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멜번

by 포포

나는 귀가 얇다.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다른 사람에 의해 떠밀리듯 결정해 버릴 때가 있다. 워킹 홀리데이를 계획하던 그 시기도 그랬다. 함께 가기로 했던 친구 S가 멜번에 가고 싶다고 했다. 시드니는 이래서 좋아, 브리즈번은 이래서 좋아, 멜번도 이래서 좋아. 하며 얼떨결에 우리의 행선지는 그렇게 멜번이 되었다.

그렇지만 가끔은 이렇게 떠밀리듯 하는 결정도 나쁘지만은 않을지도 모르겠다. 수년간 축적된 나만의 데이터가 말해준다. 이걸 하라고, 여기로 가라고.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면, 제법 근사한 곳에 도달해 있는 내가 보인다. 미술관 가는 걸 좋아하니까, 카페 가는 걸 좋아하니까. 날씨를 조금 타긴 하지만 호주라면 다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여러 도시를 두고 저울질하던 나에게 S가 결단을 내려준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가지지 못한 S의 이런 결단력과 추진력을 좋아한다.)

다른 도시에 갔다면 우리의 워홀 생활이 어떤 모습이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악명높은 멜번의 날씨마저도 사랑해 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분명 출발할 땐 흐렸는데, 트램을 타고 바닷가에 도착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맑은 하늘이 우리를 반겨준 적도 있었다. 나를 기점으로, 왼쪽은 비가 오고 오른쪽은 쨍쨍하기도 부지기수다. 그래서 그런지, 호주에는 잠깐 내리는 비에는 우산을 안 쓰는 사람이 많다. 가방이 무거운 걸 싫어하는 나도 어느덧 우산을 안 챙겨 다니는 게 익숙해지곤 했다. 도대체 옷을 어떻게 챙겨가야 하나 싶어 검색을 엄청 했었다. 근데 글쎄 같은 시기에 옷차림이 너무 다양한 거 아닌가. 어떤 사람을 패딩을 챙겨가라 하질 않나, 어떤 사람은 같은 시기에 반팔 반바지 입은 사람도 있다 하질 않나. 가기 전엔 도대체 날씨가 어떻길래 싶었는데, 사람들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젠 너무 알겠다. 한국의 가을 보단 기온이 살짝 높지만, 바람이 매섭게 불어 뼈가 시리다며 S와 말하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그런지 사계절이 있음에도, 멜번을 생각하면 왠지모르게 가을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물론 한 여름엔 무지 덥다. 숨도 못 쉴 정도로..) 갑자기 춥고 건조해진 요즘의 날씨를 보며 멜번을 떠올리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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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린 날씨에 바다를 가기로 결심한 후 바닷가에 도착했을 때 마주한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