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릿한 JPEG”
비 오는 오후였다.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나는 서랍 속 오래된 흑백 사진 한 장을 꺼내 들었다. 낡은 빛바램 속 인물은 흐릿했지만, 오히려 그 흐릿함이 기억을 더 오래 붙잡았다. 선명함이 모든 감정을 대변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테드 창은 생성형 AI를 바로 그런 흐릿한 이미지에 비유했다.
2023년 2월, 그는 『뉴요커』에 “ChatGPT는 웹의 흐릿한 JPEG다”라는 글을 실었다. JPEG는 손실형 압축 방식이다. 이미지의 크기를 줄이기 위해 데이터 일부를 버리지만, 전체적인 윤곽은 유지된다. 마치 모서리를 깎아낸 돌처럼, 원형은 사라졌지만 형태는 남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 차이를 인지하지 못한다.
우리 주변에도 손실형 압축은 익숙하다. 복사기를 여러 번 통과한 문서, 리샘플링된 음악 파일, 반복 저장된 사진. 원본은 희미해지고, 익숙한 잔상만이 남는다. 테드 창은 생성형 AI가 이와 유사하다고 말한다. ChatGPT는 인류가 축적한 수많은 텍스트를 압축한 뒤, 그 잔향만으로 문장을 만든다.
ChatGPT는 정확한 문장을 기억하지 않는다. 대신 수많은 문장에서 패턴을 추출해 새로운 문장으로 조합한다. 이 과정에서 단어의 순서와 맥락은 흐릿해지고, 의미만 근사치로 남는다. 그래서 AI는 정답을 맞히는 것이 아니라, 설득력 있는 유사어를 제안한다. 복제는 아니고, 창작이라 말하기에도 어딘가 불분명한 중간지대다.
이런 구조는 AI의 태생적 한계를 드러낸다. 무손실 압축이라면 어떨까? 사용자의 질문에 정확한 원문을 인용하고, 그 출처까지 명시했을 것이다. Perplexity나 구글의 ‘오버뷰’ 같은 시스템이 그 예다. 흐릿함보다 근거 있는 선명함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들은 새 시대의 도구가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테드 창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2024년 8월, 그는 “Why AI Isn’t Going to Make Art?”라는 또 다른 글을 뉴요커에 기고한다. 이번엔 단순히 AI의 정보 처리 능력이 아니라, 창작 능력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AI는 예술을 만들 수 있는가?’라는 오래된 물음에, 그는 세 가지로 응답한다.
첫째, 예술은 선택의 예술이다. 시 한 줄을 쓰기 위해 백 번 고치고, 그림 한 획을 남기기 위해 열흘을 망설이는 일. 창작은 ‘정답’이 아닌 ‘선택’의 축적이다. 하지만 AI는 주어진 입력에 따라 확률적으로 가장 그럴듯한 결과를 낸다. 고민 없는 선택은 선택이 아니다.
둘째, 생성형 AI는 평균의 기계다. 과거 데이터를 바탕으로 가장 자주 등장한 패턴을 학습한다. 그래서 ‘익숙하지만 낯선’ 문장은 잘 만들지만, ‘전혀 새로운 감각’은 어렵다. 예술은 통계로 설명되지 않는다. 낯설고 불편한 것들이 오히려 창조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셋째, 예술은 감정이다.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진동, 손끝에서 전해지는 체온. 하지만 AI는 감정을 ‘재현’할 수 있어도 ‘경험’ 하지는 못한다. 울음의 흔들림은 알고리즘이 아닌 심장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AI는 공감을 시뮬레이션할 수는 있지만, 느낄 수는 없다.
이런 이유로 AI가 만든 창작물은 감탄은 이끌어내도, 여운은 남기지 못한다. 빠르지만 얕고, 정교하지만 비어 있다. 그것은 감정을 모방한 기술이지, 감정 그 자체가 아니다. 예술은 기술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생으로 깎아낸 흔적에서 피어난다. 기술의 매끄러움은 삶의 모난 결을 흉내 내지 못한다.
테드 창은 생성형 AI의 방향을 ‘대규모 저품질’이라고 요약한다. 소비자 입장에선 빠르고 효율적이다. 하지만 예술은 반대 방향에 있다. 소규모 정교함, 천천히 완성된 감정의 농도. 대량 생산된 감동은 결국 감동이 아니다.
결정적 차이는 상호작용에 있다. 예술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다. 창작자가 담아낸 진심이, 수용자의 삶 어딘가에 닿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AI는 그 연결을 만들지 못한다. 데이터는 많지만, 문맥은 없다.
우리는 누가 만들었는가를 알고 있을 때, 작품의 무게를 다르게 느낀다. 어린 시절 상자 속 편지가 소중한 이유는, 그 종이에 쓰인 글씨가 어떤 손에서 나왔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AI는 그 손이 없다. 기원 없는 글은 마음에 닿지 않는다.
그래서 테드 창은 말한다. 생성형 AI는 결국 인간이 만든 예술을 흐릿하게 복제할 뿐이라고. 감정은 누락되고, 상호작용은 제거되고, 삶은 삭제된다. 남는 건 익숙한 형식과 낯선 공백뿐이다. 우리는 그 흐릿한 이미지 앞에 조용히 멈춘다.
이제 질문은 바뀌어야 한다. ‘AI는 예술을 만들 수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예술이라 부를 것인가?’로. 기술이 아무리 선명해져도, 인간이 지닌 흐릿한 감정의 그라데이션을 완전히 복제할 수는 없다. 선명한 복제보다 흐릿한 진심이 더 오래 남는 이유다.
그러니 묻는다.
당신은 흐릿한 세계에서 무엇을 선명하게 남기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