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해 보니 다 내 미련 때문이었다. 그래도 포기는 없다. 다시
헤드헌터에게 넘어온 경력직 포지션은 까다롭다. 적지 않은 비용을 주고 데려온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회사는 서치펌(헤드헌터 회사)에게 오더 주기 전에 잡포털, 사내 공고, 인맥 등을 통해 채용을 시도한다.
그러다 3개월, 6개월, 마냥 시간이 지나간다. 급한 경우도 서치펌 활용은 신중히 결정된다. 신입보다는 경력 팀원, 팀장, 임원, 대표를 채용할 때 활용될 수 있다. 경쟁사 혹은 타깃 회사가 있는 경우도 쓴다.
직급이 올라갈수록 자격 요건은 까다로워진다. 임원은 오너 등 경영진뿐만 아니라 팀장, 팀원이 납득할만한 사람이어야 한다. 뭔가 조금이라도 의심스럽거나 망설여진다면 절대 안 된다. 서치펌 추천이 필요한 이유다.
가장 어려웠던 포지션 중 하나를 소개하려 한다. 대기업 임원 채용은 전부 까다롭다. 거기에 외국의 글로벌 회사 출신 조건이 끼면 더욱 어렵다. 더군다나 특정 분야의 연구 개발직이라면 극상의 난이도라 할 수 있다.
[매번 그렇지만 개인, 고객 정보 보호 때문에 고유명사, 지역, 업종, 개인약력 등 바꿔 소개하는 점 양해 바란다.]
코로나 시절, 어느 식품업계 대기업 인사팀장의 전화를 받았다. 통상 담당자가 Job Description을 메일로 보내주면서 시작했는데 이번엔 달랐다. 자격요건은 간단했다. ‘글로벌 기업 경력, 식품연구, 50대 중반까지, 박사 학위’였다.
그 당시 K푸드 열풍을 타고 너도나도 해외로 진출하는 시기였다. 이 회사도 같은 고민이 있었고 외부수혈을 통해 체질을 개선하려는 의도가 느껴졌다.
서칭 시작은 2022년 11월 중순이었다. 몇 주간 뒤진 끝에 미국 식품대기업 재직자를 찾아냈다. 그는 50대 초반의 싱글 맘 A 씨였다. 국내 최고의 대학 식품공학과, 카이스트 석사 졸업 후 화학 대기업에 입사했다. 3년 만에 연구원 생활을 끝내고 박사학위를 위해 미국으로 갔다.
미국 유명대 박사 학위 취득 후, 한국인조차 친숙한 브랜드의 회사 연구원이 됐다. 찾는 순간 바로 이 사람이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그런데 지원할까?’라는 두려움이 생겼다.
“이제는 돌아오실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로 카카오 보이스톡 대화를 시작했다. 시차 때문에 매번 미국시간에 맞춰 밤 9시 이후에 연락했다. 처음엔 미지근했지만 대화를 거듭하며 조금씩 가능성이 보였다.
결국 A 씨가 지원을 결심하게 된 것은 가족 때문이었다. 한국에 귀국해 홀로 계신 고령의 어머니와 함께 살겠다는 결심, 대기업 임원이라는 간판도 작용한 것 같았다.
제일 먼저 받은 영문이력서를 한국화 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영문 이력서에서 요구하지 않는 정보가 한국 이력서엔 필요하다. 나이, 성별, 사진, (비공식적으로 기혼 여부 등)
그런데 직급체계가 달라 후보자에게 문의했다. 이렇게 답을 받았다.
[A 씨 회신 (시작)]
재직사는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는 자회사들이 모인 그룹사입니다. 연구소 연구원들의 직급 체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Technologist - Scientist - Scientist II - Sr. Research Scientist - Manager - Sr. Manager or Principal Scientist - Director or Fellow Scientist로 되어 있고 Fellow Scientist는 전임자 퇴직 이후 약 5년 이상 공석입니다.
그리고 연구 조직의 임원(인력 관리, 평가, 행정 업무)은 브랜드나 자회사 별로 Sr. Director - 그리고 2개의 큰 하부 그룹의 Vice President - 전체 그룹사의 Senior Vice President(SVP)가 있으며 SVP는 그룹사 전체 R&D를 총괄 CTO입니다.
이러한 조직 체계에서 개별 연구자(Principal Researcher)로 연구에 집중하기도 하지만 다양한 기술 프로젝트에서 Project Mananager(PM)로서 해당 상품 기획 직원, 연구원들의 역할을 조정하고 개발 전략, 추진 등을 총괄했습니다. 간략히 표현하면 프로젝트별 기술 책임자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렇지만 PM은 프로젝트 내 연구원이나 직원의 인사 고과(평가)를 하지는 않습니다. 해당 프로젝트의 추진과 결과를 도출하는데 집중합니다. 대부분 기술적인 부문에 역할과 책임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입사하면 기술적인 부문에선 전반적인 업무가 가능하고 자신 있지만 인력관리, 평가, 예산, 구매 등 행정적인 부분은 일정 기간 지원을 바랍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이런 업무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보다는 채용사가 다른 회사 문화와 다른 체계를 갖고 있어서 이해하고 적응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A 씨 회신 (끝)]
임원급 후보자 추천의 경우, 종종 헤드헌터가 기본 정보를 바탕으로 편집 등 재구성한다. 그러고 나서 본인의 검토, 수정, 보완을 거친 뒤 채용사에 제출한다.
후보자 이력서 수정, 편집이 번거롭다고? 성공 보수를 감안하면 아깝지 않다. 그러나 가능성과 수수료는 반비례하고 대기업 임원 자리는 모든 지원자가 적극적이다.
일주일에 거쳐 밤마다 후보자와의 통화, 메일을 주고받고 나서야 완성된 이력서를 채용사에 전달했다. 채용사의 반응은 확실했다. 사흘 만에 화상면접 일정이 잡혔다. 채용사, 후보자 모두 합의한 일정은 12월 28일 점심시간(12시~1시)였다.
크리스마스이브, 당일까지도 면접 관련 예상질문을 정리하고 협의했다. 성공만 한다면 몇 달치의 생활비를 벌 수 있기에 내 의욕은 샘솟았다.
잘 되리라 생각했고 화상면접은 무난했다. 대표이사와 아마도 오너 일가 중 1명이 면접관으로 참석했다. 그리고 하루 뒤 바로 면접 합격이 결정됐다. 맘 속으로 ‘합격이구나’ 하는 환호성이 나왔다. A 씨에게 연말 휴가 후 다시 연락하기로 했다.
이런 경우가 흔치 않았던 채용사는 내게 처우 관련 협의를 맡겼다. 그러나 이것은 고난의 시작이었다. 세상에 공짜가 없었다. 어느 때보다도 기쁜 연말연시가 될 것이라는 희망이 이 메일과 함께 깨졌다. 지나고 보니 이것은 아주 중대한(critical이 나을까) 징조였다. 청천벽력이었다.
[A 씨 메일 (시작)]
From : A 씨 <a@gmail.com>
To : "헤드헌터" <hh@headhunter.co.kr>
Sent : 2022-12-30 23:11:52
Subject : Re: [RE]Re: [RE]Re: [RE]Re: 20분 일찍 접속 요청드립니다.
안녕하세요. 헤드헌터님 늦은 시간인데 저의 메일을 기다리실 것 같아서 연락을 드립니다. 면접 전후에 고등학생 아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이가 한국에 가지 않고, 혼자라도 미국에 남겠다고 합니다. 현재 다니고 있는 학교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한창 사춘기인 아이라 설득이 쉽지 않네요.
주말에 친정식구들과 가족회의를 열어 보려고 합니다. 별다른 해결책이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이 아빠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최종결론이 나오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여러 가지로 죄송하네요.
[A 씨 메일 (끝)]
절망했다. 그렇지만 조금 더 생각해 봤다. 통화를 해보고 결론을 내려야 하겠다고 맘먹었다. A의 목소리는 어두웠다. 귀국, 대기업 임원, 효도 여러 가지가 눈앞에 있었지만 ‘엄마’는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장시간 통화 끝에 결론은 아이와 다시 이야기해 보겠다였다.
A 씨를 설득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메일을 보냈다.
[내 메일 (시작)]
From : "헤드헌터"
hh@headhunter.co.kr
To : A 씨 <a@gmail.com>
On Sun, Jan 1, 2023 at 6:01 AM
안녕하십니까? 헤드헌터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자녀 관련 고심이 많으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가 박사님 입장이라도 당연히 고심하고 어려운 결정이라고 생각됩니다.
자녀 그리고 박사님이 상의하시고 결정을 내리시는데 도움이 될까 해서 제가 알아본 정보를 간단히 알려드립니다. 한국에서 자녀 분 학업을 고려하신다면 제가 보기엔 다음과 같은 방법도 있습니다. 먼저 적합한 국제 학교를 찾아봤습니다. 인천 송도의 채드윅 국제학교가 있습니다.
https://www.chadwickinternational.org/
https://m.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208101425001#c2b
https://m.blog.naver.com/kcarey1/221678311463
직장이 인천 송도인 점 고려하면 같은 지역의 채드윅이 적합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연간 학비는 4,500만 원 내외라고 합니다. (제 생각엔 채용사에 별도로 교육비를 요청하는 방법도 있지만 희망 연봉에 학비를 추가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 경우, 자택도 인천 송도로 정하시는 편이 유리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통학, 출퇴근 모두 편리합니다. 인천은 상대적으로 서울 대비 주거 비용이 낮고 송도는 인천에선 가장 좋은 주거 환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참고로 하시고 채용사에 내일 아침(1/2 오전 한국시간, 12/31 저녁 뉴욕시간)에 회신을 해야 하는데 말씀하신 최종 결론이 나시면 제게도 알려주세요. 채용사에 전달하겠습니다.
혹은 더 시간이 필요하시면 채용사에 추가 시간을 요청하겠습니다. 괜찮으시면 내일 아침 8시(1/1 18:00 뉴욕시간) 통화를 희망합니다. 감사합니다. 헤드헌터 배상
[A 씨 메일 (끝)]
그리고 보낸 이메일 탓일까? A 씨는 지원하기로 번복했다.
그 후 1월 한 달 동안 내가 한 일들은 처우 협상, 비자(자녀) 해결이었다. 채용사도 충분한 처우를 제시했고 주거, 교육비를 적극 지원하기로 했다. 난 한국과 미국의 임금 수준, 소득세, 건강 보험 등의 조건을 알리고, 맞추고 양측을 설득했다. 자녀 국적, 비자 문제 해결을 위해 외국인관리사무소, 브로커 등과 연락했다.
힘들기도 했지만 많은 것을 배웠다. 한국과 미국의 소득세 금액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미국 기업에서 제공하는 건강보험은 한국의 건강보험과 실손보험을 통해 맞출 수 있었다. 자녀 국적, 비자는 좀 까다로웠다.
미국에서 자녀가 태어날 당시 아빠, 엄마 한쪽이라도 한국 국적이라면 그 아이는 자동으로 한국 국적이 생긴다. 나중에 부모 모두 미국 국적으로 바뀌더라도 상관없다. 그래서 입국 시 출생신고를 하고 대한한국 여권을 받아 들어오고 나중인 18세에 국적을 선택해야 했다.
그리고 미국동포가 된 A 씨의 비자를 위해 전과조회가 필요했다. FBI 기록을 받아 미국 국무성의 아포스티유를 받아야 됐다. 코로나 시절 아포스티유를 받는데 수개월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채용사는 5개월 뒤 입사도 동의했다.
성공과 실패는 한 끗 차이일까? A 씨에게서 이런 메일을 받았다.
[A 씨 메일 (시작)]
----- Original Message -----
From : A씨 <a@gmail.com>
To : 헤드헌터 <hh@headhunter.co.kr>
Sent : 2023-02-03 23:46:46
Subject : Re: 연락 관련(2/5 일 18:30)
헤드헌터 님 그동안 비자문제만 있다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이의 양육권을 제가 가지고 있지만, 외국으로 미성년 아이를 데리고 가려면 아이아빠의 사인이 필요합니다.
매년 한국으로 여행을 갈 때도 관련서류에 사인과 공증을 받았었습니다. 작년에 면접을 준비할 때 한국으로 갈 수 있다고 전남편에게 알렸고, 변호사를 통해 관련서류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아이의 아빠가 아이가 한국으로 가는 것을 거부하겠다고 어제 최종통보를 했습니다. 그렇다고 미국에서 아이의 양육을 맡겠다고 하는 것도 아니어서 골치가 아픕니다.
미국 가정법원에 가지고 가서 싸우려면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입니다. 그동안 헤드헌터 님과 천 팀장님 두 분께서 너무 수고가 많으셨는데 이렇게 되어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팀장님께도 이 소식을 알려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팀장님께서 전화통화를 원하신다면 알려주세요. 정말 죄송합니다. A 씨 드림
[A 씨 메일 (끝)]
11월부터 다음 해 2월 초까지 크리스마스, 연말연시, 설날 매달렸지만 수포로 돌아갔다. 채용사 팀장도 괜찮다 했지만 나를 얼마나 원망했을까? 애초에 시작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그 후 한 동안 슬럼프가 찾아왔다. 낙담한 난 OTT에 꽂혔다. 그러다 리암 니슨 주연의 '테이큰'을 봤다. 그 순간 A 씨의 마지막 회신이 이해됐다. 리암 니슨의 딸은 줄기차게 이혼해 따로 사는 아빠의 동의서를 요구한다. 고작 파리로 여행 가는데.....
자식이 외국으로 나가면 따로 사는 부모의 접견이 어려워질 수 있는 것이다.
그것만이 이유였을까? 제일 처음에 A 씨는 자식 때문에 (이직이) 어렵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걸 나는 무시하고 해결하려 했다. 이직은 큰 변화이다. 아주 적극적이고 굳건한 결심과 의사 없이는 될 수 없는 일이다.
요즘도 후보자에게 제안하고 추천할 때. 이런 생각을 한다. 이 후보자는 끝까지 갈까? 그때로 다시 되돌아가더라도 A 씨에게 지원을 종용했을까?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런 희망이 없다면 헤드헌터 일은 더 괴로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