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금요일 저녁엔 채널A에서 방영중인 <금쪽같은 내 새끼>를 본다. ‘육아예능’이라니. ‘내새끼’라니. 물론 <금쪽같은 내 새끼>는 슈퍼맨이 돌아오고, 아빠가 어딜가는 류의 셀러브리티 육아관찰예능과는 다르다. ‘육아 솔루션’프로그램인 <금쪽같은 내 새끼>는 오은영이라는 전문가가 출연해 아이의 ‘문제행동’을 교정한다는 점에서 지난 시절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프로그램의 제목의 변화가 보여주듯, 이제 육아예능에서 중요한 것은 ‘달라진 아이’뿐만 아니라 아이를 향한 ‘금쪽같은’ 부모의 마음이다. 그렇다. 이 프로그램은 ‘진단과 해결’의 과정과정에 좀 특별한 서사구조를 결합시킨다. 매회 등장하는 아이들과 부모, 그리고 그들이 토로하는 ‘문제’와 받게되는 ‘해결책’은 다를지라도 이 일련의 과정은 일정한 서사적 형식 위에서 이뤄진다.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와 가장 크게 다른점은 아이의 문제행동을 보여주고, 이를 전문가가 교정하는 기존의 형식에 스튜디오 예능을 결합했다는 점이다. 정면에 두 부부, 그 부부의 양 쪽으로 전문가와 패널이 자리한 스튜디오는 ‘조정위원회’ 마냥 부모를 위한 해명, 고백, 성토, 반성의 무대다. 이어서 프로그램은 VCR을 통해 그들의 일상생활들 보여준다. 그때마다 스튜디오 속 전문가는 이들이 어떻게 ‘잘못된 의사소통’을 하고 있었는지 이야기한다. 부모는 반성한다. 프로그램의 말미에 이르러 아이는 카메라를 보며 자신이 ‘문제행동’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진짜이유’를 고백한다. '엄마 아빠가 나를 좀 더 봐주길 원했어요.' '엄마아빠와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어요.' '엄마아빠로부터 인정을 원했어요.' '엄마아빠의 눈치를 보고 있었어요.' 부모는 눈물을 흘린다. 자막이 붙는다. ‘부모는 다들 처음이라.’
그리하여 결국 실패란 ‘숭고함’의 마련을 위한 장치다. 실패는 힐난과 질타의 대상이 아닌, 부모의 사랑이 부각될 수 있도록 하는 계기다. 문제행동에 관한 기능적 해결만큼이나 전경화 되는 것은 ‘내 새끼’를 향한 부모의 사랑이라는 지극히 휴머니즘적인 서사인 게다. 이 휴머니즘 서사는 육아 솔루션 프로그램이라는 ‘마이너장르’임에도 불구하고, 지난시절의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와 다르게 <금쪽같은 내 새끼>가 금요일 저녁 8시라는 ‘프라임 타임’에 배치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힘을주고 부모의 죄를 고하는 만큼이나, 그 죄를 사하는 이 프로그램은 ‘다만 몰랐을 뿐’을 뒷말로 붙이고, (여타 휴머니즘 서사가 그렇듯) 문제의 사회적인 계기들을 봉합한다. 이제 남은 것은 아이를 대하는 능력을 ‘계발’하는 일이다. 원인과 해결책이 일정수준 ‘개인’단위로 내려오고, 아이를 향한 부모의 사랑은 '자연적인 것'으로 정초된다.
아동이나 어린이가 자연적이 범주가 아니라 근대적 기원을 가지고(필립 아리에스), 문화적 재현물 속의 아이란 ‘이성애와 자본주의’의 풍요로운 내일에 관한 은유로서 ‘재생산적 미래주의’(리 아델만)의 혐의를 지닌다는 사회과학의 이론적 논의들을 고려하면, 우리는 <금쪽같은 내 새끼>를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적 텍스트라 평할 수 있을 게다. ‘미래/희망/발랄함’으로서만 귀한 것이 되곤하는 아이들, ‘어린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육영재단이나 새세대재단같은 6070년대의 군부독재부터 그 최신형인 아빠랑 어디가거나, 슈퍼맨이 돌아오는 ‘부드러운 (정상가정) 중산층 남자’에게 '정상적'이고 '규범적'인 가족의 형태를 강조하기 위한 유용한 도구였다. 그러니 <금쪽같은 내 새끼> 역시도 그렇다고, 온전히 아이, 부모, 사랑, 가족에 관한 규범적인 이야기를 전파하는 텍스트라고, 올바른 가족과 올바른 아이에 관한 전형을 제시하는 텍스트라고만 갈음할 수 있을까.
<금쪽같은 내 새끼> 속에는 여타 관찰예능이 그렇듯 서사의 상징 내로 봉합이 완전히 이뤄지지 않은 주인공의 일상의 흔적들, 일종의 증상(Symptom)들이 등장한다. 이른 새벽 출근해 자정이 가까워 퇴근하는 부부, 성별에 따라 불평등하게 분배된 육아의 몫, 화면 모퉁이에 담긴 빛바랜 가구와 옷이 바로 그것이다. 계층, 계급, 성별이라는 사회적 범주들이 이 문제와 깊이 관계되어있음을 암시하는 증상들 말이다. <금쪽같은 내 새끼>의 내부에는 스스로의 이데올로기에 균열을 내는 요소들이 있다. 물론, 이 요소들은 일면 휴머니즘을 더욱 부각한다도 말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화면 속 부모들이 ‘스스로의 죄’를 인정할 때, 당신에게는 죄가 없다고 전문가를 대리해 그 죄를 사하길 원하는 수용자의 정동(Affect)을 어떻게 신파로 환원할 수 있을까. 우리는 모두 알고있다. 의도는 자주 굴절되며, 사랑은 쉽게 실패하고, 관계란 온 힘을 다해 노력해도 미끄러진다. (다소 진부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힘을 내어보자는 시청자들의 마음씀을 쉽게 갈음할 수는 없을게다.
한편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와는 달리 서사형식을 강조한 이 프로그램은 ‘아이’를 일종의 알레고리로서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키도 한다. 부모의 돌봄이 부재한 아이의 문제는, 사회적 안전망이 민영화된 시절의 민중의 삶으로, 인정에 인색한 부모는 사회적 모욕과 낙인을 승인하는 시스템으로 변한다. 부모의 얼굴을 한 상징적 질서는 ‘너를 사랑하는 진심’과 이 ‘실수’를 분별해 읽을 것을 간곡하게 요청하며 기능적 대안을 약속한다. 이를 반기지도 거절하지도 못하는 아이의 얼굴처럼, <금쪽같은 내 새끼>는 돌봄과 인정에 관한 동시대 ‘정치적 무의식’을 어렴풋할지라도 분명 감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건 (제임슨의 이야기처럼) 육아솔루션에 ‘서사’라는 형식을 붙였기에 등장하는 힘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매 회 ‘오은영’이라는 진행자/전문가/시스템의 능력에 감탄하게 된다. 그는 개인의 계발을 이야기하면서도(행동의 교정), 일상이란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돌보는 일과 돌봄을 받는 일임을 상기시킨다. 여기에는 사회와 개인 간의 관계도 포함될 것이다. 누군가를 돌보는 일이 얼마나 많은 주의를 요청하는 일인가를 강조하면서도, 언제나 필연적일 수 있는 실패를 강조하면서도, 함께 노력할 것을 요청한다. 개념어와 일상어를 섞어 이야기하고, 아주 개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면서도 사회적인 것을 떠올리게 만든다. 물론 계층, 노동 등 어떤 선에서 너무 확실하게 멈춰서서, 다시 아주 매끄럽게 우회로로 우리를 이끄는 (백스텝이 아니라 우회로일 것이라며 몰입을 유지케하는) 섬뜩한 능력도 포함된다.
사진. 채널A <금쪽같은 내 새끼>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