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매몰된 청춘들을 위한 참회의 회고록, <트라페지움>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고 했던가. 돌이켜 보면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대개 절망보다는 희망에 가까웠다. 어린 시절부터 나를 가장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질문은 다름이 아니라 꿈이 무어냐, 너는 장차 어른이 되어 무얼 하고 싶느냐는 류의 악의 없는 물음들이었다. 그러한 질문들과 마주할 때면 나는 무언가가 되고 싶다 혹은 무엇인가를 해내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한껏 들뜨는 한편, 이내 그 찬란함과 대비되는 현재의 초라함에 탄식하며 금세 무기력함 아래로 깊숙이 가라앉곤 했던 것이다.
그간 나는 크고 작은 꿈들을 여럿 꾸어 왔고, 개중 일부는 아주 휼륭히 이루어 내기도 했다. 그렇지만 마음속 자리잡은 불안의 그늘은 왠지 모르게 무언가를 이루지 못했을 때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이루고 난 이후에 더욱 짙게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일구어 낸 성과가 훌륭하면 훌륭할수록 그로부터 파생된 책임과 욕심의 무게가 나를 더욱 강하게 짓눌렀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꿈을 이루고 난 후에 그 꿈에 매몰되지 않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때로는 의무감 비슷한 심정에 휩싸여 잡은 것들을 놓치지 않고자, 그리고 더 많은 것을 손에 쥐고자 광적으로 꿈에 매달리기도 했다. 꿈이란 필경 이루고 싶은 ‘소망’의 대상으로부터, 반드시 이루어야만 하는 ‘집착’의 대상으로 서서히 변질되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나는 어렴풋이 생각하게 되었다.
<트라페지움>은 꿈에 매몰되어 비참한 실패 내지는 좌절을 맛보았던 모든 청춘들에게 보내는 참회의 회고록이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아이돌이 되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갖은 노력을 펼친 끝에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이내 본인이 이루어 낸 결실에 매몰되어 오로지 연예계에서의 생존에만 광적으로 집착하기 시작하는 주인공 ‘아즈마 유우’의 행보는 ‘꿈’이라는 미명에 지나치게 매달려 비참해지곤 했던 우리네 청춘의 모습과 똑 닮아 있다.
꿈을 꾸는 순간에는 변변찮은 지금 이 순간의 초라함에 곧잘 참담해지고, 꿈을 이루고 난 이후에는 그 무엇도 놓쳐서는 안 된다는 불안감에 한껏 초조해진다. <트라페지움>은 비교적 쉽게 몰입할 수 있는 형태의 간단한 인물 및 상황 설정을 통해 이 지나치게 단순한 청춘 공식을 아주 직관적인 방식으로 풀어냈다. 주인공 ‘아즈마 유우’는 시종일관 이기적이고, 서투르며, 때로는 현명함과 굉장히 거리가 먼 듯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관람객들의 불편을 유발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모두에게 내재되어 있는 보편적 유약함을 일정 부분 대변하고 있는 인물이기에 마냥 부정적인 인상만을 남기지는 않는다.
작품의 종반에 가서 ‘아즈마 유우’는 결국 자신의 청춘을 뒤흔들어 놓았던 불안감과 나약함을 모두 포용하고, 꿈을 이루고자 행했던 미숙한 시행착오들 역시 자신이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필수불가결했다는 결론을 내리며 마음의 안정을 찾는 데 성공한다. 꽤나 이상적이면서도 진부한 마무리이기에 영화의 플롯이 주는 감흥은 다소 덜할 수 있겠으나, 작품을 접하는 관객들에게 보다 직관적인 형태의 위안을 선사하기에는 이처럼 익숙한 전개와 결말이 가장 효과적일 때도 있는 법이 아닐까 싶다.
꿈에 매몰되어 소중한 일상을 미련하게 낭비하고, 때로는 비참한 심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지언정, 지금 이 시간도 분명 후에는 의미 있는 순간들로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네 인생도 진부하지만 결국에는 반드시 행복해질 것이다. 마치 ‘아즈마 유우’의 삶이 그러했던 것처럼. <트라페지움>은 우리에게 그렇게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