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세계의 주인을 보고서
이런 영화일 줄은 몰랐다. 세계의 주인을 보기로 결정한 건 이전작 '우리들'이란 영화를 인상 깊게 보아서기도 하고 출연배우들이 사비를 내어 관람객과 영화를 관람한 뉴스를 보고 나서기도 했다. 영화는 청소년기의 성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된다. 세계의 주인 영화의 주인공인 이주인은 친구들과 함께 춤을 추고 피구 중에 반 남자애와 장난을 치기도 하는 등 활발한 아이다. 주인의 유일한 고민이라면 장래희망을 정하는 일이다. 사건은 학교에서 성범죄자 출소에 반대서명을 받으면서 벌어진다. 수호는 성범죄 피해자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이라며 당연히 이 동네에 돌아오게 하면 안 된다고 한다. 반아이들 모두가 서명한 가운데 이주인만은 귀찮다는 듯이 무시한다.
왜 서명을 안 하냐는 수호의 질문에 주인은 말한다. "네가 피해자에 대해 뭘 아는데?" 여기까지만 본 관객은 주인의 태도가 성범죄 행위를 가볍게 여기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어진 장면에 큰 반전을 깨닫게 된다. 수호와 말씨름이 격해지면서 주인은 외친다. 내가 성폭행 피해자라고. 주인의 충격적인 발언 이후로 주인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이 바뀐다. 가장 친한 친구는 자기를 피하고 친구 무리들은 주인의 행동에 피해자라는 딱지를 붙이며 해석하려 든다.
어떤 책에서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인식은 실제와 매우 다르다고 말한다. 피해자는 우울하고 세상 밖이 두려워 방 안에만 갇혀 있다.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고 믿는다. 실제론 다르다. 설령 그 경험이 트라우마로 남는다 해도 세상 밖으로 나와 치유하고 다른 이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간다. 감독은 관객이 주인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지 않도록 일부러 피해자임을 밝히는 장면을 뒤에 배치했다. 관객인 우리는 편견 없이 바라본 주인의 모습을 알기에 주인을 향한 친구들의 불편한 시선과 가십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내가 다니던 대학교에서도 성폭행 사건이 있었다. 여자기숙사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학과 동기와 기숙사를 지나면서 그 사건을 언급했었다. '내 생각엔 그건 떠들며 얘기할 건 아닌 것 같다'라는 동기의 말에 내가 너무 가볍게 가십처럼 소비한 것 같아 부끄러웠다. 나도 한 때 그 기숙사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다. 내가 타깃이 되지 않으리란 법이 있을까. 어떤 누구라도 범죄에 노출될 수 있었다. 그날 이후로 피해 여성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들려오는 소문으로 본인이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다고 해서 금방 그 일은 덮어진 걸로 알고 있다.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말한다. '나는 괜찮다고, 멀쩡하다고' 주인의 엄마는 위가 자주 아프지만 위장약으로 아픔을 참는다. 주인의 아빠는 집보다 시골에서 혼자 사는 게 편하다고 말한다. 수호의 여동생은 깁스를 한 팔이 아프지 않는다고 말한다. 학교에서 폭탄선언을 한 후 주인과 엄마는 그날 밤 세차장에 간다. 그런 얘기를 갑자기 꺼내서 미안하다는 말로 시작한 주인은 세차를 시작하고 마무리하기까지 과정 속에서 원테이크로 감정을 폭발시킨다. "엄마라면 미리 알아챘어야지, 내가 긴 세월 동안 고통받지 않았을 거잖아." 시끄러운 세차 소리에 덮힌 주인의 처절한 울부짖는 장면에 마음이 아팠다. 괜찮다가도 과거의 기억에 울컥 올라오는 때가 있듯이 주인에게도 그 순간이 서럽고 고통스러웠던 날이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상처를 딛고 나아간다. 수술을 마치고 건강하게 지내는 주인의 엄마, 주인에게 가족과 함께 놀러 오라고 말하는 주인의 아빠, 그리고 친구의 꼬집음에 아프다고 말하는 주인의 모습에서 희망을 엿볼 수 있다. 주인은 말한다.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장래희망이라고'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전해주고 싶었던 건 상처를 입었던 입고 있는 이들에 대한 편견도 측은함도 아닌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길 바램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