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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나은 Dec 02. 2021

우리가 왜 잃어야 해?

IMF

엄마는 분명히 꽤 들떠 있었던 것 같다. 그 길고 허옇고 네모난 멋대가리 없는 건물 한 편으로 들어가는 것이 뭐가 그리 대단한 일인 건지 알 길은 없었으나, 엄마가 좋다 하면 좋은 것이었다. 나는 별다른 감흥은 없었지만 그저 우리가 있을 곳은 2층이니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파트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나는 6학년씩이나 되었으면서도 여전히 엘리베이터가 께름칙했다. 어릴 때 엘리베이터 사고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봐버린 탓이리라. 이래서 조기교육이 무서운 법. 어쨌거나 아직도 그곳의 방구조와 새 건물 특유의 코를 찌르는 시멘트 냄새가 진하게 기억에 남아있을 정도이니, 그때 우리 가족에게는 그곳으로 이사를 간다는 것이 거대한 사건이었던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리고, 그 거대한 사건이 정말로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목격했던 엄마의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빠는 본인을 '전기쟁이' 라고 부르곤 했다. 몇 번 놀러 갔던 적도 있다, 아빠의 남영동 공장. 규모가 아주 큰 공장은 아녔지만 그만하면 내겐 무척 커 보였고 무엇보다 아빠가 그 공장의 주인이라는 것이 그저 자랑스러웠다. 천장이 무척 높았던 공장 속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나타나는 아빠의 사무실에 앉아 유리창으로 공장을 내려다보면 아빠가 열심히 기계들을, 전선을 만지며 일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그 모습은 나에게 묘한 안정감을 안겨주곤 했었다. 아빠가 무슨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저 파란색 넓지막한 점선이 가득한 종이 위의 온갖 기호와 선들, 그 사이사이 아빠의 메모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저 든든하고 멋져 보였다. 아빠가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 속 개미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 당장 화려하게 반짝이지는 않지만 묵묵하고 성실하게 아빠만의 은은한 빛을 내면서 길을 닦아가는 듯한 느낌이었달까. 우리 아빠는 언젠가 분명히 더 큰 빛을 발하게 되리라. 아빠 얼굴에 번지는 뿌듯한 만족감이 보상받을 날이 분명히 오고야 말겠지. 나에게 있어서 아빠는 그 행복을 보장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 중학생이 되기 전 마지막 가족여행지는 동해였다. 설악산에도 올랐고 어린 동생과 침대에서 베개를 쌓아놓고 이불을 헤집으며 방방 뛰면서 놀았다. 우리가 묵은 콘도의 베란다 커튼을 걷으면 파도치는 동해바다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 바라보기만 해도 속이 뻥 뚫리는 듯한 뷰가 있는 멋진 곳이었다. 아빠가 이 콘도의 오너쉽인지 뭔지를 일부 가지고 있다고 했었던 것 같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은 몰랐지만, 앞으로 원할 때마다 자주 이곳에 와서 묵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으니 가슴이 설렜다. 동해의 시원한 바닷바람이 내 가슴속까지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부모님의 조용히 뿌듯해하는 듯한 얼굴에, 동생의 천진난만한 웃음에, 한껏 충만한 기분이 들어서 나도 신이 나서 웃었다.


우리 가족이 그 콘도에서 묵었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IMF는 급작스럽게 불어닥친 모래바람 같은 것이었다. 바람이 부는 동안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모래알들이 닿는 온몸을 세차게 때리더니 잠잠해지고 나서는 완전히 닦아낼 수 없을 만큼 눈에 보이지 않을 구석구석에까지 그 자국을 남겼다. 작은 모래 알갱이 하나하나가 바늘이 되어 콕콕 피부에 박힌 것처럼, 우리 가족은 얼룩져갔다. 그것도 놀라울 정도로 아주 빠른 속도로.




엄마의 꿈이 담긴 아파트는 사라졌다.

아빠의 꿈이 담긴 공장도 문을 닫았다.

똥두간이 있고 히터조차 없어 겨울에는 물을 데워 씻어야 했던 그 집에서 쫓겨나듯 급하게 이사를 나왔다. 아빠는 띄엄띄엄 집에 들어왔고 엄마는 홀로 동굴 속에 들어가 있기 시작했다.

동생은 이제 다섯 살, 일이 어찌 돌아가는지 이해하기에는 아직 너무 어렸으며 나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다, 이 박혀있는 모래알들이 모두 다 빠져나갈 때까지.


중학교 시절 내내

나는 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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