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 오브 라이프>는 누구든 피할 수 없는 인생의 문제, 고통과 방황을 다룬다. 인간의 고뇌와 의문에서 시작하여 신께 다다르는 영화. 나에게 이 영화는 한 편의 묵상집 또는 간증문처럼 느껴졌다. 초반에는 욥 이야기를 재해석한 듯 인간의 고통에 대해 창조주의 전지전능함으로 답하고, 이후부터 잭의 방황에 대해 구원자의 인도하심으로 답하는 듯하다.
1. 첫 번째 대답, 창조
사랑하는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절규. “나도 따라서 죽고만 싶어. 그 애 곁으로 가고 싶다구” 그녀는 하늘을 보고 나무를 보다가 슬픔에 잠겨 눈을 감는다.
“제 믿음이 부족했나요”
“하느님”
“왜입니까”
“어디에 계셨나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인간은 묻고 또 묻는다.
여기서부터 장엄한 음악과 함께 미친 장면들이 펼쳐진다. 창조 세계를 시각화한다. 정체 모를 빛과 물결의 확장, 우주의 시작, 폭발과 용암, 불과 물, 파도와 구름, 땅과 하늘, 생명의 태동, 세포와 원핵생물, 해파리, 공룡과 운석과 빙하기.. 그리고 인간.. 잭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약 20분 동안 이제껏 듣도 보도 못한 이미지, 대자연과 우주를 비롯해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창조 과정에 압도된다.
그렇다. 이것은 욥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말씀이다. 욥기 38장에 등장한 신은 욥에게 질문을 퍼붓는다. 땅의 기초, 바다, 하늘의 궤도, 들의 생명에 대해 아느냐고, 누가 그것들을 만들었냐고, 누가 주관하느냐고 묻고 또 묻는다. 제가 고통 중에 있을 때 어디에 계셨냐는 인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인간은 창조주 앞에서 우리의 무지와 무능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모른다. 우리 경험과 인식의 한계를 고백할 수밖에 없다. 신께 어디에 있었냐고 물을 수 없다. 선한 이들이 왜 무참히 고통받는지 이해할 수 없다. 우주의 창조를 다 헤아릴 수 없고 왜 지구가 태양을 돌고 어떻게 공룡이 다 죽을 수 있는지 묻고 따지고 판단할 수 없듯이. 세상에는 인과응보의 원리로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일이 벌어진다. 그 인식 불가능성에서 우리는 창조주의 절대주권과 전지전능함을 깨닫고, 그분 앞에 겸허해진다.
2. 두 번째 대답, 구원
잭은 어린 시절 사랑과 기쁨으로 충만한 어머니의 품을 지나 규율과 힘을 담당하는 아버지의 질서 안으로 편입된다. 아버지는 강해야 성공한다는 논리로 아들들을 혹독하게 가르치고, 잭은 아버지를 증오하는 동시에 아버지를 닮아가기도 한다.
“제 맘속은 항상 두 분과 씨름해요.”
“절 보고 계신가요?”
“왜 착하게 살아야 하죠?”
“하느님, 아빠를 죽여주세요.”
사랑하고 용서하며 은혜를 구하는 삶과 권력을 따라 자신의 힘으로 사는 삶 사이에서 어디로 가야 하는가. 잭은 금지된 것을 욕망한다. 반항심이 극에 달해 아버지에게 고함을 지르고 동생의 손가락에 엽총을 쏘는데, 이때부터 어둠에서 빛으로 분위기가 전환된다.
두 가지 장면이 연이어 용서와 회복의 전주곡을 이룬다. 먼저는 동생이 잭을 용서하는 장면이다. 어머니를 닮은 동생은 시종일관 자신을 자극하고 위협하는 형을 언제나 받아들인다. 때리고 싶으면 때리라는 형의 자극에 때리는 시늉으로 답하고, 사실은 죄책감에 시달렸던 형이 사과하자 손을 잡아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다음은 아버지의 뉘우침이다. 힘의 논리로 성공을 향해 질주하던 아버지가 회사의 부도 앞에서 무너지고 약해진다. 높은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지금은 먼지 같은 자신을 느낀다며 이제야 자연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너희 삼형제만 있으면 된다고, 그동안 심했다고 잭에게 고백한다. 그들의 포옹. 무너지고 방황하는 존재에 대한 용서와 사랑. 그렇게 사랑을 이야기하는 어머니의 나레이션과 함께 잭의 회상이 끝난다.
영화는 이제 웅장한 기악곡과 함께 신의 두 번째 대답을 펼쳐 보인다. “나를 따라와.” 동생의 목소리를 따라 어둠에서 빛으로, 문을 열고 환상의 세계로 들어서는 잭. 초반에 보였던 황무지가 보인다. 이 황무지는 방황하는 잭의 공허하고 메마른 마음과 다름없다. 황무지를 지나 문을 통과하면, 끝없이 펼쳐진 바닷가가 나타나고, 바닷가에서 다시 만난 가족, 포옹과 일식, 물속에 잠기는 가면, 눈물의 재회와 같은 장면들이 쭉 이어진다.
‘언제 처음 제 안에 들어오셨습니까?’
‘하지만 이제 알아요. 절 부르고 계셨다는 걸’
‘저희를 지켜주시고, 당신께 인도하소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잭과 함께하고 잭을 받아주고 잭을 인도하는 신의 손길이 그를 이곳으로 부른 것이다. 세상 너머의 세상으로. 빛과 물의 교향곡이 울려퍼지는 이곳으로. 결국 신은 인생의 고통과 방황을 무한한 용서와 사랑으로 뒤덮어 모든 것의 화합과 회복을 이루신다. ‘생명의 나무’라는 제목은 무엇을 의미할까. 마지막의 마지막 장면은 바로 해바라기밭이었기에, 궁극적인 생명의 근원이 바로 빛과 물로 표상되는 신, 신의 자비와 사랑이라고 말하는 게 아닐까.
나는 이 영화가 감독이 작정하고 만든 창조와 구원의 서사시로 느껴진다. 놀랍도록 아름다운 장면들로 초월적 세계를 바라보게 한다. 영화를 보며 잠깐씩 느낀 경외감이나 깊은 울림을 언어적으로 표현하자니 느낌이 안 사는데, 그게 영화적 표현의 힘인가 보다. 초반에 한번 마지막에 한번, 길게 이어지는 이미지는 언젠가 꼭 영화관에서 다시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