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마포대교를 건너 여의도역으로 향하던 중 영풍문고에 잠시 들렀다. 여행 서적을 둘러보던 중 남미 브라질 여행기를 보게 됐다.
축구, 삼바, 리우 카니발 등 브라질 하면 떠오르는 것 외에도 현지 음식, 문화 체험기가 담겨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다.
브라질 관련 서적을 더 찾아보던 중 정치·경제를 다룬 책을 봤다. 배가 너무 고파서 많이 읽진 못했지만 오랜만에 눈에 띈 경제 지원 제도 내용을 읽게 됐다.
[사진출처=픽사베이]
볼자 파밀리아.
중학교 시절 지식채널e를 통해 처음 접한 볼자 파밀리아는 ‘복지는 선심성 공약이다’는 내 고정관념을 완전히 부숴버렸다.
제도를 말하기 전에 이 정책을 실시한 룰라 대통령에 대해 잠깐 얘기하자면 룰라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다.
태어난 후 2살이 넘어서야 사진관서 빌린 옷과 구두를 걸치고 생애 첫 사진을 찍었다.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했고 어린 나이에 사회에 나가 선반공이 됐다.
룰라는 자신이 첫 직장을 얻었을 때 집안 반응을 ‘과학자가 배출된 것처럼 기뻐했다’고 표현했다. 가난을 탈출할 수 있을 거란 기대 때문이었다.
선반공 룰라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일하던 도중 왼쪽 새끼손가락이 잘려나갔고 여러 직장을 전전했다.
경제적 가난 탈출에 어려움을 겪던 룰라는 조국 브라질의 극심한 빈부격차와 사회 시스템 부조리를 직접 고치겠다 결심했고 노동자당(PT)을 창당해 대선에 도전한다.
3번 낙선 후 4번째 도전 끝에 브라질 대통령에 당선된 후 당선증을 받은 룰라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나로선 처음으로 인증서를 받아본다’며 눈물을 흘렸다.
룰라는 취임 후 경제 취약계층을 돕는 걸 정책 최우선 과제로 삼았고 오늘날 경제학계서도 유명한 명언을 남긴다.
‘왜 부자를 돕는 건 투자라고 하고 가난한 자를 돕는 건 비용이라 말하는가.’
이후 1인당 수입이 월 50헤알(1헤알 약 230원, 1만 1150원) 미만 가정에 월 50헤알을 지급하고 100헤알 이하 가족엔 최대 45헤알을 지급했다.
지급 조건은 자녀를 반드시 학교에 보내고 예방접종을 맞게 하는 것이다. 출석률이 85% 이하로 떨어지면 지급이 보류된다.
볼자 파밀리아 효과는 의외로 컸다. 세계은행은 볼자 파밀리아에 대해 ‘효과적 사회정책의 모범’이라 평했다.
국가로부터 지급 받은 돈으로 식료품과 생필품을 사고 자녀를 교육시킨 빈민층 가정은 점점 생활 여건이 나아지며 중산층으로 도약했다.
이들이 중산층으로 도약하는 과정서 내수 소비량이 늘게 됐고 이는 내수 경기 활성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경기가 활성화되고 거래량이 늘자 국가 수입도 늘게 됐다. 우리나라로 치면 물건 구매 시 추가로 지불하는 부가세와 소비세를 국가가 가져가는 식이다.
빈민층 2000만 명이 중산층으로 도약했고 브라질은 국가 부채를 해결하고 채무국서 채권국으로 변모하게 된다.
세계 무대서도 당당한 브릭스(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프리카 공화국) 일원이자 세계 8위 경제 대국으로 서게 됐다.
이후 볼자 파밀리아는 브라질 보수 진영으로부터 ‘퍼주기 정책’이란 비판을 받았지만 유엔식량농업기구(FAQ)는 볼자 파밀리아를 ‘배고픔 극복 주요 전략 중 하나’로 평가했다.
사실 퍼주기 정책은 브라질뿐만 아니라 전 세계서 추진된 ‘보편화된 정책 중 하나’다.
어떤 시각과 관점서 보느냐에 따라 퍼주기인지, 사회에 꼭 필요한 정책인지 논쟁이 벌어질 때도 있지만 꼭 나쁘게만 볼 수 없는, 그렇다고 무조건 좋게만 볼 순 없는 ‘양날의 검’과 같은 정책이다.
퍼주기 정책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국가는 그리스다. 그리스는 대학교 등록금이 무료다. 공무원 수도 인구에 비례해 정말 많다. 노동인구 4명 중 1명이 공무원이란 말이 있을 정도였다.
연금 수준도 높아 그리스 공무원 연금의 소득 대체율은 한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2배에 달하는 95%에 달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그리스는 국가부도 위기를 맞았고 2012년 유럽연합(EU)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우리나라가 1997년 당시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긴급히 외화를 빌리고 대신 IMF가 요구한 경제 개혁안을 실천했던 것처럼 그리스도 EU가 요구한 강도 높은 개혁안을 실시했다.
일환 중 하나가 수만 명에 달한 공무원을 무더기로 해고하는 것이었다.
참고로 IMF 사태 당시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IMF 관계자들은 당시 돈으로 5조 원도 남지 않은 우리나라 외환 보유고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올해 8월 우리나라 정부가 내년 예산안으로 편성한 액수가 677조 원이다.
1998년 우리나라 정부 전체 지출액(OECD 기준)은 100조 원이었다. 한 해 예산의 2%도 되지 않는 돈이 곳간에 남은 것이다.
지난달 31일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국세수입 현황에 따르면 올해 9월 국세수입은 23조 1000억 원으로 지난해 동월(9월) 대비 1조 9000억 원 감소했다.
올해 1~9월 누계 국세수입은 255조 3000억 원으로 지난해 동기(2023년 1~9월) 대비 11조 3000억 원이 덜 걷혔다. 기업 법인세 수입 감소가 주요 요인으로 지목됐다.
최상목 기획재정부 장관은 올해 중순까지 ‘절대 손대지 않겠다’고 약속한 지방교부세·교부금에 불가피하게 손을 대야 할 것 같다며 입장을 선회했다.
기업에 제때 걷어들이지 못한 돈을 국민 주머니서 걷어 들이겠단 것이다. 현재 최상목 장관은 야당뿐만 아니라 여권서도 ‘국가 재정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돈 앞에선 누구보다 냉정해져야 한다. 그게 심지어 너의 친가족이라 해도. 돈 앞에선 오로지 너 자신만을 믿어야 한다.’
3년 전 대학 졸업을 앞두고 모교를 찾아간 자리서 은사님으로부터 들은 말이다.
퇴임을 1년여 앞둔 시점 모교서 스승과 제자로 만난 마지막 자리였다.
진로뿐만 아니라 삶에 대해 여러 고민을 하던 시점서 은사님은 경제적 고충에 대해 단호하게 말하셨다.
돈 앞에선 칼보다 냉정해져야 하고 나 자신을 최우선으로 믿는다는 전제하에 써야 한다며 내 앞날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응원해 주셨다.
나는 이 말을 지금도 가슴속에 새기고 있다.
돈 앞에서 냉정해져야 하는 건 국가라고 예외는 아니다. 불가피하게 써야 한다면 그 효과와 이익을 냉철하게 산출하고 신중히 집행해야 한다.
현 정부뿐만 아니라 차기 정부도 ‘돈 앞에선 누구보다 냉정해져야 한다’는 걸 가슴에 새기며 일하길 바란다.
퍼주는 정책이 볼자 파밀리아가 될지 그리스처럼 될지는 본인들의 신중함에 달려 있단 걸 명심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