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삼인분공부 Dec 27. 2020

십대, 지금 이 순간도 삶이다

80년대에서 90년대 중반까지는 누구나 피부로 느낄 만큼 호황기였다. 저임금 직종에서도 임금이 빠르게 오르고 서민 가정에서도 치맥을 일상적으로 즐기게 되었다. 그러나 이혼율이 급증하고 상대적 빈곤이 본격적으로 대두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는 등록금을 내지 못하는 애들이 여럿 있었는데, 학교 선생님들이 돈을 모아 대신 내주기도 했지만 몇몇은 결국 학교를 중퇴하고 가출해 버렸다. 그 아이들이 등록금을 못 낼 정도로 가난했던 주된 이유는 가정이 해체되었거나 부모가 부양을 하지 않아서였다.

      

지금은 우리나라가 기본적인 복지제도를 갖추고 있으므로 등록금이 없어서 중학교를 중퇴하는 아이들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가 가출하거나 자녀를 부양하지 않거나 자녀를 양육하기에 부적절한 경우 아이가 잘 자라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화목한 가정에서 따뜻한 밥 한 끼 함께 먹는 게 소원인 가출 청소년들이 많을 것이다. 이런 청소년들의 고통은 너무나 근본적인 것이라서 그들의 삶에 개입하고 도와주는 것조차 매우 조심스럽다.

      

<십대, 지금 이 순간도 삶이다>는 이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우리나라에서 청소년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은 20여 년간 중고등학생을 가르쳐온 선생님이 집필했는데, 보호관찰 대상 청소년들에 대한 멘토 활동 등으로 학교 밖 청소년들과도 깊은 관계를 맺어온 독창적인 경험을 기반으로 한다. 회사에서 높은 판매를 기대하는 책은 아니었는데(당시 재직하던 출판사는 워낙 대형 베스트셀러가 자주 나오던 곳이었다), “책으로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교사들” 추천도서로 선정되었고, 여러 도서관 사서들의 추천도서로 선정하면서 오래오래 사랑받는 책이 되었다. 출간하면서 바로 베스트셀러가 되거나 화제가 된 책들도 십 년이 지나면 절판되는 책들이 많다. 반면 이 책은 출간 초기에는 특별한 반응이 없었지만, 내가 해당 출판사에 재직하는 기간 동안 수만 부 이상 판매되었고, 출간한 지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꾸준히 판매되고 있는 것 같다.

      

청소년 문제는 모든 사회문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빈곤 문제, 가정폭력, 과도한 경쟁 체제…. 십대들은 어른들 이상으로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있기도 하고, 민감한 시기인 만큼 사소해 보이는 문제들에 대해 끙끙대며 괴로워하기도 한다.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다가 처음 2등을 한 후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고 자살을 기도한 아이, 장애아 짝을 귀찮아 하다 후회의 눈물을 흘리는 아이, 재혼한 어머니에게 격려의 편지를 보내는 아이, 어머니의 도움 없이 숙제를 해본 적이 없는 고등학생, 친구를 폭행하여 보호관찰 처분을 받게 된 아이, 부모 몰래 여자친구를 만나기 위해 학원에 다니는 아이…. 

    

십대의 고민은 가장 내밀하고 민감한 가정 문제나 친구 관계에 대한 것이어서 제3자가 섣불리 관여하기 어렵다. 이 책의 장점은 도덕 교과서 같은 조언이나 충고를 남발하지 않고 친구처럼 그들 편이 되어주며 조금씩 새로운 시야를 갖도록 이끈다는 점이다. 가령 폭력에 물든 나머지 자기 누나를 패는 남학생이 있었다. 어느 날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으려 애쓰다가 방문을 주먹으로 쳐서 구멍을 냈다. 나 같으면 사람 같지 않은 애라고 생각해서 말을 섞고 싶지 않을 텐데, 저자는 누나를 패는 대신 방문을 쳤으니 일보 진전한 것이라고 칭찬하며 분노가 치밀 때마다 구멍 난 방문을 보며 마음을 다독이라고 일러준다. 난폭한 행동이 습관이 되어 버린 아이에게 이런 식으로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일깨우는 모습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 자신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다. 

     

이 책은 저자의 출간 문의를 통해 계약하게 된 경우다. 당시 재직하던 출판사에서는 일반 투고 원고와 에이전시에서 보내는 외서 소개를 각각 게시판에 올려 수십 명의 편집자들 중 관심 있는 사람이 신청하도록 했다. 원래 청소년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자연스럽게 이 원고에 주목하고 살펴보게 되었다. 처음부터 절절한 체험에서 우러나온 내용이 마음을 움직였다.

      

십대는 삶의 모순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가늠하는 시기다. 그 시기를 무사히 살아냈다면 그것만으로도 절반은 성공한 인생이다. 십대에게 가장 아쉬운 것이 사회적 자본이다. 좁은 세계의 한계에 갇혀 출구를 찾지 못하는 십대가 다른 십대들을 보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거나, 그 시기를 통과한 어른들이 십대의 눈높이에서 생각하게 해주는 데 책만큼 좋은 매체는 없다. 책이 부족한 사회적 자본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인식의 지평을 넓혀 나중에 더 넓은 세계로 날아오를 수 있도록 현실을 감당할 용기와 미래를 준비할 희망을 심어줄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부활하는 네오콘의 대부, 레오 스트라우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