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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som Sep 06. 2018

노처녀의 영화 보는 법

39세 노처녀 일기

하루에 4편 본 영화 리뷰


대관람차 하루에 영화 네 편을 보았다. 방식에 있어 무식했던 하루임에 분명하다. 그 첫 번째 무식의 시작은 한일합작영화 '대관람차'였다. 내용도 몰랐고, 주인공도 몰랐다. 다만 한일합작이란 단어에 홀려 회사분이 넘겨주신 공짜 티켓을 덥석 문 것이 그것이다. 보는 내내 어색한 일본어 연기에 화가 나고 흔들리는 앵글에 울렁증을 느끼며 불편함도 있었지만 후반부에 드러나는 남자 주인공의 노랫소리에 심쿵 해 버렸다. 보고 난 후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남자 주인공은 자두의 멤버 강두였다. 강두는 루시드폴의 노래를 불렀지만 마치 자기 노래 같았고, 자신의 꿈을 그리워하는 것만 같았다. 아, 왜 연기를 하였을까. 저렇게 멋진 보이스를 가지고 있고, 재능을 지니고 있는데. 한때 인정도 받았던 아이돌 가수였는데 왜 연기를 시작했을까. 뭐 다 누구에게나 사연은 있겠지만 그렇게 알게 된 강두의 노래를 영화가 끝나고 몇 곡 들었다.

영화는 포스터처럼 멋진 대관람차의 모습이 등장하진 않는다. 그 근처에서 현실을 살아내는 사람들의 모습만이 비친다. 우발적으로 때려치운 회사, 뭘 해야 할지 모르는 남자 주인공은 어렴풋이 어린 시절 좋아했던 기타를 들고 누군가를 위해 노래를 한다. 무엇이 되고 싶은지는 아직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이 막연하고 답답한 현실과 미래 사이를 오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어딘가 도피처를 원하면서도 그 어디가 명확한 목적지인지 확답을 내지 못한 채 이동하고 또 이동한다. 그들의 삶은 지금 내 모습과 다르지 않다. 비루한 현실 속에서 버티고 버티지만 미래의 목표 따위가 없어 더욱더 처참해지는 오늘. 몰라도 떠나는 주인공의 모습은 정처 없고 대책 없어도 부럽기만 하다. 여자 주인공은 저 멀리 인도네시아로 가고, 남자조연인 카페 사장 스노우는 캐나다로 떠난다. 떠난다고 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이 뭔지 모를 때 행동에 옮기는 건 박수를 쳐줄만하다. 그게 실제라면, 현실에서 실천하고 있는 주인공이 있다면 그들은 분명 용기가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요즘 쉬던 그림을 다시 그리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마치 뭐라도 되는 것 같지만 꽤 오랜 관심을 두고 있어도 막상 연습을 많이 하지 않아 실력과 이상의 갭이 매우 큰 상태다. 영화 속에 명장면을 꼽으라면 여자 주인공의 아버지를 찾아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지만, 그림을 그리고 싶은 장면을 꼽으라면 이것이다. 떠난다는 말을 나누는 장면. 사람들은 떠나야 한다. 회사든, 집이든, 나 자신의 마음이든, 사람이든. 떠날 때 내가 누구인지 알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환경을 바꿔줘야 한다. 내가 나인지 환경이 내가 된 것인지 구분이 안될 때 우리에겐 용기가 필요하고, 실패가 필요하다. 어쩌면 한 직장을 5년이나 버틴 내게 필요한 건 헤어짐일지도 모른다. 직장과의 이별, 사람과의 이별. 그렇게 떠날 때를 놓치고 마는 오늘이다.


너의 결혼식 만날 사람은 언젠가 만나게 되어 있다고 한다. 인연이 되면 만나고 인연이 끝나면 헤어지고 만다. 헤어졌다고 해서 완전히 그 인연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시간이 지나도 마음속에 상대방을 추억하고, 그리워하고 그런 기억 때문에 지금을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딱 그런 영화다. 여자 주인공은 결혼을 한다. 정직한 영화 제목처럼 그녀의 결혼식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말을 해본다. 그래서 오늘의 내가 있다고 말하는 남자 주인공. 누구나가 슬프고 행복한 연애를 경험하지만 오래 곱씹고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람은 간사해서 새로운 사람이 자리를 잡으면 금세 지난 것을 잊어버리곤 한다.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이야기다. 그래도 나란 사람이 지금의 사람에게 잘해줄 수 있도록 하려면 과거의 경험은 분명 약이 된다. 경험을 무시할 수 없기에 첫사랑은 늘 서툴고 부족하고, 완벽치 않다. 물론 지금이 완벽할 수도 없지만. 그런 미완성을 죽기 전까지 실천할 때 완성된 삶이 이루어지는지도 모른다.

4년을 사귀었던 남자 친구가 있었다. 헤어진 지 7년 만에 통화를 했는데 '너 혹시 결혼하니?'라고 물어왔다. 참 모진 말이다. 헤어진 사람한테 청첩장을 보내다니. 사이코가 아니고서야 그런 일은 왜 하는지 이해불가. 그 당시 나는 남자 친구도 없었고, 보고 싶지도 않았고 아무렇지 않았지만 그래도 헤어진 후 딱 한 번은 연락을 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헤어지는 과정도 완벽했고, 만난 과정도 참 좋았던 그 사람에게 마치 완주한 도장이라도 찍어주는 마음으로 한 번은 통화해보고 싶었다. 만날 자신은 없고 수화기 너머 저 멀리 들려오는 목소리로 완주의 끝을 알리고 싶었다. 시간은 참 잘 간다. 지금은 마음속으로 깊이 축하할 마음도 있다. 그가 만약 결혼을 한다면, 축복의 시간이 온다면 저 멀리고 박수를 쳐주고 싶다. 이 정도면 좋은 사람이었다고 그래도 고마웠다고 말이다.


상류사회 나는 모른다. 상류층의 생활을. 그런데 한 가지는 안다. 분명 그 계층에 있는 사람들은 욕심의 스케일이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그 스케일이 커질수록 신분은 명확해진다. 하지만 실수할 시 한 번에 망한다는 단점이 있다. 우리가 사는 소확행은 실패 확률이 낮고 그렇다 한들 리스크가 없다. 아니 덜하다. 내가 사는 세상은 상류사회로 가기 위한, 지금보다 좀 더 한 단계 계급을 올리기 위한 하루하루 투쟁의 결과가 아니던가. 내가 이렇게 지겨운 회사생활을 버티는 것도 다만 지금의 직장으로 유지되는 나의 사회적 지위 때문이 아니던가. 이것으로 더 올라가기 위한 것이 아니던가.

여자 주인공은 부관장에서 관장으로, 그의 남편은 교수에서 국회의원으로의 에스칼레이터를 탄다. 하지만 상승 에스칼레이터가 아닌 하강 에스칼레이터에 타고 왜 다시 1층으로 내려왔냐고 묻는다. 그들은 어쩌면 지하로 내려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하세계가 좀 더 넓은 공간과 자유를 준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아파트 집값이 계속해서 오른다. 그 값으로 우리는 기뻐하고 허망해한다. 상류사회는 에스칼레이터가 데려다준 공간을 의미하는데 그 공간은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다. 내 행복의 가치가 나를 상류사회로 데려갈 수 있으리에 대한 답은 내 안에 있다. 그것이 나의 사회이자 세계가 된다.


나를 차 버린 스파이 사실 이때부턴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하루 4편의 영화는 39세에 어울리지 않는 취미생활이다. 허리는 아팠고, 눈은 감겼다. 그래도 돈 내고 본 영화이기에 끝까지 지켜내야만 했다. 내 저 영화를 반드시 재미있게 보아야만 한다는 의무감. 해냈다. 영화는 재미있었다. 스파이 남자 친구를 둔 여자 주인공의 활약을 지켜보며 전형적인 미국 스타일 유머와 재미. 나무랄 데 없이 괜찮다. 분기에 한번 정도 보면 아주 적당한 미국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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