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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윤상학 Aug 20. 2024

인연

신기하여라

'뭐 하삼?'

'10만 원 부쳤어. 요즘 복숭아 맛있더라. 좋아하는 백도 사 먹어

'크고 싱싱한 걸로 사고, 너네 동네 마트는 과일이 맛없더라., 과일 전문점이나 고급진 백화점 마트에서 사. 복숭아 살 때 포장지 아래 부분이 상했을 수도 있으니까, 판매자한테 검수해 달라해서 확인해서 사고. 한 번에 많이 사진 마. 복숭아는 냉장고에 보관하면 맛이 없어지고, 날씨 더워 바깥에 오래 둘 수도 없으니까, 제일 큰 거로  4~5개 정도 사서 빨리 먹고, 또 사 먹어. 비싸서 손 떨려서 니 돈으로 못 살 거 같아서 보냈어.'


복숭아는 어떤 종류이든 맛있다. 천도복숭아 나올 때부터 그 아삭아삭한 씹히는 식감에다, 약간의 시큼 달콤한 맛을 좋아한다.

그러다가 노오란 황도가 나오면 너무 좋다. 얼른 산다

희멀건 백도 보다 구미 당기게 하는 노오랗고 발그레한 황도가 더 좋다. 그래서 황도를 주로 사 먹는데, 딸애는 백도를 좋아한다.


포장 잘하여 배송하여도 다치기 쉬운 백도를, 더구나 당일 배송도 안되어 보내 줄 수 없으니, 대신  돈을 부쳤다. 나도 사 먹는데 손이 떨릴 정도인데, 딸은 오죽하겠나 싶고, 백도 보며 침만 삼키고 패스할 걸 생각하니 안타까워 사 먹으라고,10만 원 부치면서 카톡으로 알렸다.


'갑자기 웬일인가 했네. 감사~'

'지금 약속이 있어서 밖에 나와 있어'


만나는 애와 데이트 하나 보다. 더 이상 카톡 나눌 수 없다는 암시를 보이며 답변을 해왔다


딸애는 졸업 전부터 열심히 몇 군데 기업에 지원서를 작성하여 내어 보더니, 더 이상 밀지 못하겠다며 지원서 내기를 포기하였다.


대학 입학 때부터 꾸준히 희망했던 직종이 있었는데,  그 직종 말고는 다른데선 별로 일 하고 싶지 않다고 하더니, 결국 지원서 내기를 포기하고선, 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했던 곳에 가서 일하더니, 지금은 같은 직종의 다른 곳으로 옮겨 일하고 있다. 보수는 희망한 대기업 수준에 턱도 없이 못 미치나 일이 재미있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다.




나만 그런가.. 모두가 그런 강....


딸애만 생각하면 가슴이 저민다. 조금만 더 아이한테 잘해주었더라도, 저가 원하는 직장에 다닐 수 있었을 텐데. 그랬더라면 저보다 한참 떨어지는 아이(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여겨진다)를 만나고 있지는 않을 텐데.


딸아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손녀가 너무 보고 싶어, 열흘 전에 본 애를 보기 위해 버스를 두 번씩이나 갈아타고서 시아버님은 딸애 학교를 찾아가셨단다. 복도에서 기웃하며 수업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나오는 담임 선생님께 인사하였는데, 선생님께서 '교직 30년에 이런 애는 처음 본다.'라고 딸애에 대해 들은 칭찬을 얼굴 만면 가득히 웃으시며 전해주셨던, 딸애는 그런 애였다.


딸아이를 키워주고 있었던 셋째 시누 내외는 그동안 위로 조카 일곱에 자기 애까지 커는 걸 지켜보았을 때, 딸애가 많이 비범해 보였던지, 특히 시누 남편은 딸애를 영재 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자주 말하곤 하던 아이였다.


아이를 처음 키워보니 23개월에 33 개의 동요를 완곡하는 걸 보고 좀 놀라기는 했지만, 모든 부모들은 자기 아이가 천재인 줄 안다고 하기에,  다른 집 애들도 모두 그런 줄 알고 있었는데, 아버님의 말씀을 듣고는 그런가 보다 하고 기분이 썩 좋았고, 그 이후 딸애가 하는 일들을 보면서 진짜 탁월한가 싶었다.


              육아 일기 중 23개월 무렵/ 33 개곡 완곡



  이가 일곱 살 일 때, 남편이 친구한테 슈나우즈 종의 강아지를  한 마리 얻어왔는데, 견 관련 책을 읽었는지, 애완견 종류부터, 각 애완견의 성향, 사료, 질병, 관리 방법을 줄줄 읊으며 개를 잘 돌봐야 한다고 다짐받듯 들려주었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고선, 그 많은 신들을 캐릭터와 더불어 계보를 그려가며 신나게 들려주었고, 3학년 땐,  지은 이야기라며, 조선 시대의 남녀를 동의 어느 지역의 공주와 남자로, 그리고 현재의 한국에서  알콩달콩하는 커플로 연결하여, 시공간을 넘나드는 서사극을 들려주는데, 드라마 한 편 보듯 푹 빠져 흥미롭게 들었던 그  이야기를, 친구들을 모아 역할을 나누고, 각 역할에 맞는 의상까지 준비하여 연극 놀하던 모습들에 눈을 번뜩이도 했었다. 

  



사람이란 성장하면서 얼마나 많이 변하는가.

그것에는 부모의 영향도 있을 테고, 학교 선생, 친구, 친인척의 영향도 있을 테고, 관계 맺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느낀 것에서 본인 스스로 소화해 가는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도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성격의 원형이 만들어지는 시기에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가장 많은 시간을, 가장 밀착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부모이니, 부모의 영향이 제일 크지 않을까 한다.


딸애는 고 명랑하고 활기차고 세상 부러울 게 없을 것처럼 뛰놀았다. 호기심도 많고,  자립심도 강하여 신기할 정도로 뭐든 제 스스로 척척 잘 해내어, 주변 가득 쏟아붓는 사랑의 기운은 아이를 그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로 우리 모두에게 보답하듯 커주었다.



 초등학교 4년/ 당시 좋아했던 임형주 콘서트장서 휴식 시간에 엄마 수첩에 그린 그림




그러나 아이는 등학교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변하는 것 같더니, 드디어 중2가 되었을 때는 질풍노도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사랑스럽고 말 잘 듣던 아이는 어디로 가고 딴 아이가 앞에 있었다. 친구들 앞에서 면박주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왜 이럴까.. 모든 걸 쏟아부었는데. 원하는 건 쓸데없다 싶은 거 빼고는 다 들어주었는데.... 아이 양육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돌아보았다. 크게 잘못한 건 없는 것 같았다. 자녀 양육과 관련된 서적도 많이 보면서, 칭찬과 꾸중을 적절히 하였고, 히 통제하여 자유로우면서도, 책임감 있는 바른 아이로 키운 것 같았다.


그러면서 모든 원인은 당연히 남편한테로 귀결되었다.  남편은 손대는 사업마다 되는 게 없어서 결혼 10여 년 넘는 세월 동안 생활비 한 푼 들여오지 않았고, 생활비는커녕 여기저기서 끌어다 쓴  채무로 은행에서 날아온 월급 차압 통보, 사흘이 멀다 않고 걸려오는 빚쟁이들의 독촉 전화, 한마디 통보 없이 8살짜리 혼자 있는 집을 들이닥쳐 가재도구 곳곳에 빨간딱지 붙이고 간 집달리들, 

어느 날 말 한마디 없이 종적 감춘 남편 붙잡으러 친정까지 찾아간 형사들, 동생 결혼식 하객들의 밝은 표정 속 눈빛 예리한 인물들에 직감적으로 형사 신분 판단하고 콩콩대는 심장으로 딸애 손잡고 도망쳤던 일... 연기처럼 사라진 6개월 후쯤 소식 알려 온 남편은 경제 사범으로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다가 얌전하고, 전형적인 조선여인네 상의 어머님은 가뜩이나 약하셔서 잔병치레를 자주 하셨다고 했는데, 큰 아들인 남편 사업에 휘둘리셔서 인지 당뇨에 걸리셨고, 곧 방광암에 뇌졸중으로 쓰러지기까지 하셨다.


직장 다니랴, 남편 사업 뒤치다꺼리 하, 시어른 봉양하나날들을 보내고 있던 시절이었다.


아이가 4까지는  근무지가 아이 돌보며 직장 생활하기에는 아이돌보미 구하기 힘든  지역이었고, 또 다행히도 고맙게 먼저 나서서 셋째 시누가 아이를 돌보아 주겠다고 하셔서 아이는 그렇게 양육되었고, 5~6살 일 때는 시댁과 차로 40분 정도 걸리는 지역으로 근무지를 이동해 와서 시댁으로 합가 하여 함께 살게 되었다.


어머니는 병약하셔서 살림을 거의 하실 수 없는 상태이셔서, 주하게 직장 가 있는 동안 아침, 점심  차리기, 이의 미술 학원, 유치원 등을 모두 77세이셨던 아버님께서 챙기셨다. 그러다 보니 남편 사업 뒤치다꺼리로 스트레스 가득했던 상황에 육체적 힘겨움까지 더해지게 되었다.


전날 야간자율학습 감독 담당으로 밤 11시 가까운 시간에 귀가한 데다, 다음 날  아침 0교시 수업이 있고, 어른들 드실 국물 거리가 없는 날은 최악이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미역국, 북엇국, 소고깃국 있는 재료에 따라 어른들 드실 국반찬과 아이가 먹을 계란찜이나 두부로 된 반찬을 만들었다. 그리고 뜨는 둥 마는 둥 한 숟갈 고, 씻고, 화장하고 집 나서 숨 가쁘게 달려가면  0교시 시작하는 7시 50분에 직장에 다다르게 된다.


그렇게 도착하여 정규 수업 후 보충 수업까지 마치고 퇴근찬거리 떨어질 시점이면 마트에 들러 장을 봐와서 귀가한다. 대체로 6~7시 경이된다.

어린이 집, 유치원 등을 다녀왔던 아이는 온종일 엄마를 기다렸을 텐데, 아이와 인사만 나누고 옷 갈아입고 주방으로 달려가기 바쁘다.


 어떤 때는 싱크대 가득 설거지 안 한 그릇들이 쌓여 있다. 아마도 설거지라도 하셨던 어머니께서 컨디션이 많이 안 좋 날모양다. 설거지를 하고 장 봐온 재료들로 반찬을 만들어 상 차리기가 급하다. 어른도 아이도 배가 고플 것이고, 나도 배가 고프기 때문이다.


그렇게 을 먹 설거지하고 씻고 나면 겨우 한숨 돌리게 된다. 엄마가 고팠던 아이는 유치원서 있었던 일부터 들려주고팠던 일들을 종알거리며 들려준다. 그리고 아이는 잠자리에 들며 책을 읽어 달라고 하고, 책을 읽어 주고, 잠자리에 들면 12시 넘기기가 일상이었다.


2년간의 시댁 살림에서, 아이 일곱 살이 되면서부터는 직장 가까운 곳으로 분가해 살게 되었다. 장거리 근시간과 시어른 내외 찬 거리 장만하는 부담 덜게 되어 보다 몸은 수월해졌다. 남편은 나의 힘듦은 아랑곳없이, 연로하신 어른들 두고 분가한다고 마뜩잖게 여겼다.


 아이는 아파트 단지에 딸린 유치원에 퇴근 시간까지 돌봐주는 종일반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분주하게 일과 마치고 퇴근길에 유치원 들러 아이를 데려와 많이 피곤한 날에는 외식으로 저녁을 때웠다. 집에서 입 짧아 잘 안 먹는 애를 먹이기 위한 것도 있어서, 시댁에서 지내는 것보다 한결 생활에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고, 아이와 더 밀착되는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점차 남편 사업도 좀 풀리는 것 같았다. 채무도 조금씩 줄어들게 되었고, 남편도 적으나마 생활비를 보탰다.

그러나 산 넘어 산.. 더 큰 산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결혼생활 중 늘 그래왔었지만,  당장 앞에 닥친 파고 헤쳐 나오느라 잊고 있었던 문제들이 노골화되었고, 스트레스는 극도를 치닫게 되었다. 불안과 긴장이 밀도 있게 짓누르던 시간들의 연이었다.


누적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는 아이에게로 향했던 것 같다. 그래서 아이의 감당 안 돠는 변화의 주된 요인으로 남편을 들며 원망하는데, 70~80%는 그런 것 같다.


아파트 단지에서 아이들과 어울려 놀다가 귀가하는 아빠를 보면, 얘들아 우리 아빠야 인사해, 라며 자랑하던 5살짜리 꼬마는 이제 더 이상 아빠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랑은커녕 친구들 사이에선 일절 얘기 안 하는 눈치이다.

나에 대해서는 이러저러한 얘기는 하는 듯하다만, 크게  자랑스럽게 얘기하는지는 모르겠다.




70~80%는 남편 영향이라고 한다면, 나머지 20~30%는 내 영향일 것이다. 아이의 변화에 20~30%로 작용한, 온전한 나만의 어떤 성향이, 어떤 형태로, 아이에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더듬어 본다.


가만히 지난 시절 돌이켜보면 통제 억압 많이 하였던 것 같다. 지금 아이를 대하는 태도와 비교하면 그렇다.


왜 아이를 통제하고 억압했을까. 아마도 아이는 어리니 제대로 잘 가르쳐야 된다는 생각과 나는 대체로 옳고, 내 생각이 맞고, 내가 곧 정답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내 성격의 원형이 형성되던 기에 함께 했던  엄마, 아버지, 6년간  함께 지냈던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3~4년간 정도를 함 지냈던, 주먹으로 사람 때려 도망치며 집 나간 넷째 삼촌과 군 입대 하기 전 함께 지냈던 막내 삼촌. 어느 누구도 내게 크게 통제하지 않았던 것 같다.


엄마, 아버지는 하루하루를 힘겹게 넘어가느라 내 삶에 개입할 여유 없었고, 할머니 댁에서는 각자 자기가 맡은 일에 묵묵히 논밭으로 나가 잡초 뽑고, 씨 뿌리고 농사짓느라 내 삶에 개입할 힘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통제를 거의 받지 않고 자랐다. 어쩌면 통제가 필요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알아서 잘했으니까.

알아서 공부하고, 알아서 빨래하고 청소헀다. 그러고 보니 빨래도 청소도 우리 집에서는 안 했다. 그러니까 우리 집에서는 통제를 거의 안 받고 자랐다. 공부만 하면 되었고, 공부를 알아서 잘하였으니 통제받을 일이 없었다.


빨래와 청소는 할머니 에서 여러 농사와 함께 했었, 그러면서 약간의 통제 있었던 것 같다. 름 땡볕에 콩 밭매고 있을 때, 동네 머슴애들 속에 끼여 소 풀 먹이러 산으로 갈 때, 울에서 수영하고 노는 친구들을 보면서 부러워했었던 기억이 난다. 첨벙첨벙 같이 물놀이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할머니를 원망했었다. 빨래와 청소는 알아서 했는데, 농사일과 소 풀 먹이는 것은 너무 싫었다. 아무튼 그 정도 통제를 받았을 뿐 거의  통제는 없었다.

 

대부분을 나의 생각대로 움직였고, 나의 선택으로 결정하였다. 그런 선택에서 크게 실패한 적이 없고, 대학 졸업하여 취업까지 무난히 지내왔기에, 내 생각이 맞고, 내가 곧 정답이라는 확신에 빠졌던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아이의 많은 일들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아이의 의사를 무시하고, 내 생각대로 결정하여 아이를 통제 속에 가두고, 억압했던 것 같다.


자기의 의견을 족족 무시당하면서, 자기 뜻대로 제대로 하지 못하는, 강제로 이끌려 가는 숨 막히는 삶이 아니었을까. 그러면서 아이는 점점  자아 존중감과 자신감을 잃어 갔을 테고, 무기력해지며 반항심을 쌓아갔을 것이고, 급기야는 질풍노도 시기에 폭발한 것이 아닌가 싶다.


통제 없이 자라나서 성공한 후, 통제를 한 아이러니..

그 통제는 반항을 낳고...


곪아가는 아이 속도 모르고, 내 계획대로만 따라 준다면 내가 못다 이룬 꿈을 이루어, 성공한 삶을 살 것이란 확신에  통제는 계속되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3학년 어느 겨울날, 할머니 댁에 던져 놓고 한 번도 찾아오지 않는 부모님을 중 2, 여름 방학 때 이모와 함께 찾아갔을 때, 공부 열심히 해라, 그러면 미국 보내준다라는, 방치해 놓은 자식에 미안했던지 던진 한마디 아버지 말을 철썩 같이 믿고, 원래도 잘하던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하였다.


1975년이었고, 아메리카(여기선 미국을 말함)신의 나라쯤으로 겨져, 미국으로 건너가는 걸 꿈꾸던 '아메리카 드림'이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아버지 말씀 이후 미국 가서 공부하는 에 부풀어 있었고,  진학으로 대구에 사는 부모님 집에  , 그 꿈이 얼마나 헛된 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UN에서 일하며 세계를 누비겠다던 꿈은 좌절되었고, 못다 이룬 꿈을  애가 실현 줄줄 알았다.




통제와 억압과 더불어 아이한테 참으로 딱딱했던 것 같다.  언젠가 다 큰 딸애가 어릴 때 엄마가 너무 무서웠다고 하였는데, 부끄럽고 미안해 눈을 어디 둘  몰랐다. 그런데 정작 그때는 딱딱한 줄, 무섭게 대하는 줄 전혀 몰랐다.


아이가 예뻐서 당연히 예뻐하며, 웃고, 칭찬하고,  박수 보내고, 사랑한다고 하고, 안아주고, 뽀뽀하고.... 정서적으로도 충분히 사랑하는 마음을 잘 표현하였던 것 같았는데, 딸애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을 때 많이 놀랐었다.


아마도 꾸중을 할 때의 태도가 잘못되었던 게 아니었나 싶다.

부드럽게 온화하게 잘못한 일을 왜 잘못했는지, 충분히 설명하고, 설득하여 아이가 이해하고, 그 지도를 용납할 수 있도록 했어야 했는데, 말투와 표정이 꽤나 딱딱하고 엄했던 것 같다.

키 1m  짓한 꼬마 입장에서는 160cm의 엄마가 엄한 표정 지으며, 어서 말하니 얼마나 무서웠을까.


초등학교 졸업 후, 한참의 세월이 지난 후 어느 날 동창회에 참석하며 돌아보았던 학교 운동장...


친구와 고무줄놀이, 잡기 놀이하며 내달렸던 운동, 100m 달리기와 400m 계주 하며 아득히 넓고 크게만 느껴졌던 그 운동장이, 30대 반이 되어 찾아갔을 때의 그 초라함이라니..

초등학교 6학년 때 키가 146cm 정도였고, 성인이 된 키는 160cm이다. 고작 14cm 차이 밖에 안 나는데, 그 14cm의 눈높이 차이는 운동장을 너무나 초라하게 바꾸고 말았다.


사물의 종류나 크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생활 속에서 접하는 일반적인 사물을 비교할 때 60cm 차이는 큰 차이가 안 난다. 그러나 사람대 사람에 있어서 60cm는 얼마나 큰 차이인가. 다 큰 어른들도 10cm만 차이 나도 꽤나 큰 차이를 느끼지 않는가.

그런데 하물며 60cm 정도나 큰 어른을 고개 들어 치어다봐야 하는 꼬맹이에게 어른은 얼마나 크고 힘센 존재일까. 그 크기만으로도 위세에 압도당하는데, 엄한 표정으로 꾸중하였으니, 그것도 납득될만한 충분한 설명 없이... 아이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어느 날 막내 시누가 말하길, 집에 놀러 와 있는 딸애가 엄마가 데리러 왔다고 하니까, 누워있다가 벌떡 일어나라며, 엄마가 얼마나 무서웠으면 그랬겠냐고,  엄마가 오면 더 놀고 싶다고 떼쓰, 가지 않으려고 야 정상인데, 두 말 없이 따라나서는 게, 어디 애냐며, 나온 나의 훈육 방식을 타박하듯 말해 주었다.

그때 말해 주지. 그때 말해 주었더라면 훈육 방식과 태도를 고쳤을 테고, 그럼 아이가 지금처럼은 되지 않았을 텐데라며 엉뚱하게 시누에게 원망을 한다. 


그랬다. 아이는 점점 속으로 곪고 있었던 거다. 자립심 강한 아이는 기숙사 사감처럼 통제하는 엄마 앞에 점점 무력감을 느꼈고, 따스한 온기가 필요했던 아이는 엄마로부터 독일 병정 같은 냉기만 느꼈던 것이다.


엄마가 너무 무서웠다고 하는 딸애에게 속상해서 왜 반발하지 않았느냐며 묻는 말에, 한두 번 했는데 안 들어주어서 포기했다고 말하였다.

그것도 모르고 잘 듣는 모범적인 아이만 생각했었다. 그래서 자신의 잘못된 훈육 방식과 태도에 대해 반성도 수정도 없 통제하고, 억압하고, 엄하게 지도했던 것었다.

그런 엄마 앞에 아이는 일찍이 자기를 버렸고, 반발과 굴복 중에 굴복을 택 것이었다. 내가 아버지에게 입 다물고 굴복했던 처럼. 


나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딸...


고등학교 시절이었을까. 할머니댁이었다. 집안의 장손(통상은 남자이겠으나. 할아버지의 첫 손주의 의미임)으로 나름 촉망받고, 집안 어른들의 관심 중에 있었던 나에 대해 숙모들이 여러 칭찬 섞인 말들을 하는 가운데였던 것 같다. 어릴 때는 그렇게 밝고 말도 많던 아이가 도통 말을 안 한다며, 아버지께서 불만을 토로하셨더랬다.


아버지가 변화된 의 모습에 실망해 넋두리하는 것처럼, 아이에게 속상해하고 있는 나.

야속한 상속. 슬프다.




뒤늦게 드는 생각은 그렇다. 결혼을 하거나 자녀를 낳을 계획이라면, 배우자 자격 과정이나 자녀 양육 교육 과정 이수를 필수로 해야 하는 것이, 제도적으로 마련되어 있으면 좋겠다. 일종의 '결혼 자격증(배우자 자격증)', '부모 자격증'을 필수로 하는 것이 되겠다. 그것도 책으로 가 아니라, 실전으로 이수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래서 결혼 생활이 보다 순탄하고 평화스럽기를, 그래서 평화로운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자녀들이 가능한 한 행복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그래서 가능하면 부부들은 결혼한 것은 좋은 선택이었고, 자녀들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참 좋은 이란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했으면 겠다.


남녀가 만나 하나의 가정을 이루는 것도 새로운 우주 탄생이고, 이 세상에 새로운 인간이 태어나는 것도  하나의 우주가 열리는 것아니겠는가.

어떻게 우주 탄생에 소홀할 수 있겠는가.

우주 탄생에 좀 더 세심하게 사회가 신경 썼으면 좋겠다.


뒤늦게 알아차려 이젠 조심한다. 눈치 살핀다. 혹시 자존감 훼손하는 것은 아닌지, 지나치게 간섭하는 건 아닌지,  무시하는 건 아닌지...


내게 필요했던 것은 딸애를 좀 놓아주는 것이었다

쓸데없는 과도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었다.

'방하착(放下着)'

적당한 거리 두기를 하는 것이었다. '적당히'가 필요하였다.

'중용(中庸)'




그래서 이젠 많이 나아진 것 같다. 이전보다 딸애는 많은 이야기들을 털어놓는다.


주말이면 주중에 일어났던 이야기들을 잔잔히 들려준다. 동료들과 점심 같이 먹기로 했는데, 상사가 자기랑 같이 먹자고 해서 하는 수 없이 그렇게 했다고, 자기는 당연히 동료들과 먹고 싶은데, 상사가 그렇게 해오면 거절을 할 수가 없다고 털어놓으며, 지혜를 물어 오기도 한다.

만나는 남자 친구랑 길 가다 사진으로만 익숙한 남자 친구 부모와 마주쳤다는 얘기, 방송 댄스에 푹 빠져 주중이고 주말이고 가리지 않는 절친이 만나는 남자들과 있었던 코미디 같은 얘기, 왁싱할 때가 되어서 다녀왔다는 밀한 얘기까지..


딸애 세 살 경, 여름이었다. 같은 또래들을 두고 있는 친구들과 백화점을 들렀었다. 이런저런 얘기 나누며 쇼핑을 하고 있는데, 뒤쳐져 자기네들끼리 어울려 따라오던 딸애가 ' 엄마 똥구멍에 팬티 끼였어' 온 백화점이 울리게, 엉덩이에 끼인 팬티 손으로 당겨내며 달려오는데, 백화점 직원들이 모두 웃었더랬다. 빡빡머리(바리깡으머리를 빡빡 었음. 그렇게 하면 머리숱 많아진다고 해서. 숱 적은 아빠 닮을까 봐 그렇게 2번째 한 때임)한 땅꼬마가 한 상황을, 경상도 억양에 크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천진난만하게 말하니, 귀엽고 재미있었던 모양이었다. 우리도 따라 웃었었다.


그렇게 말하기 시작할 때부터 또랑또랑하게 말 잘하던 아이가 다시 돌아온 듯다.


그래도 나는 안다. 그 마음속 깊은 곳에는 나처럼 제 어린 시절의 아이가 둥글게 몸 말고 울고 있을 수 있음을. 러한 지, 어떤지는 겁나서 물어보진 못다.


어린 시절 받은 상처는 트라우마로 남는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말 들을  없다. 내가  산증인이니까.

내 안에는 5~6살 정도의 어린아이가 고개 파묻고 웅크린 채 울고 있다.



             광안리 대교를 바라보며 그린 딸애의




쁜 일상으로, 재미있는 일로 잊고 있다가, 홀로 있게 되면  속 깊숙이 웅크리고 있던 아이가 쑤욱 올라오곤 한다. 무릎 안으로 깊숙이 얼굴 파묻고 울고 있다.

그럼 나는 가만히 아이를 달랜다.


'괜찮아, 괜찮아. 울지 마....

너는 잘못한  없어. 엄마, 아버지가, 너를 보살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했. 엄마, 아버지가 잘못한 거야'


'괜찮아. 이젠 괜찮아. 넌 보살핌을 제대로 못 받았지만, 니 몫의 삶을 열심히  살아왔어. 엄마, 아버지도 네가 딸을 사랑하듯 널 사랑했을 거야. 다만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그리고 부모 교육을 못 받아서 그랬거야. 너를 사랑했지만 표현할 방법을 잘 몰라서 그랬 거야....'


머리를, 등을 쓰다듬으며 달랜다. 울지 말라고... 울지 말라고


딸애에게도 그런 유년의 아이가 웅크리고 울고 있을 수 있음을 각하면  가슴이 무너진다.

어떤 흔들림에도 흔들리지 않고, 부드럽게 따뜻하게 자애롭게 아이를 대했어야 했다.

그래서 아이의 세계를, 우주를 온전히 지켰어야 했다.


더없이 행복하게 자라, 이 세상 태어난 것은 참 좋은 이라고 느낄 수 있했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한 것 같아 뼈가 저게 아프다.


딸애는 미안해하는 나를 오히려 위로해 준다. 엄마는 제대로 사랑받지 못하고 자랐고, 힘들게 살았다고. 그런데도  엄마는 자기를 사랑했고, 엄마로서는 최선을 다했다고. 덕분에 친구들보다 많은 교양 쌓을 수 있었고, 하고 싶은 거 다 해보았다고. 엄마는 대단하다고 부추겨주기까지 한다. 


다행히도 딸애는 동료들 간에도 인정받고, 상사에게도 신뢰받고 사랑받는 것 같다.  


비교적 기획력과 문제해결력이 좋은 것 같다. 회사와 고객 사이에서 난감한 상황에 부닥칠 때, 절묘한 지혜를 짜내 회사의 요구는 충족하면서도, 고객에게도 만족을 주는, 일 처리 과정을 듣노라면 뿌듯하고 신기하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 회사에 손해 끼치는 얄팍한 요령 피우는 직원들을 안타깝게 여기며, 회사의 입장도 고려하 기본 원칙을 지키되, 적절히 융통성 발휘하여 회사에도, 본인에게도 덕이 될 수 있는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을 보면, 회사가 참 이 많다는 생각마저 들 때도 있다.


희망했던 직종은 아니어도 즐겁게 일하고, 발군의 실력도 갖추고 있으니, 언젠가는 근사한 커리어 우먼으로 우뚝 서 있을 것으로 믿는다.




딸아이는 주말이나 휴일이면 페이스톡을 해온다. 역시 휴일이었던 광복절날에도 페이스톡을 해왔다.


감기 걸렸다면서 이런저런 얘기 가운데 '자라면서 사랑을 많이 받아서 그런 것 같다'라고 어느 맥락에서 말하였다. 엄마와 아빠는 그렇지 않았잖아, 많이 혼냈잖아라고  다 의아해 반문하니, 무슨 말이냐는 듯이, 혼낼 거는 혼내야지 라며, 자기는 무척 사랑받고 자랐다고 말하였다. 진심으로 느껴져서 크게 마음을 놓았다.


얼마나 다행인가. 엄마가 무섭다고 느꼈으면서도 동시에 사랑을 많이 해줬다는 걸 느꼈으니....

아마도 그것은 우리 내외의 부족함을 상쇄하는 주변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들, 셋째 고모부, 삼촌, 숙모... 특히 아버지, 셋째 고모와 고모부의 사랑은 부모에게서 받았던 통제와 억압과 차가움을 잊게 만드 중요하작용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참 다행이고, 항상 감사한 분들로 여기고 있다.


세상 부러울 게  이던 고 활기차고 영특하던 아이.

세상 어떤 고난에도 흔들리지 않고, 부모 자리 굳건히 잘 지켰더라면, 원하던 직종에서 마음껏 꿈 펼치며 보다 더 행복 충만한 삶 살고 있었을 텐데 하는 죄책감과 아쉬움이 여전히 너무 크게 남는다. 딸애를 생각하면 가슴 저미는 이유이다.




딸애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한 차례 회오리바람이 훑고 지나간 느낌이다.

그리고 흐트러진 상황 잘 마무리하고

이제는 원래의 평온한 상태로 돌아온 것 같다.


인연..

이 세상에 자식 같은 존재가 있을까.

자식을 위해 기꺼이 목을 내놓을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있을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우리는 어쩌다 엄마와 딸로 만나게 되었을까

영겁의 무한한 세월 속에

광활한 우주에

하나의 점인 와 내가

어떻게 엄마와 딸로 만나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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