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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나은 Apr 26. 2024

미국만은 가지 말거라

Don't marry to 외국인

2013년 5월 31일, 나는 한국에 있었다가 같은 날 미국 로스 앤젤레스 공항에 있었다. 분명 한국을 떠나와서 열두 시간이 넘는 긴 비행을 지나온 후였음에도 미국에 도착하고 보니 나는 여전히 같은 날을 살고 있었다. 한국은 6월 1일, 아직 나에게는 오지 않은 '내일'이었다.


결혼이 제2의 인생이 시작되는 큰 이벤트라고 한다면, 나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에게는 결혼과 함께 찾아온 그에 못지않은, 혹은 더 큰 이벤트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미국으로의 이민이었다. 하필(?) 내가 인생의 파트너로 선택한 사람이 파란 눈 키다리 미국인이었기 때문에, 그를 위해서, 그래서 미국에 왔다. 그래, 물론 표면적인 이유는 그러하다. 하지만 더욱더 냉철하게 솔직해져 보자면, 결국 그것은 나의 선택이었고, 내 영혼 저변에서의 나는 미국에 오고 싶었을 것이다. 앞으로 내가 겪어내야 할 향수병, 그리움의 무게가 얼마나 대단할지를 상당히 얕잡아 보고서. 아니, 이 또한 더더욱 깊이 내 마음을 들여다보자면, 사실은 신물이 나 있었던 것도 같다. 당시 일상들 중에 지긋지긋하다고 여겨지는 부분들이 분명히 있었으니까, 이를테면, 하루도 빼놓지 않고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자욱한 술기운이라든지 엄마의 무질서한 기타 선율이라든지 얼룩이져 누레져버린 방 안 벽지라든지 하는 것들 따위가. 내 영혼을 좀먹고 있다고 싶어지는 한때는 낭만이라고 믿었던 그런 것들이.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그전에도 가끔씩 부모님이 다투셨던 기억이 있기는 하다. 뭐, 그럴 수 있는 거니까. 하지만, 그때부터는 더 이상 그 정도 수준의 다툼이 아니었다. 무언가 확실히 크게 잘못되어 있었다. 모든 상황이, 모든 것들이. 정말 이상했다, 바로 얼마 전에 설악산으로, 아빠가 갖고 있던 콘도로 가족여행도 다녀왔었는데. 콘도 바깥으로 보이는 훤히 펼쳐진 바다를 보고 바닷가에 몰아치는 파도소리를 들으면서 어린 동생과 신나게 침대 위를 뛰어다니고 베개싸움도 했었는데. 설악산에 올라 다 같이 눈구경도 하고 사진도 찍고 그랬는데. 그 사진들 속 우리들은 환하게 웃고 있는데..


IMF가 터진 것이 그 무렵이었다. 그게 뭔지도, 왜 온 국민들이 집에 고이 간직해 뒀던 소중한 금팔찌, 금목걸이, 반지 등을 내놓으면서 그렇게 전국적으로 금 모으기 운동을 하는지도, 왜 갑자기 부모님 얼굴에 그토록 그늘이 지게 되었는지도 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자세히 알지를 못했다. 상황은 혼란스럽기만 했고 확실한 것은 바로 몇 달 후면 들어갈 거라던 주공아파트, 엄마가 지난 십년간 열심히 모아 마련했다는 그 2층이라던, 바로 얼마 전에 구경까지 하고 왔던 곧 완공 예정이던 그 아파트로 우리가 더 이상 들어갈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대신에 우리는 후비진 골목길 안쪽의 아주 작은 빌라, 그 빌라의 2층으로 이사를 갔다. 신식 아파트 2층이 아니라, 누가 찾아오기도 힘들, 여중생 혼자서 걷기에는 조금 많이 한적하고 으슥한 그런 동네의 구식 빌라 2층으로. 그리고, 아빠는 몇 달을 집에 들어오시지 않았다.


아빠 공장 문을 닫게 되었다고 했다. 아빠가 일해주고 돈을 못 받게 된 곳들이 사방천지라고 했다. 받아야 할 돈을 받질 못하는데 여전히 돈을 줘야 할 곳들이 있어서, 그 사람들한테 미안해서, 그들에게 돈을 주며 아빠의 양심을 지키는 대신에 엄마는 꿈에 그려온 새 집을 바로 코 앞에서 잃어야 했다. 어려울 때일수록 더 단단해져야 한다고.. 는 들었으나, 상황이 여의치가 않았다. 부모님 사이에는 서로 날 선 말들이 오갔고, 그 말들은 나를 불안에 떨게 했고, 그럴수록 나는 어린 동생을 더욱 단단하게 안았다. 매일밤 팔베개를 해주고 함께 잠에 들었다. 동생은 늘 자기 전에 내게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고, 그러면 나는 아무 이야기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늘어놓아주다가 동생이 잠이 든 것을 보고는 멈추곤 했다. 우리의 세상이 이렇게나 뒤집어져 있건만 내 동생은 내 품에서 입은 벌어진 채로 침까지 조금 흘려가며 세상 편안한 표정으로 잠에 들어 있었다. 그렇게도, 내게 꼭 붙어서 나를 놓지 않던 동생에게 어쩌면 나는 유일하게 단단한 세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말이다.


엄마는 말수가 급격히 적어졌고, 혼자서 조용히 문을 닫고 방에 계시는 날이 많아졌다. 그때부터, 서서히 집안에 술기운이 퍼지기 시작했다. 엄마는 술을 드시면서 조금 웃었다. 때론 나를 붙잡고 울었다. 나는 조용히 엄마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주아주 조금, 슬펐다.





내가 십 대였을 때만 해도 국제결혼이 지금처럼 오픈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외국인은 여전히 외국인일 뿐. 특히나, 파란 눈에 금발머리 같은 그런 "누가 봐도 외국인"인 그런 사람들은 아무리 외모적으로 매력이 있다고 한들 같은 사람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뭐랄까, 영어를 배울 수 있는 선생님이나 이 세상 안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또 다른 생명체 정도의 느낌이었달까?


엄마는 소위 말하는 '외국인 울렁증'이 있었다. TV를 보다가 가끔 국제결혼이나 그와 비슷한 결의 이야기가 흘러나오면 내게 넌지시 말씀하시곤 했다.


"외국인이랑은 결혼하지 말아."

"미국은 가지 말아(그때는 미국=외국 느낌였달까, 적어도 우리 모녀에겐), 엄마 쓸쓸해."


그러면 나는 늘 이렇게 답하곤 했다.


"절대 안 해, 내가 왜 해."

"미국은 뭐 여행이나 가는 거지 뭐 거기서 살아. 걱정하지 말아요, 엄마랑 꼭 붙어살 거야."


그리고, 그로부터 십여 년쯤 후에

나는 정확히 엄마가 만나지 말라고 했던 유일한 사위 조건이었던 그 '외국인'을 만나서 결혼을 하고 그 '미국'에 가겠다며 엄마에게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당당하게 걸었다. 눈물이 터져 나와서 어깨가 흔들리는 것이 보일까 봐 이를 악물면서.






공항에 도착해서 짐을 찾고 사람들을 따라서 걸어 나왔다. 크게 두리번거릴 필요도 없었다.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키가 큰 그가 바로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꼭 한 달여만이었다. 내가 선택한 세상이 여기에 있었다. 막연하게 그의 손을 잡고 꽃다발을 흔들며 공항을 빠져나오니 캘리포니아의 햇살이 나를 맞이했다. 복잡한 내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는 그 건방진 햇살이 꽤 마음에 들었다.



"우리가 살 곳은 여기서는 좀 멀어. 여기랑은 아주 달라. 놀라지 말아줘."






차를 달려 세 시간쯤이 지난 후, 그제서야

나는 왜 그가 그토록 놀라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여기가 진짜 캘리포니아인가 싶을 정도로 키가 큰 소나무, 전나무들이 웅장하게 펼쳐진, 절벽 같은 구비진 길을 거슬로 올라와서, 저 멀리 도시의 빛들이 아늑해질 무렵에 그렇게

올라가던 길

나는 남부 캘리포니아를 저 멀리 내 발 밑에 두고, 전나무의 향기를 맡으면서 그렇게 앞으로 내가 살아가게 될 그 집의 문을 열게 되었다.


탈깍.


우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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