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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나은 Sep 13. 2020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젊어서 하는 고생이 덜 수고스러운 것은 아니다




아침 여덟시까지 사무실로 출근을 한다. 시급제라 여덟시가 딱 되기 전에는 반드시 펀치를 찍어야 하는데, 내 기억이 확실하다면 15분 단위로 시급을 계산해서 줬고,  일이분 혹은 단 몇 초를 늦어서 아까운 15분을 날릴 수는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뿐만 아니라 같이 일하던 모두가 일하는 데에 늦는 일은 거의 없었다.

사무실에 도착하면 에이포 용지 한장에 각자에게 그 날의 할당량이 프린트된 종이들이 책상 위에 올려져 있고, 각 프린트 마다 그 날 일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펜으로 적혀 있었다. 들어서는 순간부터 제 이름이 적혀있는 용지를 찾아서 오늘의 자기 업무를 확인하고 간단한 전체미팅을 가진 후에 해산, 각종 수건들과 룸에 들어가는 여러 용품들, 세제, 청소기 등등을 한가득 챙겨서 차곡차곡 쌓아 무거운 손수레 같은 것을 있는 힘을 다해 더디게 밀면서 본인이 맡은 방들의 효율적인 동선을 머릿속으로 짜보며  첫번째 방을 들어가는 것을 시작으로 그렇게 본격적인 하루가 가동된다. 중간 중간 수퍼바이저가 내가 지나온 방들을 점검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지나온 방으로 다시 돌아가 청소를 하라며 쫓아와 닥달을 하거나 지금 청소하고 있는 이 방 말고 다른 방을 먼저 해달라고 갑작스럽게 재촉을 하거나 등등의 여러 예상치 못한 일들로 그렇게 쫓기듯 땀을 한바가지 흘려가면서 부지런히 움직이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해가 저물어 가기가 일수였다. 또다시 무거운 손수레를 더디게 더디게 우리들의 창고에 가져다 놓고 최종점검을 받아 통과를 해야만 드디어 얻는 자유, 터벅터벅 내 방을 향해 걸어가 샤워를 하고 그 날 같이 고생한 동료들과 다이너에서 만나 식사를 하며 잠깐의 푸념을 늘어놓고는 다시 방으로 돌아와 내일을 위해 서둘러 잠을 청한다.



이것이 나의 헤이먼에서의 '일과'였다.






헤이먼에는 3-Strike-Out 제도가 있었는데, 말하자면 삼세판, 세번 이상의 경고를 받으면 자동 해고 조치를 받는 것. 세 번 경고가 누적되면 그 다음 날 아침 여섯시에 배를 타고 바로 섬을 떠나야 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제도였다. 이 제도로 인해 참 많은 동료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면서도 빼도박도 못하고 섬을 떠나갔고, 나와 같은 날 섬에 와서 옆방을 썼던 동갑내기 아카리도 그런 사람들 중 한사람 이었다. 함께 온지 이 주만이었던가..경고 세 번을 받고 급격하게 떠나야 했었던 그녀. 아카리 말고도 참 많은 경우에 그런 식으로 섬을 떠나가고는 했었는데 그 '경고'라는 것이 사실은 참말로 모호할 때가 많았다. 어떤 때에는 주의를 주는 정도로 끝낼 일을 경고로 받기도 했고 그 때문에 하루에 세 번의 경고를 모조리 받고 바로 그 다음날 갑작스럽게 떠나야만 했던 동료도 있다. 정말 황당하고 어이 없는 경고들. 일부러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서 몇몇 사람들을 타겟으로 삼고 그 친구를 노려 쫓아냈다는 의심을 떨쳐낼 수 없을 정도로 정말 어이없고 석연치 않는 이유들로 받은 경고들이었다. 우리들은 모두가 여행자였지만 또 나름의 계획과 목표를 가지고 이 곳으로 온 것이었는데, 그렇게 말그대로 잘려나가게 되면 당장 황망하고 막막해질 수 밖에 없었다. 힘없는 자들의 외침. 수없이 외쳐봤자,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불평등 속에서 우리는 그렇게 가슴을 졸여야 했다. 억울하면 강해지라....지만, 억울함을 매끄럽게 호소하기에는 버벅이기부터하는 우리들. 그 아름다운 곳에서도 이방인은 한없이 약자일 수 밖에 없었다.







방청소를 할 때는 보통 투숙객이 아예 떠난 Vacant 룸과 투숙객이 머물고 있는 Occupied 룸이 적절히 섞인 스케줄을 받는데, 전자는 말그대로 방을 싹 다 치워야 해서 할 일이 무척 많고 후자는 침대와 화장실 정리 정도만 하면 되는 경우가 많아서 좀 수월할 때가 많았다. 장단점이 있긴 하고 경우에 따라서 달라지기도 하지만. 전자를 청소할 때 나는 방 티비로 음악을 틀어놓고 일을 하곤 했다. 아님 노래를 흥얼거리나. 그렇게라도 해야 그나마 아무런 생각을 하지않고 오로지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끝도없이 우울해 지거나 마음이 복잡해 지곤 했기 때문에 일하는 시간만큼은 생각할 시간도 아끼고 싶었다. 사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몇 배 이상으로 힘들었다. 그렇게 몸을 써가며 일을 해 본 적이 그 전까지는 없었던 거다. 집에서 가끔 내 방을 대청소를 한다거나 할 때의 그 "청소"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늘 누군가의 감시 속에 움직이고 이 청소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고 욕을 먹어야 했다. 면봉이 여섯개여야 하는데 왜 일곱개를 넣었니, 물방울 여기 아래에 튀어 있는거 안보이니, 수건 상표가 여기 찔끔 보이지 않니, 베개에 주름 잡힌거 안보이니 등등. 특히, 까탈스럽기로 소문난 수퍼바이저 그녀가 내 키가 닿지 않는 곳을 굳이 의자를 대고 올라가서 면봉으로 그 끝 코너까지 깊숙히 밀어 넣어가보면서 솜에 묻어나온 먼지를 내 코 위로 들이밀며 회심의 미소 같은걸 날리던 순간에는..  정말이지, 성장이고 경험이고 나발이고 그냥 그 자리에서 내팽개치고 당장 짐을 싸서 나가고 싶어지곤 했었다. 그런걸로 내 자존심을 뭉개버려야 속이 시원하니? 욕 많이 먹어 오래살긴 하겠다, 이러면서 속으로 궁시렁궁시렁. 많이 유치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분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었다. 







Turn Down Service 라고, 밤에 방들을 돌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는 청소를 하는 것은 아니고, 침대 양옆 모서리를 삼각형 모양으로 접어주고 초콜릿을 두어개 램프 아래에 굿나잇 메시지와 함께 놓아준다. 열려있거나 한 창문은 닫고 바는 내려준다. 룸 불들도 다 끄고 램프만 살짝 켜서 아늑한 분위기를 내 주는 그런. 이건 마치 당번 같은 것이라 보통 일주일에 한두번 하게 되는 것이었고, 그런 경우엔 오버 타임 수당을 받았다. 낮에 하는 일에 비하면 훨씬 쉬웠지만, 야밤에 별들이 가득하고 산새와 벌레들이 울어대는 풍경 안에서 리조트 내의 어두운 복도를 돌아다니는 건 로맨틱과는 거리가 있고 꽤 으스스했기 때문에 그다지 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다. 귀신 나올것 같은 분위기라며 침을 꼴깍 삼키곤 했고, 낮에 다른 동료에게서 들은, 몇 층 스위트룸 어디에서 유명 작가가 몇 달전에 자살을 했었다는 둥의 스토리들이 느닷없이 머릿속에 떠오르기라도 하면  방 문을 여는 그 때 그 때마다 혹시나 내가 그런 풍경이라도 마주하게 될까봐 등골이 오싹해 지기도 했다. 겁이 많은 나는 문을 열 때마다 몰래 훔쳐보듯 방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곤 했었다.







일을 하면서 여러가지 에피소드들도 생겼다. 

한번은 청소를 하러 들어갔는데, 그 방에 묵고 계신 분이 한국인 노부부셨다. 한국어로 이야기를 나누시는 모습에 나도 반갑게 인사를 건넸고 그 분들은 딸 같은 아이가 먼 데까지 와서 일한다며 안타까워 하셨다. 결국 청소는 무슨, 쉬다 가라시며 나의 이야기들을 들어주셨고 나중에는 용돈 주듯 넉넉하게 팁도 챙겨 주셔서 방을 나서는데 뭉클해 졌었더랬다. 그 날 받은 팁으로 한국인 동료들이랑 같이 매점에서 맛있는 과자들도 사다가 과자파티도 열고.


또 한번은 큰 패밀리룸을 나홀로 청소하며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수퍼바이저 하나가 성큼 들어서길래 너무 당황해서 황급히 입을 다물고 더욱 열심히 물질을 하고 있는데 그녀가 대뜸 방금 티비를 틀었다 끈거냐고 물었다. 내가 아니라고 하자, 그녀가 자긴 분명히 노랫소리를 들었다고 하길래,


응, 사실은 내가 부르고 있었어. 라고 했더니 깜짝 놀라던 그녀. 


케이트, 너 정말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구나. Never give up!


그 말이 참 기분이 좋았었다. 그 때의 나는 노래 부르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싶을만큼 진지하기도 했었기 때문에 그녀의 그 말은 내게 감동으로 다가왔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그녀가 나를 더 잘 대해주기 시작했고. 지금 생각해도 웃음 쿡 나오는 기억이다. 사실은 그 때 노래 부르면서 일한다고 혼이 날 줄 알았었는데.







황당한 일을 겪은 적도 있다.

투숙객이 머물고 있는 방을 정리하러 들어갔다가 욕실 안 수건을 좀 바꿔 달라길래 아무 생각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몸집이 큰 중년의 백인 남자가 버블버블한 욕조 안에 들어가 목욕을 하고 있었다.너무나 당황스러워서 미안하다고 인사하고 나가려니까, 괜찮다고 일을 보라면서 원한다면 여기 들어와 목욕하고 가라고 농담을 하는데, 사실 굉장히 기분이 좋지 않았었다.


그런저런, 일을 하며 참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다.





시급은 호주달러로 15불이 조금 안됬었다. 벌이가 나쁘지 않았다. 한국의 평균시급과 비교하면 꽤 대우가 좋은 편이었다. 2주에 한번씩 페이첵을 받았는데, 섬에 머물고 있는데다 모든 식사나 숙소가 제공이 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가끔 직원할인된 가격으로 액티비티를 한다거나 배로 한시간 거리인 가까운 비치에 나갈 때 말고는 돈을 쓸 일도 없으니 돈은 버는대로 거의 고대로 통장에 쌓여갔다. 한달에 이백만원쯤씩 차곡차곡 모였는데, 그 당시 세상물정 모르는 대학생이었던 내가, 가장 처음으로 가장 많이 벌어본 돈이었다. 수중에 돈이 좀 모이기 시작하니 마음에 여유가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앞서 말했듯이 언제 어느 때에 내가 타겟이 되어 하루에 세번 경고를 모조리 받고 잘려 나가게 될지 모르는 것이기 않나. 적어도 이제 내 주머니에 돈이 좀 있으니까, 예기치 못하게 잘려 급하게 여길 나가게 되더라도 어디 가서든 자리잡고 시작할 정도는 되니까. 현실적인 부분이 해결이 되자 안심이 되기 시작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다. 나도 동의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젊어서 하는 고생이 젊기 때문에 고생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에게는 충분히 고생스러운 경험이었고, 마음이 바닥을 치는 경우도 차고 넘쳤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아주 가치있고 의미있는 경험으로 남았다. 그런 기회가 내게 왔던 것에 대해서 감사하다.







일은 분명히 힘들었다.

그 곳에서의 나의 '일과'는 누군가에게 추천하고 싶을만큼 그렇게 매력적이지만은 않았다. 그렇지만, 그래도 반짝반짝 빛나는 분명한 순간들이 그 안에서도 있었고, 나는 아직도 그 추억들을 떠올리며 웃는다.


낭만, 그리고 청춘.

우리들은 젊었고 우리들의 순간은 빛이 났다.

그리고 지금의 나도 또한 



훗날 떠올리면 젊었고 빛이 났던 그런 순간들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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