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지 않은데 왜.
처음 이 곳에 올 때 계약을 한 기간은 6개월이었다.
비자의 특성상 한군데에서 일할 수 있는 최장 기간이 6개월이었고, 그래서 그 기간으로 계약을 하고 오는 것인데, 다들 처음 이 곳에 올 때는 6개월간 죽은듯이 일하고 돈을 많이 모은 후에 그 돈으로 여행을 다니거나 어학공부를 한다거나 등 하고싶은 것들을 하리라는 비장한 각오를 품고 온다. 그러나 대다수가, 6개월이 되기 훨씬도 전에, 그 기간을 채운다는 생각은 온데 간데 없어지거나 혹은 온 지 몇 주 짧게는 몇 일만에 잘려 나갔고, 그래서 섬 안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참말로 빈번하게 오고 또 나갔다. 끊임없는 그들의 이동이 책임감이 없다거나 참을성이 없다고 느껴지는 대신에 이렇게 '견뎌'가는 것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나에게 일을 주는 그들도 내가 일이 익숙해졌다 싶었는지 갈수록 조금씩 더 날마다의 할당량을 늘려 가고 있었고, 일은 그만큼 익숙해졌다 하면 힘들고, 힘들었다 하면 익숙해지고, 다시 또 힘들어지기를 반복했다. 끊임없이 이 섬으로 오고가는 사람들과 꾸준히 남아있는 사람들인 나. 이 모든 것들로부터 오던 회의감이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나가거나 비는 인력만큼의 일거리들을, 군말없이 참을성 있게 일 잘 하고 순한 나와 같은 한국인 친구들에게 알게모르게 일을 더 얹어주는 것만 같았다. 심증은 있으나 물증은 없는 그런 상황들. 고민이 깊어갔다.
그 고민들이 내 얼굴에도 드러나 보였던걸까.
어느날, 나보다 두 달쯤 후에 섬에 들어오고서 한달쯤 후 이 곳을 떠나기로 결심한 캐나다에서 온 로라가 내 얼굴을 빤히 보다가 대뜸
"Are you Unhappy?"
라고 물었다. 행복하냐, 는 물음이 아닌 행복하지 않냐, 는 물음. 내가 그래 보이냐고 묻자, 그녀는 꽤 진지한 얼굴로 그렇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너 정도면 이제 돈도 어느 정도 모았을텐데, 그렇게 행복하지 않다면 굳이 여기서 견디고 있을 필요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 이후에도 몇마디가 우리 사이에 오고갔고, 지금 와서 정확하게 그 모든 대화 내용이 기억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날 이후 확실하게 내 머릿속에 박힌 것은 나는 행복하지 않은가 와 나는 행복하지 않아 보이는가 였다. 행복도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지는 오래되었다. 그리고 행복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열심히 애를 쓰면 나는 행복해 지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지금 내가 얼만큼 불행한지, 불행해 보이는지는 일부러 외면하기가 일쑤였다. 그 때까지의 나에게 행복은 너무나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관념만 같아서 내가 그를 놓고 고민하는 것은 왠지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그런 나에게 정면돌파로 행복에 관한 의문을 던진 친구 덕에,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워서도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솔직하게 처음 이 섬에 올 때 거창한 마음을 품고 온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호주에 오려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한국에는 2학기 시작 전에 반드시 돌아와서 대학에 복학을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자면 호주에 최대한 있을 수 있는 기간은 총 10개월 정도였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급하게 쫓기듯이 한국에 돌아가 서둘러 복학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자면 이 섬에서 돈을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처음 호주에 올 때의 목표에 부합하는 새로운 무언가들을 경험하고 돌아가야 하는데 그러자면 시간이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일을 마치고 여느 때처럼 샤워와 저녁을 마치고 침대에 누우려는데 오른손 엄지손가락에서 오는 지릿한 느낌이 심상치가 않았다. 손톱옆 아래쪽 쯤이 시큰시큰 뜨끈뜨끈. 벌레에라도 물린건가 싶었지만 그런 자국은 없었고 왠지 조금씩 부어오르는 것 같아서 대충 바세린 같은걸 바르고 밴드를 붙이고는 잠을 청했다. 내일도 일찌감치 일어나 일을 시작해야 했으므로, 내일을 무난히 보내기 위해서는 잠을 충분히 자 두는 것이 현명할 것이었다. 억지로 잠을 청했으나 무섭도록 부어오르는 엄지손가락 때문에 새벽에 여러 번을 깼고 결국 거의 뜬 눈으로 밤을 보내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사무실에 동이 트기 직전쯤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손가락이 갑자기 너무 부어오르고 아파서 오늘 일하기 힘들 것 같아요.
그때가 아마 새벽 네시반쯤이었을 것이다. 전화를 받은 수퍼바이저는 알았다고 했지만 일단 이따 아침 미팅때 나와야 한다고 했다. 알았다고 하고 조금더 시간이 지나 아침이 되고나서 겨우겨우 유니폼을 입고 사무실로 들어섰다. 손가락에서 전해오는 지릿한 아픔보다 원인을 알 수 없이 갑작스럽게 부어오른 그 상황이 더 무서웠던 것 같다. 멀리 떨어져 온 부모님이 그리워지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것을 꾹 참으면서 그렇게, 아침 여덟시의 미팅이 시작됬다.
미팅을 주관하는 수퍼바이저는 나와 통화를 나눈 그녀였다. 내가 그녀를 쳐다보자 그녀는 내게 평소와 똑같은 할당량이 주어진 그날의 스케줄을 내밀었다. 나로서는 너무 황당한 일이었고, 무엇보다 진심으로 그 일들을 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미팅이 끝나고 그녀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까 전화로 이야기했었듯 손가락이 너무 붓고 아파서 오늘 이만큼의 일을 하기는 너무 힘들 것 같아요.
힐끗, 나를 쳐다본 그녀와 다른 수퍼바이저들. 내 손가락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케이트, 알겠어. 그런데 넌 우리에게 너무 늦게 말했기 때문에 오늘 일을 빼줄 수는 없어. 오늘 받은 일들을 다 마무리 하고나서 너 쉬는 날 닥터오피스 찾아가 보도록 해.
쉬는 날은 앞으로도 며칠 더 기다려야 했다. 내 손가락은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이 봐도 눈에 띌 정도로 비정상적으로 부어있었다. 나로서는 억울하고 황당한 상황이었지만, 내가 아파서 일을 못 하겠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미안하고 죄송스러운 마음이 크던 나였다. 어떻게든 참고 해보자 다짐해 보며 일을 시작했다. 무서울 정도로 차가운 표정과 무심한 말투가 조금은 충격으로 다가오기도 했었다. 어느 정도 친분이 쌓였다고 생각하던 상황이었다. 내가 미련할 정도로 요령이나 꾀를 전혀 부리지 않아온 것도 알고 있는 그녀들이었다. 인간적인 서운함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일을 하러 방마다 다니기 시작했다. 이를 악물고 일했다. 그러다, 빈 방을 치울 때 침대시트를 갈려다 엄지손가락에 살짝 시트가 스쳤는게 그것이 너무 아파서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물이 터져버렸다. 침대모서리에 쭈구려 앉아 눈물을 훔치고 있는데 그모습을 마침 지나가던 한 수퍼바이저가 봤고, 그는 힘들면 점심을 지금 먹으러 가도 좋다고 허락해 줬다. 그때가 열한시쯤, 평소보다 두어시간 이른 시간이었다. 허락을 받고 다이너에 가서 밥생각이 딱히 없어서 그냥 맥없이 앉아 쉬고 있는데 그 모습을 함께 일하는 한국인 오빠가 보게 되었고, 오빠는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잔뜩 부운 엄지손가락을 보여주자 오빠는 지금 손가락이 이 지경인 걸 그들이 알고 일을 시키는 거냐며, 괜히 참고 미련하게 일하다가 더 큰 일이 날 수도 있으니 지금 바로 닥터오피스에 가서 진료를 받아보라고 했다. 혹시 잘못되어 이런 데서 아프면 정말 고생이니까 일 더 커지기 전에 가서 얼른 약이라도 좀 받으라고. 갑자기 바짝 정신이 든 나는 그 곳에 하릴없이 앉아있는 대신 닥터오피스로 발걸음을 옮겼고 마침 그 시간에 그 곳을 찾는 사람들이 거의 없던지라 바로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닥터는 내게 이것저것 묻고 내 손가락을 눌러보고 찔러보기를 반복했다. 결국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주며 그는 당분간 오른손을 절대 쓰지 말아야 한다며, 지금 소견서를 써 줄 테니 당장 사무실로 가서 매니저에게 그걸 제출하고 너는 진통제를 먹고 쉬라고 했다. 그리고는 한 손 전체를 감싸도록 크게 붕대를 감아주었다. 며칠 후 다시 오라고 신신당부를 해 주던 그는 그렇게 진료를 마치고 나서 직접 사무실에 전화도 걸어 내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내 몸에 그렇게 붕대를 감아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사무실에 소견서를 제출하자 더이상 그녀들도 할 말이 없어진 모양이었다. 이미 닥터가 나는 지금 절대 일을 하면 안된다며 적어도 3일 이상은 쉬게 해야 한다고 말해놓은 상황이었다. 그렇게 눈치코치 봐가면서 오전 일을 마무리하고 드디어 쉴 수 있었고, 남은 오후와 이후의 이틀 동안은 거의 진통제를 먹고 자고, 진통제를 먹고 자는 시간의 반복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손의 붕대는 2주 정도 하고 있었고, 그 2주 동안도 업무량은 절대적으로 평소와 똑같이 주며 괜찮냐는 말 한마디 하지 않는 태도를 보면서 더이상 그 곳에 있으면서 행복할 이유를 찾기가 어렵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호주에 간 이후에도 매일같이 한국에 전화해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던 나였지만 그 기간 동안은 연락을 드리지 않았다. 타지에 있으면서, 아프다는 이야기를 꺼내게 될까봐 두려워서.
아픈 덕분에 그 기간 동안 두서없이 자라고 있던 삐죽빼죽한 마음들을 차분히 정리해 갈 수 있었다. 가지치기, 마음 또한 가끔 그렇게 정리를 해 주지 않으면 제멋대로 자라 얽히고 성기게 되기 마련이다.
엄지손가락이 아픈게 그리 불편한 일인줄을 그때 처음 알았다. 샤워 한번 하려해도, 비누 한번 쥐려고 해도 욱신욱신하는 것뿐만 아니라 붕대 사이로 물이 들어가면 안되니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한번 샤워를 하는데 삼십분은 기본으로 들었다. 물과 함께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붕대를 다 풀고 붓기가 많이 가라앉게 되었을 때는 내 마음도 상당히 가지런해질 수 있었고, 나는 그들에게 2주 후 일을 그만두겠다는 2주 노티스를 줬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여러 번 붙잡았지만,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내가 섬을 곧 떠난다는 소식은 스물스물 섬 전체로 퍼져갔고, 가깝게 지내던 외국 친구들이 아쉬운데 그냥 보낼 수 없으니 이별파티라고 해야하지 않겠냐고 자꾸 물어와서 나 몇 일날 떠나니까 그 전날 내 방 들러, 간단히 인사라도 나누자, 라고 말했던 것이 정말 왁자지껄한 파티로 발전되고 말았다. 알아서 싸오는 안주거리들과 스낵, 맥주와 샴페인 등등. 이름도 잘 모르는 친구들까지 자꾸만 찾아왔다. 내가 의도한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이별파티가 되었지만, 사무실 수퍼바이저들과 매니저까지 내 방으로 일부로 찾아와 놀라울 정도로 스윗하게 나의 앞길을 축하해 주면서 마지막을 정말 따뜻하고 유쾌하게 보낼 수 있게 되었고, 그 사실이 지금은 너무 감사하다. 정말 좋은 추억으로 남을 수 있었던 시간들.
실컷 일했으니 여행을 좀 다녀보자 했다. 마침 일정이 맞게된 한국인 언니와 두 동생들과 함께 조금더 북쪽으로 올라가 보자고 했다. 호주의 새로운 곳들을 가보고 다시 시드니로 돌아가겠노라. 그리고 그렇게, 헤이먼 아일랜드에서의 생활이 막을 내리고 있었다. 정말, 이제는 Bye, 나의 애증의 헤이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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