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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인분공부 Apr 05. 2021

문제는 무기력이다

학습된 무기력에서 행복과 성취로

최신 트렌드를 섭렵해서 대중의 기호에 잘 맞는 쌈박한 컨셉을 잘 내놓는 것이 좋은 기획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대체로 좋은 기획은 기획자의 내면에서 나온다. 유행하는 문화 현상은 많고 그중 일부만 책으로 만들 수 있으며 어떤 유행은 그냥 흘러가 버려 곧 뒤떨어진 취향으로 여겨진다. 


내가 강하게 끌리는 주제, 내가 감동받는 콘텐츠라야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유행과 튀는 콘셉트에만 집착하면 짝퉁 기획을 발빠르게 내놓을 수는 있지만 독창적인 콘셉트와 콘텐츠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나는 새로운 브랜드를 론칭한 후 해외 최고 석학의 책을 계약해서 출간했었다. 그 와중에 여러 국내 작가들을 접촉하며 계약을 하려 노력했지만,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신생 브랜드에서 책을 내자는 섭외에 응답이 아예 없거나 너무 바빠서, 또는 이미 다른 출판사들과 여러 책들이 계약되어 있어 어렵다는 답변이 이어졌다.

 

당시 자기계발 분야 베스트셀러 작가인 구본형 선생님은 변화경영연구소를 운영하며 인생 후반전을 새롭게 모색하는 직장인들이 작가로 데뷔하도록 지원했다. 변화경영연구소에서는 신인 작가들의 원고를 소개하는 북페어를 개최하여 출판사들을 초청했는데, 나도 그 자리에 여러 번 참석해서 가능성 있는 원고를 물색했다.

 

처음 참석한 북페어에서 나는 한 인지심리학자의 원고에 주목하게 되었다. 저자는 심각한 무기력에 빠져 살았는데, 인지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스스로 찾아낸 처방을 중심으로 원고를 썼다. 저자의 출발점은 마틴 셀리그만의 '학습된 무기력' 개념이었다.

 

나는 대학 시절 '학습된 무기력'을 소개한 셀리그만의 저서 <무기력의 심리>를 읽고 큰 영향을 받았다. 부당한 억압과 고통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자신을 옥죄던 사슬이 풀리고 나서도 '학습된 무기력'의 결과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현실을 왜곡하고 스스로를 비하하게 된다.

 

이 이론은 사람들이 성인이 되고 나서도 왜 어린 시절의 상처에 머물러 있는가를 설명하면서, 동시에 인종문제, 빈곤문제에도 커다란 시사점을 준다. 많은 대학들이 유색인종을 우대하고 장학금을 주지만 유색인종의 대학진학률은 낮다. 빈곤가정에 아무리 경제적 지원을 해주어도 빈곤의 악순환에서 헤어나기 어렵다. '학습된 무기력' 이론은 경제적 지원이 사회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려주어 사회복지 분야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북페어에서 소개한 원고는 학술 데이터와 개인적인 경험, 생각 등이 한데 뒤섞여 책으로 출간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나는 그 원고는 그냥 자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즉각 계약을 추진했다. 어떤 책으로 나올지 잘 모르는 경우 충분히 구체화될 때까지 계약을 미루고 저자와 계속 논의를 주고받지만, 이 책의 경우는 주제의 중대성, 독창성, 내용의 탄탄한 학술적 기반 등을 감안할 때 계약을 미룰 이유가 없었다.


부정적 감정에 집중하던 마틴 셀리그만은 후기로 갈수록 긍정적 감정에 집중하여 긍정심리학을 창시했다. 자기계발서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많은 자기계발서의 이론적 근간이 된 긍정심리학도 비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의 변화가 '학습된 무기력'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집요하게 탐구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비판에 신중해야 할 것 같다. 긍정심리학은 <시크릿>처럼 '내가 원하면 우주가 도와준다'는 식이 아니라 탄탄한 심리학 연구의 결실이다. 셀리그만은 긍정심리학 이론을 집대성한 <플로리시>에서 충만한 삶의 핵심 요소로 긍정정서, 몰입, 관계, 의미, 성취를 제시한다. 긍정심리학은 자기계발은 물론 교육, 사회복지, 보건 분야에서 실질적인 효과를 보여준다.

 

<문제는 무기력이다>는 이런 긍정심리학의 주요 내용, 심리치료의 대세인 인지행동치료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 편집 담당자도 장시간 공을 들였고, 원고 정리를 도와주는 별도의 작가도 고용해서 원고 작업에만 상당 기간이 걸렸다. 이런 걸 공개하는 것은 이건 대필과 차원이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학술 논문만 읽고 쓰던 작가가 갑자기 대중적인 원고를 집필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콘텐츠는 전적으로 저자에게서 나오지만, 효과적인 진술 방식이나 알기 쉬운 문장이라는 언어적 차원에서 전문가가 개입하는 것이다. 독창적인 콘텐츠를 지닌 사람들이 모두 대중적인 글을 쓸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이런 협업을 통해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수많은 지적 자산들과 경험들을 공유할 수 있다.

 

이 책은 데뷔작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모든 작가와 출판사들이 꿈꾸는 그런 책이 되었다. 전자책 인세만 해도 대부분의 종이책들보다 훨씬 더 많이 발생해서 흐뭇했던 기억이 난다.

 

좋은 책이 저자 내면의 강한 동기에서 출발하듯, 좋은 기획도 마찬가지다. 내 마음을 움직이는 주제, 내가 그 가치를 가장 잘 아는 주제를 선택해야 결과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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