 한국 업체들이 중국으로 이전했고, 그 과정에서 초정밀 가공 기술이 중국으로 넘어갔다. 한때는 중국 업체들이 한국 부품을 수입해 조립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2000년대 이후 오히려 한국이 중국산 부품을 역수입하는 구조가 되어버렸다.



3-2시계의 심장, 무브먼트: 국산화의 꿈은 어디로 갔나?


무브먼트는 시계의 심장이자 기술력의 정수다. 기계식이든 쿼츠든, 이 작은 메커니즘 안에 시계의 성능과 품질, 가격이 결정된다.

한때 삼성과 오리엔트를 중심으로 국산 무브먼트를 개발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IMF 외환위기 이후 대기업들이 시계 산업에서 철수하면서 그 꿈은 미완으로 끝났다. 지금은 자체적으로 무브먼트를 설계하고 양산할 수 있는 기업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극소수 독립 제작자가 수작업으로 일부 부품을 제작하거나 수정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현재 국내에서 유통되는 시계 대부분은 일본(Miyota, Seiko), 스위스(ETA, Sellita, Ronda), 중국(Seagull, Hangzhou)산 무브먼트를 수입해 조립하고 있다. 무브먼트의 해외 의존이 심화되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가격 경쟁력 약화: 수입 단가, 환율, 유통 마진이 완제품 가격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공급 리스크: 제조사 사정에 따라 공급이 중단되면 국내 기업은 속수무책이다. ETA가 외부 공급을 축소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기술 종속: 무브먼트 스펙에 따라 제품 디자인이 제한되며, 자율성이 없다.


무브먼트 국산화는 단순히 부품 생산을 넘어서, 시계 산업의 기술 자립과 브랜드 차별화에 필수적인 요소다. 하지만 초기 투자, 기술 인력, 정부 지원 어느 하나도 지금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3-3시계의 얼굴, 케이스: 디자인과 초정밀 가공 기술의 한계


케이스는 시계의 보호 장치이자 스타일의 핵심이다. 어떤 소재를 쓰고, 어떤 가공 방식으로 마감했느냐에 따라 시계의 격과 인상이 완전히 달라진다.

한국은 과거 뛰어난 금속 가공 기술로 케이스 수출국으로까지 성장했다. 스테인리스 스틸 케이스 가공 기술은 세계적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제조 기반이 중국으로 옮겨가면서 핵심 기술도 함께 유출되었고, 지금은 역으로 중국산 케이스를 수입해 사용하는 실정이다.

티타늄, 세라믹, 카본 등 신소재를 다룰 수 있는 설비와 인력도 부족하다. 현재 국내 케이스 업체는 소량 특수 제작 위주로 몇 군데 남아 있을 뿐이다. 디자인 역시 독창성보다는 모방 위주로 정체되어 있으며, 전문 시계 디자이너조차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3-4시계의 눈, 글라스: 정밀가공의 꽃


글라스는 시계 다이얼을 보호하는 투명한 커버로, 외관 품질과 내구성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가장 많이 쓰이는 소재는 미네랄 글라스, 하드렉스, 사파이어 크리스탈이다. 이 중 사파이어 크리스탈은 고급 시계의 상징으로, 뛰어난 경도와 투명도를 자랑하지만, 가공이 까다롭고 비용이 높다.

국내에서는 이 사파이어 크리스탈을 원재료부터 완제품까지 생산할 수 있는 업체가 사실상 없다. 대부분 중국·스위스에서 가공된 제품을 수입하며, 일부 미네랄 글라스 정도만 가공이 가능하다. 스마트워치 수요 확대와 함께 사파이어 글라스의 중요성은 더 커지고 있으나, 국내 기업은 여전히 소외되어 있다..



3-5시계의 옷, 밴드(스트랩): 사라지는 장인의 손길


과거 한국은 고급 가죽 밴드를 수출하던 ‘스트랩 강국’이었다. 하지만 중국의 기술 상용화와 대량생산 체제 도입으로 경쟁력을 완전히 잃었다. 현재 국내 밴드 제조업체는 소수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메탈·러버·나일론 밴드 모두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기술 전수 실패, 고급화 실패, 시장 대응 실패가 겹친 결과다.



3-6시계의 마무리, 후가공: 품질은 디테일에서 갈린다

.

PVD, DLC, 로즈골드 도금 등 고급 마감 기술은 시계의 격을 좌우하는 요소다. 한때 한국은 도금 강국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환경 규제, 기술자 고령화, 인력 부족으로 인해 후가공 인프라가 거의 붕괴되었다. 품질 미달, 수주 불안정, 신뢰도 저하가 이어지고 있다.



3-7고군분투하는 국내의 부품업체들


국내에도 여전히 시계 부품을 자체 생산하며 생존을 이어가는 소규모 업체들이 존재한다. 대부분 수십 년 경력의 장인이 운영하는 영세 사업장이거나, 특정 부품에 특화된 기술을 가진 기업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다음과 같은 현실에 직면해 있다.

시장 자체가 작음: 완제품 생산량이 줄어 부품 수요가 급감했다.

고급 시장엔 못 들어감: 브랜드들은 여전히 스위스·일본 고급 부품을 선호한다.

저가 시장은 중국에 밀림: 가격 경쟁력에서 밀리다 보니 틈새시장조차 확보하기 어렵다.

기술 혁신 여력 부족: 자금, 인력 모두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세대 단절: 고령화된 기술자 외에는 후계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3-8왜 이렇게까지 되었나?


한국 시계 부품 산업이 이렇게까지 무너진 데에는 다음과 같은 구조적 원인이 있다.

1. OEM 중심의 산업 구조

자체 기술·브랜드보다 외주생산에 치중하며 국산화 투자가 미흡했다.

2. 대기업의 철수 삼성, 오리엔트 등의 이탈로 생태계가 순식간에 무너졌다.

3. 중국의 약진

가격과 물량에서 압도적인 중국산 부품에 밀렸다.

4. 정부의 무관심

사양 산업으로 분류되며 R&D 지원, 인력 양성 등 정책 기반이 거의 부재했다.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한때 세계를 겨냥하던 한국의 시계 부품 생태계는 조용히 무너졌다..



3-9부품 국산화, 다시 꿈꿀 수 있을까?


지금의 현실은 암담하지만,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음과 같은 전략이 필요하다.

1. 선택과 집중

모든 부품을 국산화하겠다는 욕심은 버려야 한다. 스마트워치 케이스, 친환경 밴드, 특수 글라스 등 가능성이 높은 분야부터 집중 육성하자.

2. 마이크로 브랜드와 협업

개성 있는 국내 브랜드들과 협력하여 작지만 독창적인 ‘국산 시계 생태계’를 복원해 보자.

3. 정부의 재인식과 역할

장기 R&D, 세제 감면, 인력 양성, 수출 지원 등 실질적인 정책이 절실하다.

4. 산학연 연계 생태계

대학·연구소와 협력해 소재, 가공, 기술을 개발하고 이를 산업화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물론, 단기간에 결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씨앗을 뿌리지 않으면, 한국 시계 산업의 내일은 없다.

‘멈춰버린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기 위한 노력은 오늘, 이 자리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

keyword
이전 02화제2장 한국시계기업의 흥망성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