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는 바리스타만 있는게 아니에요.
“저 커피 회사에서 일하고 있어요.”
“그럼 커피 만들어?”
“음.. 탕비실에서 만들어 먹기는 하는데요..”
커피 회사에 다닌다고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다. 흰 셔츠에 데님 앞치마를 입고, 에스프레소 머신 앞에서 벨크리머(에스프레소 샷을 받는 샷잔)에 원두를 추출하는 모습이다. 카페에서 일한다고 말하면 커피를 제조하는 바리스타를 떠올린다. 그것이 아마 ‘카페에서 일하는 사람’에 대한 고정적인 이미지인 듯하다. 그럼 나는 뭘 하느냐? 벨크리머에 샷을 받기는 하지만… 탕비실에서 내가 먹기 위해 커피를 내릴 뿐이다. 살기 위해 먹는 커피다. 대부분의 시간은 에스프레소 머신이 아닌 모니터 앞에 앉아있다. 모니터 앞에서 숫자와 씨름을 하고, 메뉴명을 가지고 골머리를 앓는다. 나는 커피 회사 본사 마케터이다. 보통 직장인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남을 위한 커피가 아닌 나를 위한 커피만 만든다. 물론 커피회사는 탕비실에 보통 원두가 제공되기에 커피를 정말 많이 먹기는 한다. 아마 대부분 커피 회사 본사에서 일하는 재경팀, 구매팀, 운영팀, 점포 개발팀 직원들은 한 번쯤 바리스타라고 오해를 샀을 것이다. 손끝에 커피 향이 묻어있는 바리스타도 멋지지만, 지금은 커피를 더 많이 팔리게 해주는 카페 마케터라는 직업이 좋다.
“한 대 핀다.”
커피 프랜차이즈에서 일하게 된 계기는 PC방이었다. 저 말은 내 동의를 묻는 질문이 아니었다. 그저 통보였을 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옆의 팀장님과 대리님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새벽 2시경이었다. 내 눈앞에는 넓고 광활한 도로가 펼쳐졌고, 그 도로마저 담배 연기로 가려져서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있었다. 타닥타닥 키보드 소리는 귀를 괴롭혔고, 담배 냄새는 비흡연자에게는 후각 고문이었다. 오감이 피폐해지는 그 순간, 퇴사를 결심했다. 나의 첫 회사는 광고회사였다. 광고 회사에 재직 중에는 야근을 많이 했다. 그날도 새벽 2시 PC방에서 야근을 하고 있었다. 광고주가 게임 광고주였기에, 레이싱 게임을 하기 위해 PC방을 찾은 거였다. 게임, 담배, PC방, 플러스 야근. 야근. 야근. 멋진 광고기획자를 꿈꿨었지만, 단 하나의 단어도 내가 좋아하는 말이 없었다. 단편적인 사건이긴 하지만, 좋아하는 단어가 없는 곳에서 계속 일할 수 없었다.
이전부터 꿈꾸던 광고회사에 입사했지만, 광고는 한 가지 분야의 전문성을 키우기가 어려웠다. 광고대행사 기획자는 넓고 얕게 알아야만 한다. 게임 광고를 준비할 때는 게임, 골프 광고를 준비할 때는 골프를 해야 한다. 요즘은 식음료 전문 광고대행사와 같이 자신이 강점인 업종을 내세우는 대행사들도 있다. 하지만 내가 일하던 곳은 여러 가지를 다 맡은 광고대행사였고, 일을 따내기 위해서, 광고주의 특성에 따라 광고주의 분야를 공부하며 다른 것들을 배워야만 했다. 내 취향과 상관없이 광고주의 분야를 공부해야 했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게임, 골프, 아웃도어 의류 등을 공부하며 야근하는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았다. 점차 한 가지 분야에 대해서 잘 알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광고주의 사정에 따라 예산이나 마케팅 방향성이 계속 달라지는 것도 광고대행사의 한계였다. 더 이상 PC방에서 레이싱 게임을 하며 담배 냄새를 맡고 싶지 않았다. *인하우스 마케터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어떤 분야로 가야 할까?
*인하우스 마케터: 특정 조직 내에서 해당 브랜드 마케팅 업무를 하는 마케터, 대행사 마케터와 다른 개념이다.
유독 더웠던 백수인 기간 집에서 혼자 에어컨을 틀고 누워있을수는 없었다. 그래서 매일 카페로 출근했다. 유독 더웠던 여름이었다. 시원한 카페에 가서 아메리카노를 시켜두고 노트북을 펴고 이직준비를 했다. 가끔은 글을 썼고 유튜브도 봤다. 카페는 매일 가다 보니 친숙했다.
업종을 정하기 위해 우선 각종 관심 없는 분야를 제했다. 화장이나 꾸밈에 관심이 없어 뷰티 쪽을 제외했다. 자동차, 게임등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막상 좋아하는 것을 생각해 보니 매일 카페로 출근하고 있었다. 카페는 손님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졌다. 공부를 하는 사람들, 떠드는 친구들, 다정한 연인들. 내 앞에 주어진 테이블은 나만의 공간이지만, 카페는 모두의 공간이었다. 잠깐 시간을 빌리는 동안은 내 것이기도 하면서 남과도 공유하는 기묘하면서도 독특한 곳이다. 백수에게만큼은 눈치가 보이는 집구석보다는 카페 한 켠이 마음이 편한 공간이기도 했다. 내 집처럼 편하면서도 내 것이 아닌 공간. 나는 그곳에서 낯선 손님들과 같은 분위기를 공유하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침, 집 근처에서 많이 보이던 커피 프랜차이즈에서 신입 마케터를 뽑는다는 공고를 보았다. 손에 쥔 아메리카노 한 잔을 쭉 들이켜고 이력서를 써서 냈다.
뒤돌아 떠올려 보니 엄청나게 대단한 계기가 있던 것은 아니다. 다만 PC방보다는 카페를 좋아했다. 레이싱 게임보다는, 아메리카노를 팔아보고 싶었다. 광고 회사는 끝없이 변화하며 다양한 일을 해볼 수 있는 가치가 있었지만, 커피를 한 번 알아보고 팔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커피는 그래도 고등학교 시절 약간의 죄책감을 가지고 몰래 홀짝대던 것부터 생각하면 그래도 어언 마신 지 몇 년 차였다. 커피깨나 먹어봤다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로 그냥 카페와 커피가 좀 더 취향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커피 회사에 이력서를 넣었다. 그리고 커피 회사 마케터라고 하면 좀 있어 보일 것 같았다. 광고대행사 AE라고 해도 있어 보이기는 하는데, 그만큼 또 있어 보이는 직업을 하면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프랜차이즈 커피 회사에 이력서를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