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리뷰를 이렇게 쓴다 - 영화 "만약에 우리"
“어릴 땐 왜 그렇게 어렵게 생각을 했을까요.
그냥 쉽게 쉽게 좀 살걸.”
오랜 수험생활 끝에 고배를 마시고, 늦깎이로 입사한 녀석의 말이라
그 한마디가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대답 대신 침묵을 선택했던 건
어쩌면 나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수투성이였던 우리가 사랑했던 순간들은
늘 그렇듯 아무 준비 없이 떠오른다.
나의 꿈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던 시절.
그 꿈은 다름 아닌, 사랑했던 너 그리고 나였기에.
서툴렀고, 불완전했고,
그래서 더 선뜻 시작하지 못했다.
사랑이 끝날까 봐가 아니라
사랑 때문에 모든 걸 잃어버릴까 봐 두려웠던 날들.
말 한마디면 될 걸,
손 한 번 잡으면 될 걸,
괜히 계산하고, 괜히 미루고,
결국 아무 말도 못 한 채
지나가 버린 젊은 날의 찌질함.
이 영화는 그걸 아주 정확하게 말해준다.
속이지 않고, 매우 친절하게, 그리고 잔인할 정도로 가혹하게.
마치 건축학개론의 오마주처럼 흘러가는 영화의 초반부는
손발이 오그라들 만큼 전형적인 청춘영화처럼 보인다.
가진 게 없었기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고,
자격지심과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승민’이 되어버린 은호를 보며
PTSD가 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은호는 결국 껍질을 깨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정원과의 키스로 사랑을 확인했던
새해의 어느 밤은
다시금 과거로부터의 희망을 불러오고 있었다.
이대로
“은호와 정원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하고
동화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면
정말 좋았겠지만.
“Open your eyes.”
은호야, 이제 눈을 떠야지.
적당히 클리셰를 덕지덕지 바른
그저 그런 로맨스 영화는
현실이 아니니까.
영화는 후반부에 접어들며
‘현실’이라는 이름의 게임을 다시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는
일평생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그 현실과 조우하게 된다.
영화 속 배경과 장면들은
2000년대 후반,
치열하게 살았던 나의 20대와 겹쳐 보였다.
그때의 나에게 정원이 없었다는 점만 빼면
거의 완벽하게 똑같았다.
현실은
햇살과 선풍기의 방향마저 바꿔버릴 만큼 차가웠고,
다시 기로에 선 플랫폼 위에서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한 은호는
결국 정원과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니까 헤어질 수밖에 없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던 시절.
졸렬했다고 말하기엔
너무나 진심이었고,
너무나 사랑했기에
마음으로는 끝내
널 떠나보내지 못했던 시간들.
만약에, 정말 만약에
그때 널 잡았더라면
우리는 해피엔딩을 볼 수 있었을까.
니가 없는 나는,
내가 없는 너는
과연 불행한 삶을 살고 있을까.
오늘 나는
과거와 비슷한 공간, 비슷한 상황 속에서
널 다시 마주했다.
너무 오래전의 일이지만
이상하게도 아직 생생한 기억들 속에서.
어쩌면
과거에 심장을 떼어줄 수 있을 만큼 사랑했던 네가 없는 지금도
나는 충분히 행복하기 때문에
지금의 너를 바라보는 내 가슴이
이렇게 먹먹한 건지도 모르겠다.
이건
너의 이야기이고,
나의 이야기이며,
나 자신보다 늘 먼저였던
내 진심에 대한 이야기다.
그 모든 이야기들을
은호와 정원이
서로에게 전해줄 수 있게 해준
마지막까지의 친절함에
감사를 보낸다.
그래서 이 영화는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을 지나온 사람들의 이야기로 남는다.
서유기 선리기연이나 라라랜드처럼
눈물을 왈칵 쏟아낼 감정은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먹먹할 정도의 여운은 충분히 남았다.
지금 어디선가 이 영화를 보고 있을
너와 나에게,
그리고
진하고 선명했고
알록달록했던
우리들의 청춘에게.
괜찮아.
괜찮았고,
너는 앞으로도 괜찮을 거야.
나 없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