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1 - <가족각본>을 읽고
평소 인권에 관심이 많고, 나름 스스로가 깨어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가족각본>을 읽고 난 후 나는 갈 길이 멀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해 보니 웃기다. 여성인 내가, 여성 인권에 관심을 가져야만 우리 사회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게. 그만큼 우리 사회는 잘 짜인,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어떤 부분이 이상한지 알 수 없는 거대한 각본이라는 뜻이 아닐까. 그런데 아주 사소한 것부터 물음표를 달기 시작하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불평등한 사회인지 잘 알 수 있다. <가족 각본>은 이러한 그동안 생각해 보지 못했던, 어쩌면 하지 않았던 물음표가 많이 담겨있는 책이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맞벌이라서 엄마는 항상 집에 들어가면 아무도 없는 불 꺼져있는 거실이 자신을 맞이했다고 했다. 그래서 나중에 꼭 결혼해서 불이 환히 켜있고, 사람들로 복작거리는 집에서 살고 싶었다고 했다. 엄마는 그렇게 결혼을 했고, 나를 낳았고, 내 동생을 낳았다. 엄마는 지금 행복할까?
엄마는 드라마 <며늘아기>의 애청자였다. 드라마를 볼 때면 엉엉 울더니 내게 와서 “결혼하지 마. 하더라도 최대한 늦게 해”라고 말하고 가셨다. 엄마가 내게 이 이야기를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과 차별과 포기가 있었는지 가늠이 안 간다.
그러니 의문이 든다. 지금 우리 사회는 무엇을 위해 결혼제도를 수호하는가? (...) 애초에 사람이 태어난다는 의미를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건지.
우리나라는 심각한 저출생 국가다. 아이가 태어나지 않아 나라가 사라질 수도 있다고 한다. 나라에 사람이 없다니. 이건 분명 심각한 문제다. 그렇다면 우리는 나라를 위해 아이를 낳아야 하는가? 그럼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나라를 위해 태어난 걸까? 그렇다면 가족은? 나라를 위해 아이를 낳기 위해 결혼을 하여 가족을 꾸려나가야 하는 걸까? 결국 가족은 나라를 위한 걸까? 물음표를 달다 보니 문득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나라가 나한테 뭘 해줬는데?’라는 삐딱한 생각이 든다.
아무도 아이를 낳지 않아서 발생하는 결과만 생각하면, 하루빨리 더 많은 사람이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생각은 어쩌면 당연하다. 사람이 곧 노동력이라는 말도 사회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이 또한 맞는 말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할까? 우선 아이를 낳으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 질문을 하지 않는다는 것부터 시작한다. 아이를 낳으라는 결과만 강요할 뿐, 이를 원하지 않는 이유를 묻지 않는 것부터.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아이를 낳지 않을까? 단순히 ‘전 아이를 싫어해서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보통 임신 후 겪게 될 수많은 고통을 견디고 싶지 않아서, 아이를 잘 키울 자신이 없어서, 이 사회에서 내가 겪은 고통을 내 아이는 겪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아이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즉, 저출생의 근본적인 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출생률은 저조하지만, 자살률은 매우 높다.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끊으려 하는 나라에서 사람이 태어나지 않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살기 힘들다는 뜻이 아닐까. 성별, 재력, 학벌… 이외 수많은 기준에 따라 사람의 급을 나누고 혐오하고 차별하는 사회. ‘우리’보다는 ‘너’와 ‘나’가 익숙한, 까다롭고 차가운 사회. 여전히 우리는 이런 사회에서 살고 있다.
‘며느리가 남자라니!’라는 외침은, 단지 성소수자에 대한 반대가 아니었다. 동성애, 그리고 동성결혼을 반대한다는 것은, 곧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이성과 결혼하고 자녀를 출산해야 한다는 메시지이고, 여성과 남성에게는 서로 다른 역할이 있음을 상기시키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성소수자 반대운동은 가족각본을 절대적인 도덕률로 신앙화하는 작업이자, 가족각본에서 벗어난 삶의 형태를 부정하고 가부장적 질서를 유지시키는 핵심 담론이었다.
임신한 여성은 일을 이어가기 어렵다. 단순히 신체적인 변화 때문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 사회의 직장에서는 임신한 여성을 반기지 않고 이는 자연스럽게 경력 단절로 이어진다. 여성이 육아하고, 남성이 돈을 벌어야 한다는, 누가 정한 건지도 모르는 역할을 부모는 아무 저항 없이 수행해야 한다. 저항하면 비난의 시선과 온갖 수군거림을 견뎌야 하며, 이를 견디는 것은 아주 쉽지 않다. 결국 아이를 위해 사회가 짜놓은 각본에 맞게 돌아가게 된다. 이런 사회에서 누가 아이를 낳으려 하겠는가. 이 사회는 아이를 낳는 순간 펼쳐지는 수많은 장애물을 치워줄 생각은 하지 않으면서 모든 게 바뀌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과연 가족이란 무엇인가 근본적인 의문을 갖게 된다. 반드시 남성과 여성이 결합하여 자녀를 낳는 것이 가족의 본질일까? (...) 어쩌면 좋은 양육자란 사실 성별과 별로 관계없을지도 모른다.
한국은 가족관계등록부에 ‘보이는’ 가족관계를 ‘정상’으로 만드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다.
가족의 본질은 무엇일까? 나는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의 집합체가 가족이라고 본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 사랑을 서류로 판단한다. 법적으로 인정받아야만 가족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남성은 여성을 사랑해야 하며, 여성은 남성을 사랑해야 한다. 나의 아이여도 까다로운 절차를 통해서만 나의 아이라는 법적인 인정을 받을 수 있다. 바라는 것이 참 많다.
예전에 그런 글을 봤다. 레즈비언 A 씨가 응급실에서 보호자를 불러야 하는 상황이었다. A 씨는 동거인이자 애인인 B 씨를 부르려 했으나, ‘법적’ 보호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고 한다. 그런데 A 씨는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법적 보호자인 가족과 의절한 상태였다. 법적 보호자보다 가까운 사람에게는 보호받을 수 없고, 남보다도 못한 사람은 법적 보호자라는 이유로 보호당해야 한다. 나라가 생각하는 가족이란 무엇일까. 사랑하지는 않지만, 법적 보호자로 설정된 부모는 가족이고, 사랑하지만, 법적 인정을 받지 못한 사람은 가족이 아니라니, 아이러니하다.
우리 사회는 ‘왜’를 생각하지 않는다. 결과만 보고 ‘그 결과가 문제야’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한다. 문제가 해결되려면 그 뿌리부터 바로잡아야 하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이 이기적인 사회를 어떻게 고쳐야 할까? 가만히 사회가 혼자 자아 성찰해서 알아서 모든 것을 깨닫기만을 기다려야 할까? 그럴 수는 없다. 그러니 우리는 공부해야 한다. 공부라고 해서 거창한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지금 어떤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것인지, 사회가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나라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여러 편견 속에서, 그것이 옳다고 믿고 더 이상 관심 두려 하지 않으며, 잘 짜인 각본 속에서 그 각본 그대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비혼주의자가 아니다. 지나가다 아이를 보면 나도 모르게 함박웃음이 날 정도로 아이들을 사랑한다. 하지만 아직 나는 결혼하고 싶지 않고, 그 이유는 나의 문제보다는 사회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의 배우자가 나와 성별로 역할 갈등을 하지 않아도 되는, 나의 자식이 고액 과외 선생님 없이도 배우고 싶은 것을 마음껏 배울 수 있는, 성별이 무엇이든, 어떤 성별을 좋아하든, 장애가 있든, 없든, 누구에게나 똑같이 평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그런 사회가 온다면 나는 결혼 무새가 될지도 모른다. 정말로 내가 바라는 사회가 와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게 된다면 사랑하는 나의 자식에게 가족의 본질은 사랑이니, 사랑하는 사람의 성별이 무엇이든, 정말 사랑한다면 꼭 가족이 되길 바란다고 말해야지. 어쩌면 정말 그런 사회가 올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