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낭만이었다
일이 힘들고 고되었던 것에 비해서 그 외 시간들은 사실은 꿀맛 같았다. 그동안 열심히 해 본 적 없는 운동을 일을 하면서 비로소 하게 되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고 덕분에 몸이 탄탄해 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해야할까. 온몸에 수십개씩 들었던 처음의 멍들이 희미해져 가고 새롭게 생겨나는 멍의 갯수도 점차 줄어가면서, 그제서야 슬슬 이 섬과 이 섬에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의 광경이 내 눈에, 내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적응이라는 것이 이토록 무섭다.
처음 섬에 함께 들어와서 룸메이트로 지내던 언니가 사고로 팔을 다치게 되어 섬에 들어온지 한달여만에 섬을 급하게 떠나게 되는 바람에 나는 한동안 혼자 지내게 되었다. 룸메이트와의 생활에 불편함을 느끼거나 하는 사람들은 나의 이 독박 룸생활을 부러워 하기도 했지만 정작 나는 그 상황이 그렇게 좋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미 휑하고 어스름한 공간이었다. 언니마저 떠나가고 나니 또다시 매트릭스만 덩그렇게 남겨져 있는 내 침대 옆의 그 침대 모습이 참으로 낯설고 외롭게 다가왔었다. 불을 다 끄고 누워 있노라면 그 방 안에 침대는 둘인데 사람은 나뿐이라는 고요함이 너무 무겁게 다가왔고,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꼭 티비를 틀어놓고 잠이 들게 되었었다. 그 때 매일밤 틀어놓고 자던 게 애니메이션 '스펀지밥' 이었는데, 그때의 나에게 그 유쾌하고 명랑한 스펀지밥은 외로움과 무서움을 달래주는 너무 소중한 친구 같았었다. 유쾌상쾌하고 마음에 주름이 없는 그 캐릭터가, 방 안 불을 모두 끄고 티비 소리는 없애놓고는 그 작은 네모상자 속에서 부리부리한 눈망울로 부산하게 움직이는 스펀지밥이, 긴 긴 밤 내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어주었는지. 그렇게 룸메이트 없이 두달여를 지냈다.
스태프 빌리지는 말그대로 그 섬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모여사는 작은 마을 이었다. 각 건물은 네 개씩의 방이 마주보고 있는 구조로 한 층에 여덟 개의 방이 있었고, 건물은 모두 이층으로 되어 있었다. 직원 모두가 이용하는 다이너는 뷔페식이었고 제법 메뉴가 다양한데다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은 바베큐데이라 먹고싶은 고기들을 그릴에 가져다가 구워 먹을 수 있게 되어 있어서 그런 날이면 마치 작은 파티라도 하고 있는 듯 아주 맛있는 고기굽는 냄새가 온 마을에 퍼지곤 했었다. 다이너 바로 옆에는 주전부리를 사먹을 수 있는 매점과 작은 바가 있었고, 인터넷이 말도 못하게 느리지만 어쨌거나 한 시간에 4불 정도 하는 피씨방도 있었다. 정말 너무너무 느려서 거의 갈 일은 없었지만.
다른 한쪽으로는 빨래 공간과 수영장, 테니스코트 등이 있었고, 직원들만 이용할 수 있는 해변도 따로 있어서 그 곳에서 수영이나 낚시를 즐기는 동료들을 그 곳에 갈 때마다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쉬는 날이면 그저 쉬고만 싶어지는 반면, 함께 생활하는 외국인 친구들은 항상 무언가를 찾아서 하곤 했었다. 어찌나 열성적으로 할 거리들, 놀 거리들을 찾아 헤매던지. 나에게 일은 돈을 벌기 위해 하는 것이었다면 그들에게는 쉬는 날을 즐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달까. 일하는 것만큼 쉼을 즐기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그들의 생활 태도에서 은연중에 배우게 됬었다.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그 때의 나에게는 굉장히 새롭게 다가왔고 이후 내내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내가 묵은 방은 다이너에서 나오면 바로 보이는 가장 첫번째 건물의 이층 가장 앞쪽에 있었고 룸메이트도 없어서, 거의 매일밤 일을 마친 한국인 언니오빠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컵라면 두어개 끓여 나눠 먹으면서 서로를 위로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분명 나 혼자 사는 공간이었긴 하나 가장 북적북적한 느낌. 일을 마치고 내 방으로 돌아오면, '문이 잠겨있어서 왔다그냥감' 등의 메모가 적힌 포스트잇이 내 방 문 앞에 종종 붙어 있었다. 방 문을 열고나면 문 밑 그 틈으로 밀어 넣었는지, 방의 입구 바닥에 일종의 쪽지들이 나를 맞이해 주곤 했었다. 주로, '이따 저녁 몇시에 누구네 방에서 라면파티함. 글로 오삼.' 이라던가 '이따 8시에 다시 오겠으니 준비하고 있길 바람' 이런 식으로.
로맨틱한 느낌이다, 왠지, 지금 생각하니깐.
그때는 그 다함께 먹는 라면만큼 낭만스러운 것도 없었다.
나는 외국인 친구들과도 금새 친해지는 편이었는데, 나중에는 외국 친구들도 내 방 노크를 하고 가거나 장난스런 쪽지를 남기고 가거나 하기도 했다. 노크 소리를 듣고 문 열어보면 그냥 있나없나 볼라고 그랬다며 스윽 가버리기도 하고, 나도 한국 라면이 먹고 싶은데 언제 오면 되겠느냐고 묻기도 하고. 쉬는 날이 언제언젠데 같이 액티비티를 하지 않겠냐고도. 내 성격이 그리 적극적으로 나서거나 하지 않고 오히려 수줍어 하던 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참 그런 식으로 외국 친구들과도 쉽게 친구가 되었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친해지고 눈인사를 나누는 외국인 친구들도 늘어갔는데, 서로의 나이에 상관없이 모두가 '친구'가 된다는 것이 처음이라 무척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사실 나보다 어린 친구들의 경우도 그들의 행동에서 딱히 나보다 미성숙하다고 느껴지는 부분도 없었고. 나는 스물네살에 몇번을 고민하며 결정한 호주행이었건만 열아홉, 스무살에 자기 나라를 떠나와서 돈을 벌며 세계일주를 하겠다고 눈망울을 반짝이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성숙과 미성숙을 넘어서는 어떤 인생에 대한 '태도'를 다시금 돌아보게 되곤 했었다. '행복' 에 대하여, 그들은 확실히 우리보다, 아니 적어도 나보다는 단순하고 직접적으로 마주하고 있었고 나는 그게 좋아보였다.
다들 고만고만한 나이였다. 섬 안에서, 일하는 분야가 다르더라도 매일같이 어딜가든 마주치게 되는 얼굴들이었고. 그리 넓지 않은 곳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우리들, 여러가지 사건사고들이 많았다.
있잖아, 쟤랑 얘랑 사귄대.
쟤랑 얘는 사귀는 건 아닌데 맨날 같이 다니더라.
쟤네들 그냥 친구라는데 룸메이트 하고 싶다고 방 바꿔달라고 그랬대.
남녀가 방을 같이 써? 사귀거나 하는 것도 아닌대?
응, 그냥 베스트 프렌드라던데?!
아무래도 쟤가 너 좋아하는 것 같아.
가십거리가 차고 넘쳤다. 속닥속닥, 우리끼리 큭큭 하며 얘기할 때는 연예인 얘기를 하는 것마냥 재밌는 이야기, 내가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게 되면 늘 좋지만은 않은 이야기, 그런 이야기들.
일할 때는 서로 얼굴을 붉히거나 기분이 상하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몇시간 전에 얼굴을 붉혔대도, 일하는 때가 아닌 다른 때에 얼굴을 마주하면 열에 아홉반 이상은 웃어보였다. 일할 때 붉혔던 마음을 일을 하지 않을 때에는 굳이 쏟아내지 않는 것이다. 일하지 않는 자리에서 만났을 때에는 일하며 일어났던 이야기들은 거의 꺼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너 유니폼 말고 그 옷 입으니까 이쁘다 라든가 너도 한잔해 라든가 식으로 대화가 시작되어 편한 친구 사이에 오갈만한 내용들로 이어지곤 했었다. 공과 사는 이렇게 구분하는 건가, 하면서. 그들의 그런 태도에 일하며 분하거나 서운했던 꽁한 마음이 스르르 풀리기도 했었다.
짧은 기간 동안도 새로 오는 친구들도, 떠나가는 친구들도 참 많았다.
울상이었던 어느날, 비를 맞으며 온몸이 홀딱 젖어서는 우리들의 손수레랑 짐들을 놓는 곳에 도착했는데 캐나다에서 온 친구 로라가 있었다. 그녀도 마침 나와 비슷한 시간에 일을 마치고는 수퍼바이저에게 콜을 하고 점검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나는 지쳐 있었고, 그녀 또한 그리 밝은 표정은 아니었다. 잠시 후 수퍼바이저가 들어왔고, 우리들 각자의 손수레를 점검했고, 정확하게 이유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이것저것 채워 넣으라는 지시가 내려와서 채워넣는 등의 일을 하는데, 지금 와서 자세한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조금 부당하다 느끼게 된 부분이 있었다. 불만이 아주 큰 게 아닌 이상은 사실 나도 그렇고 한국인 동료들 대부분이 그리 내색을 하질 않는 반면에 캐나다에서 온 로라를 비롯한 다른 외국인 친구들은 정말이지 내 입장에서는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그 때 그 순간에 로라가 또다시 그랬다. 그녀는 자신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일목요연하게 수퍼바이저에게 말했고, 약간 서로 얼굴을 붉히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그녀의 주장이 받아들여 졌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울상이던 나는 왠지 더욱 울상이 되었고. 과연 이것이 예의를 차리는 우리 문화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내가 영어로 그녀만큼 일목요연하게 따지고 들기가 버거워서 그냥 시도조차 하질 않는 걸까 하는 일종의 혼란스러움과 자괴감 같은 것이 들어서 힘든 마음이었다. 앞서 다른 글에서도 이미 언급했지만, 언제나 내 주변을 어슬렁 거리며 기회를 노리고 있는 그 좌절감이 또다시 밀려왔다. 주장이 받아들여진 로라는 일을 마치고 문을 밀고 나가려다 말고 나를 쳐다봤다. 그러더니 대뜸 수퍼바이저에게, 왜 나는 가도 되는데 케이트는 계속 남아 이걸 해야하느냐며 따졌다. 눈이 휘둥그레진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녀는 계속 말을 이어갔고 수퍼바이저는 조금 머쓱했는지 케이트도 가도 좋다며 내게 미안하다는 말까지 했다. 나뿐만 아니라 그날 그 층의 그 곳에 있던 모든 다른 한국인 동료가 그렇게 해서, 내 탓으로 야기된 것이 아닌 오버타임이 분명한대도 일을 늦게 마친건 네 탓이오, 라고 말하는 그들 때문에 오버타임 인정도 받지 못하고 일하고 있었던 그 모든 다른 동료들도 모두가, 그렇게 해서 좀더 빨리 그날의 일에서 해방될 수가 있었다. 로라에게 고마웠고 또 나의 나약함이 분하고 갑갑했다.
나는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조금더, 아니 많이 더.
할말은 해야 한다고.
부당한 대우를 그러려니 하고 넘기는건 결코 착하고 배려있는 행동인게 아니라고.
예의를 잃지 않는 선에서 내 것을 요구하는 것이 죄송스럽고 부끄러운 게 결코 아닌데.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약한 나'를 인정하는 건 조금 괴로운 일이었다.
두달여가 지나고 나서 새로운 그룹이 또다시 섬에 들어왔다고 했고, 그들 중 하나가 내 룸메이트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누굴까 두근두근해 하며 방에 들어서자 금발에 파란 눈, 상당히 매력적인 외모의 그녀가 너가 케이트냐고 물으며 악수를 건넸다. 그렇게 해서 헤이먼에서의 마지막 한 달간은 애슐리와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외모도 예뻤지만 성격도 매력이 넘쳤다. 그녀 덕분에 마지막 한달도 즐겁게 지낼 수가 있었고.
헤이먼에서의 시간들.
정말 힘들었지만 낭만적이었고 로맨틱했다.
내가 떠난다고 하자 기꺼이 내 방에 와서 이별파티를 함께 해줬던 많은 친구들. 결심의 순간 순간들.
그들과의 우정과 청춘의 시간들은 그모습 그대로 로맨틱했었다.
떠날 시간을 준비하던 순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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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ist 작가 미국에서 살며 삶을 기록하고 글을 씁니다. 쓴 책: [나와 마음이 닮은 그대에게] [하루하루 이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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