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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나은 Sep 09. 2020

직업에 귀천이 있을까

Every occupation deserves respect.


새해가 밝았고, 크리스마스가 낀 2주간의 긴 연휴도 끝이 나서 시드니에는 다시 일상이 찾아왔고 나는 본격적으로 분주해 졌었다. 나와 같은 시기에 같은 에이전시를 통해서 온 모두가 이제는 슬슬 일을 찾아 떠나고 싶어하고 있었다. 거의 매일같이 에이전시 사무실에 들러 새로운 소식이 없는지 묻기를 반복하는 나날들이 이어지다 드디어 잡오퍼가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같이 사무실에 모여 앉았다.

설명을 해 주시던 직원분은 요즘 같은 경기에 일자리가 정말 안 나온다는 걸 먼저 강조하시고 나서 잡오퍼가 난 곳에 대한 안내를 해 주셨고 그곳이 바로 내가 이후 4개월 가량 일하게 되었던 헤이먼 리조트(Hayman Island Resort) 였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산호초들이 펼쳐져 있는 Great Barrier Reef 에 있는 섬들 중 하나인 헤이먼 아일랜드에 있는 호주 내 리조트 중에서는 전체 1,2위를 다투는 최고의 럭셔리 리조트라고 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그런 그림 같은 섬에서 생활해 보겠느냐는 말씀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내가 언제.. 애초에 그런 마음으로 호주에 오질 않았던가, '경험'과 '성장'을 위해서.


리조트에 대한 소개를 쭉 받고나자 가장 중요한 것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포지션이 뭔가요?


우리의 물음에 당당한 기세로 설명해 주시던 직원분은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대답하셨다.


하우스키핑(Housekeeping) 이야.



막상 포지션을 듣고나니 고민이 되었다. 지원을 할까 말까. 한국에서 가져온 생활비는 점점 바닥을 치고 있었고, 어디든 일을 찾아 이동을 하려면 또다시 비행기값 등 이동경비가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던지라 내가 처한 지금의 경제적인 상황만 보면 나의 지원을 할지 말지에 대한 고민 자체가 사치였다.

고민을 할 여지가 없었다. 다음 잡오퍼가 언제 나오게 될지도 기약이 없는 상황. 당연히 지원을 해서 서둘러 일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무엇이 나를 그토록 고민하게 했던걸까.


결국, 나는 그 포지션 때문에 고민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우스키핑이라니.

나는 하우스키핑을 하러 이 먼 땅까지 온 것이 아닌데, 하는 생각들.


호주에 오기 직전까지 일하던 장충동의 S호텔 휴게실에서 마주친 하우스키핑 직원분들은 거의 모두가 품이 넉넉한 아주머니들이셨다.휴게실 한켠에 삼삼오오 모이셔서 과자 두어개와 음료수를 나눠 드시면서 소파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쉬고 계시던 모습들. 입고 계시던 유니폼에 앞치마 같은 것이 붙어 있었다. 내가 '하우스키핑' 이란 포지션을 듣고 떠올린 이미지는 그런 것이었다. 왠지 내가 하우스키핑을 하기엔 너무 안 어울리지 않나 라는, 부끄러워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해야만 하는 내 안에 자리하고 있던 직업에 대한 묘한 계급의식이 드러나 버린 순간이었다. 마음에,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어쩌면 어려서, 내가 믿는 세상 속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에- 작은 편견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을 갑자기 불어닥친 바람처럼 확실히 깨달았고 티를 내진 않았지만 속으로 아주, 부끄러웠다.






그렇게 나는 완전한 확신은 없지만 현실의 무게를 체감하며 조금은 오묘한 마음으로 지원했고, 전화 인터뷰에 합격을 하게되어 그 곳으로 떠나게 되었다. 떠나는 순간까지 걱정을 떠안고서.


하우스키핑을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호텔 레스토랑 같은 데서 폼나는 서버 같은 걸 더 하고 싶었는데.

어차피 똑같이 일이 힘들거라면 서버가 더 그럴싸 할텐데.

가서 3개월 일하고 나면 포지션 이동이 가능하다고 했으니까 나는 그럼 가서 그렇게 해볼까.


일을 시작하지도 않았으면서 이미 그 일에서 벗어날 궁리부터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궁리는 그저 하우스키핑 이라는 포지션이 탐탁지 않아서 시작된 것이었다. "청소일"에 대해, 그전까지 얼만큼의 가치를 두고 생각해 왔는지, 내가 몰랐던 나의 '속된 편견'을 깨닫게 된 것이 참으로 신선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지금 이 시절을 돌이켜 봤을 때, 이 때 이 일을 하게 되어서 나는 참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어른이 되는데에 반드시 필요한 시간이었지 않을까.






헤이먼 리조트는 정말 아름다웠다.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아름다운 빛을 띈 바다를 본 적이 없다. 그 때 이후로 지금까지.

숨이 멎을 것 같은 아름다움 이란 말을 호주에 가서 온 몸으로 느낀 게 두 번 있었는데, 한 번은 시드니 보타닉 가든 입구를 들어서던 순간이었고, 다른 한 번이 헤이먼 리조트로 가는 페리를 타기 위해 자그마한 공항에서 내려서 페리로 걸어가며 바다를 마주했던 순간이다. 불투명하면서도 투명한 색. 에메랄드빛 바다. 초록빛을 띈 하늘색 바다.


내가 이제부터 그 풍경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포지션에 대한 고민이고 뭐고 생각할 틈없이 그 바다를 눈에 성급하게 담고 있었다. 그것은 아름다움에 강하게 이끌리는 본능 같은 것이었고, 나의 이성과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던 찰나지만 느린 그런 순간들이었다.






페리로 한시간 여를 달려 섬에 도착했다. 도착하고 이틀간 오리엔테이션을 받았다. 오리엔테이션은 무척 재미있었다. 세계 여기저기에서 온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과 함께한 오리엔테이션이라서 더욱 분위기가 발랄하고 명랑했다. 같은 하우스키핑 포지션으로 온 친구들 모두가 다 나보다 어리거나 같은 나이라서 나는 속으로 무척 놀라고 있었다. 그들은 심지어, 일은 앞으로의 생활 중 한 부분일 뿐이라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워라벨을 이 때부터 그들은 알았겠지. 그들은 모두 이 섬에 들어와 생활하는 동안 하게될 특별한 경험들, 이를테면 산호초섬을 구경한다든가, 하이킹을 한다든가, 낚시, 수영, 스쿠버다이빙, 스노쿨링 등등의 다양한 액티비티들을 하게된다든가 하는 것들에 대한 생각들로 무척 신이 나 있었다.


섬에 도착하기 전까지 오로지 '일'에 대한 걱정뿐이었던 나에게는 심하게 밝기만한 그들의 모습이 신기하면서 아주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문화충격 이라는 카테고리 안에만 넣어두기엔 무척 아쉬운 무언가가, 내 마음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느낌에 대한 정의를 분명히 할 수는 없었으나 나는 알 수 있었다, 내 안의 나가 또한번 깨어지고 있다는 걸.









Hayman Staff Village D13


나의 방 번호. 사실은 처음 들어서는 순간 눈물이 나올 뻔했었다. 침대커버랑 베개 등을 챙겨왔어야 하는 거였다는데 나는 전혀 몰랐던 것. 아무것도 준비하지를 못했었다. 


조그마한 거미줄이 살짝씩 구석구석에 보이는 방 안 양 옆에 침대가 두 개 놓여 있었고, 작은 베란다가 달려 있었다. 샤워실은 옆 방과 연결되는 통로 중간에 위치해 있어서 옆 방 친구들과 공유를 하는 특이한 구조였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썩 나쁘지 않은 컨디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 나는 그 방 안의 휑함과 거미줄 등등에, 커버 하나 씌여져 있지 않은 누우런 매트릭스에, 급작스런 서러움 같은게 몰려왔던 것 같다. 함께 들어선 룸메이트 언니에게 내색하진 않았었지만 나는 그 때 이미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첫날밤, 그 누우런 매트릭스 위에 비치타올 하나를 깔고 덮을 이불도 없이 웅크리고 누워서 조금많이, 서러웠다. 엄마가 보고싶었다고 해야할까.


그로부터 일주일쯤 후, 친해질만하니까 섬을 떠나게 되었던 의미있는 친구로부터 침대커버와 커피포트 등을 기증받을 수 있었고 덕분에 나는 마침내 침대스러운 곳에서 잠을 청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이지 고맙고 또 고마웠다. 덕분에 처음 그 방 안에 들어서던 순간에 느꼈던 칼날같던 외로움을 충분히 위로받을 수 있었다, 그 곳에 있던 내내.






쉬는 날에는 주로 오랜만에 늘어지게 자야 하..는데 눈이 떠지므로 해변가를 걷거나 우리들이 즐길 수 있는 액티비티 등을 하며 보냈다. 처음에는 함께 간 한국인 언니들과 주로 어울렸었고, 점점 또래 외국인 친구들과 친해지게 되면서 어울리는 친구들이 늘었다.


섬 안에는 한국인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한국인이 열명 살짝 넘었는데, 전체 몇백명의 스태프 숫자에 비하면 그 비율이 참으로 낮았고, 그마저도 중간중간 빠르게 하나씩 둘씩 섬을 떠나갔었다. 하긴, 호주에 오고나선 매번 그런 식이었다. 친해질만 하면 떠났다. 떠나갔고 떠나왔다. 나 또한 떠나왔고 또 떠나갈 것이고. 다들 각자의 인생에 맞는 시간들을 채워가느라 바빴다. 우리들은 모두가 여행자였으니까.







첫 일주일을 일하고 드디어 쉬던 날.

해변에 앉아 내 다리를 내려다 보다가 이상하게 가렵진 않은데 모기에 물린 자국들이 군데군데 있어서 자세히 보니 그것들 모두가 멍이었다. 일을 하며 어딘가에 부딪히고 까이며 생긴 멍들. 하나하나 세어보니 온 몸에 일주일만에 서른 개에 가까운 멍이 들어 있었다. 그러고보니 고새 괜히 팔근육이 단단해진 것 같았고, 종아리에 알이 생길 것만 같은 느낌마저 들어왔다. 살도 좀 빠진 것 같고.


'고생'하고 있다고, 해도 되려나..?







일을 가르쳐 주던 수퍼바이저와 매니저들 중에는 할머니나 푸근한 아주머니 느낌의 분들도 계셨지만 그래봤자 나보다 두어살 더 많아 보이는 젊은 여자분들도 꽤 있었다. 나이와는 상관없이, 그들은 본인의 임무에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가르쳐 주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고 나는 반성했다. 왜 나는 하우스키핑은 아주머니 들이 많이 하시는 일이라 생각해 왔던 걸까. 물론, 앞서 말했듯이 내가 한국에서 일하던 호텔에서 본 직원분들이 그런 모습이었기는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풍경에 익숙해져 있었다고 해서 내가, 나의 경험이나 본 것만을 가지고 아예 그렇게 생각을 정의해버릴 필요는 없었던 거다. 편견이란 사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시작된다는 것. 그렇게 깨닫고 반성하고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나는 그들에게 그저 몸집이 작고 젋은 외국인노동자가 아닌가. 딱히 환영받지 않고 그렇다고 배척당하지도 않지만 그들과는 다른 이방인.


내가 외국에 나오고 이방인이 되어보고 나서야 깨닫게 된 것들이 너무 많고 많았다. 반성해야 할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내 온 몸에 든 시퍼런 크고작은 멍들은 그동안 내가 알게모르게 가지고 있던 어린 편견들에 대한 나무람처럼 느껴졌다. 처음으로 맞이한 휴일날의 그 해변에서 모래위에 앉아 손바닥으로 모래를 쓸며 멍자국이 가득한 내 다리 위로 그 모래알들을 흘려보내면서 차근차근 그동안의 어린 편견에서 해방되어가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발견이 나는 무척 기뻤다.








Every occupation deserves respect.



우리는 다만 각자가 원하는 다른 모습의 직업에 있을 뿐이라고.

각자가 원하는 위치에서 각자가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있으면 그게 곧 정답이 아니겠느냐고.

직업에는귀천이없다 고.




그렇게 또다시 다가올 내일에 나는 또다시 열심히 방청소를 해보아야 겠다고 다짐하면서.

일이 익숙해져 갈수록 몸에 드는 멍의 갯수들도 줄어가겠지 생각해보면서.







그렇게 조금씩 더

나는 단단해져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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