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분방한 선에 대해서
중학교 1학년 수학에서 도형을 배웁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 기본도형입니다. 점, 선, 면, 각이라고 하는 4가지입니다. 14살이면 배우는 거라 누구나 상식으로 알고 있는 개념입니다. 도형을 그리려면 당연히 선을 그립니다.
선은 모든 형태의 기본입니다. 미술에서도 선이 기본입니다. 그래서 어디에서 미술을 배우든 선에 대해서는 배웁니다. 입시 미술을 할 때는 가로, 세로, 대각선 모든 방향으로 선을 그립니다. 그리고 힘을 주거나 빼거나 연습도 합니다. 꼭 입시 미술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이 주는 느낌을 연구하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연필이 모든 것의 시작입니다. 색칠을 할 때도 선으로 면을 채워 넣곤 합니다. 그렇게 면을 그리고, 입체를 그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서양 미술에서는 선이 그 자체로 드러난 적이 없습니다. 선은 형태를 만들기 위한 기본 토대에 불과했습니다. 스케치를 할 때나 중요했고, 드로잉은 유화 또는 조각을 위한 연습일 뿐이었습니다.
이 그림에서 선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람과 검은 배경이 있습니다. 그 경계가 있지만 선은 아닙니다. 아기의 뽀얀 살덩어리는 있지만 선은 없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이런 그림이 나옵니다.
왼쪽 그림은 극단적으로 선으로만 그렸습니다. 오른쪽 그림은 좀 더 잘 그린 그림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위의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그림과 비교하면 선이 도드라집니다. 입술의 선, 식물 줄기의 선, 귀의 묘사에 선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선을 그리고 색을 채워 넣은 것 같습니다. 서양 미술이 이렇게나 변할 수 있던 것은 아마도 일본 미술의 영향인 것 같습니다. 일본이 서양과 본격적인 교류를 시작하면서 수많은 일본 미술 작품이 흘러 들어가고, 이는 서양의 화가들에게 큰 충격을 줍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선으로 묘사하며, 명암이나 시점 같은 건 무시한 채 단색으로 채워 넣거나, 배경이 아예 없고, 형태감도 이상합니다. 즉 고전주의에 빠져 완벽에 가까운 그림을 그리던 사람들이 이런 그림을 난생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은 정말 말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잘은 모르지만 그 반응은 두 가지였겠습니다. ‘이게 그림이냐’와 ‘이렇게도 그릴 수 있구나’입니다. 둘 모두 역사에 이름을 남겼겠지만, 미술사 책에서 더 깊이 다루는 쪽은 후자였습니다. (지금은 선에 집중하고 있지만 색감과 패턴, 주제, 구도 모든 면에서 서양 미술에 우키요에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선으로 형태 따고 페인트툴로 채워버리는 애니메이션도 흔하고, 정말 ‘나도 그리겠다’ 싶은 명작이 넘쳐나는 시대이니 선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중떼기로 미술을 배웠던 시절, 선의 맛을 몰랐습니다.
무협지를 보면 가끔 이런 말이 나옵니다. 검을 뽑는 동작만 봐도 어느 경지의 고수인지 알 수 있다. 검을 한 번 휘두르는 동작 만으로도 무릎을 꿇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미술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저만 쓰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선 하나 쓰는 것만 봐도 잘 그리는지 알 수 있다.’ 똑같이 나뭇잎을 그린다고 했을 때, 똑같이 나뭇잎 모양으로 선을 그어도 고수와 초보의 차이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게 참 묘하고 희한합니다. 그림을 많이 보다 보면 차이를 분명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냥 연필 잡고 선을 지익 그려도 느낌이 살아 있습니다.
왼쪽 그림과 오른쪽 그림 모두 참 잘 그렸습니다. 그런데 왼쪽보다는 오른쪽에 훨씬 끌립니다. 왼쪽 그림은 참 잘 그리는데, 잘 그렸구나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예쁘고 똑같게 잘 그리려고 노력했고, 성공했구나 하고 맙니다.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오른쪽 그림은 뭔가 대충 그린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린 사람의 개성이랄지, 선 하나하나의 느낌이 살아 있습니다. 머릿결이나 옷의 천이나, 눈코입을 그릴 때의 자신감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어느 쪽에 더 끌리냐 하면 저는 단연 오른쪽입니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왼쪽 그림을 한 달 후 보여준다면 저는 전혀 기억을 못할 겁니다. 이런 걸 봤었나? 할 겁니다. 그런데 오른쪽 그림을 보여주면 이거 봤는데? 하며 떠오를 겁니다. 기억에 남는 그림, 기억에 남을 인상이 그림에 담기는 것입니다.
좋은 선을 볼 때 이런 느낌을 받습니다. 하나의 선을 긋더라도 그리는 모든 순간순간마다의 자각이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저 여기서 저기로 잇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정도의 곡률로 어떤 형태를 위해 그리는 것이 아니라 선이 만들어지는 모든 순간에 정신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무림에 화경, 현경의 경지가 있다면 미술에는 이런 경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입니다. 삐뚤빼뚤, 제멋대로 막 쓴 것 같습니다. 선에 대한 생각을 하고 나서 새롭게 본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서예입니다.
서예는 서양 미술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습니다. 서양 미술에서는 메시지를 위해 장면을 담았습니다. 그리고 상징물 몇 가지를 뒀습니다. 즉 메시지를 위해 특정 신화 속 내용을 가져 오는 식이었습니다. 서예는 메시지가 전면에 드러납니다. 바로 글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합니다. 글을 읽을 수 있으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있습니다. 또 시라면 조금 더 함축적인 의미가 담깁니다.
아무튼 글을 통해 먼저 전하고자 하는 바를 담고, 이를 쓰는 방식을 통해 미적인 가치를 만들어냅니다. 글씨체라고 하지만 단순히 글을 쓰는 방식이 아니라 글자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 됩니다. 그러니까 형태적으로 보면 선으로만 이루어진 미술입니다.
자연히 선을 보게 됩니다. 서예를 감상하는 방법은 글에 담긴 내용과 함께 글씨에 담긴 미학을 느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욱 감상이 어렵습니다. 막말로 그냥 글을 쓴 것일 뿐인데 어떻게 그것을 즐길 수 있습니까.
다만 선이 그어진 흐름을 하나하나 느끼는 것입니다. 리듬과 흐름에 몸을 실어… 글과 함께 그 선을 즐기는 것입니다. 드로잉 작품을 감상하듯, 서예도 감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작품 감상의 폭이 훨씬 넓어지고, 세상에 재밌는 게 너무 많아!가 가능합니다. 그럴 필요가 있느냐면… 재미없는 것보다 재미있는 것이 더 좋지 않겠냐는 생각입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며 흐름을 느끼고, 전체적인 구성을 한 번 보고, 내용을 음미하는 것입니다. 드로잉 작품을 봤을 때 어디서부터 어떻게 봐야할지 모르겠는 것에 비하면 조금 더 낫지 않나 싶습니다.
이렇게 서예 작품을 보며 추사 김정희의 작품을 먼저 꺼낸 이유가 있습니다. 자유분방함입니다. 위의 두 글씨도 충분히 자유분방하다 느낄 수 있지만 김정희의 글씨는 또 다른 느낌입니다. 강한 확신과 함께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획 하나하나마다 변화무쌍합니다. 즉 글자 하나를 써넣는다는 생각이 아니라 획 하나를 그릴 때, 그 순간 자체를 즐긴 것 같습니다.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상태입니다. 잘 써야겠다는 생각도, 멋있게 보여야겠다는 생각도 없어 보입니다. 그저 글씨를 쓸 때, 한 획을 그을 때마다 벅차오르는 자기의 흥분이 그대로 담긴 듯합니다. 이것이 감상자에게도 그대로 전해집니다.
인상이 기억에 남는, 분명한 느낌을 전하는 선은 자유분방함에서 나온다 생각합니다. 자유분방함은 모든 것을 잊고, 모든 것에서 해방된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머릿속에, 마음속에 어떤 구속도 없이 지금의 상태를 온전히 만끽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어린 아이의 상태입니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눈에 띄는 모든 것이 그저 신기하고 즐겁기만 합니다. 매순간이, 지금 있는 내 자신의 느낌이 최고입니다.
주황색이 있으면 오렌지나 에르메스 같은 것을 연상하지 않고, 주황색 그대로를 만끽합니다. 주황색은 주황색이라서 인상이 남습니다. 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선일 뿐이지만 그 선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즐길거리가 있고, 기억에 남을 인상이 담깁니다. 그 선의 형태가 얼마나 고르고 예쁜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 고르고 예쁜 선을 그릴 수는 있지만, 그것이 목표는 아닙니다.
선은 모든 것의 기본이라고 하며 시작했습니다. 선에서부터 자유로워지면 색, 형태, 구성 모든 것에서도 자유를 만끽하는 것 같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앙리 마티스입니다. 흔히 야수파로 분류하고, 거침없는 색채와 형태, 리듬감 있는 작품으로 유명하지만 그런 게 뭐 중요하겠습니까. 고루한 미술사가들이나 연구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사람은 말년에 붓을 들 힘이 없어지자 색종이를 오려서 작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무슨 어린 아이들이 유치원 공작 시간에 한 것 같은 작품이 나왔습니다. 사람이긴 한데 팔다리가 이상하고 오른쪽은 꽃병인지 펜 보관함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즉 감상자 또한 얽매이면 감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사람인지 아닌지, 꽃병인지 요강인지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사람처럼 보이면 사람이구나 하면 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저 리듬감과 형태, 그리고 색을 느끼면 그걸로 된 것 같습니다. 마치 원시인이 번쩍이는 번개를 보고 두려워하고, 화사한 꽃을 보고 활짝 웃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색의 구성이나 형태가 꽤 괜찮습니다. 하나하나 뜯어 보기는 좀 그렇습니다. 아무튼 보기에 좋습니다. 보기에 좋았더라… 하는 겁니다. 붓으로 그리든 색종이를 자르든, 그게 뭐가 중요하냐 이말입니다.
사실은 엄청난 연습과 모든 것을 익힌 후에야 이것이 가능한 것 같습니다. 선 하나가 만들어내는 존재감, 자투리까지 채워 넣는 공간감이 있습니다. 색의 배치와 선이 파고드는 것. 본능적인 ‘이건 별로고 이건 재밌다’라는 느낌이 있겠습니다. 그림을 학문으로 접근하는 사람은 느끼기 어려운 종류의 것입니다. 이것이 어린 아이의 그림이 작품이 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또 애매한 작가와 대가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애매한 작가들은 애매합니다. 벗어난 것도 아닌데 벗어난 것처럼 그립니다. 이것 같기도 한데 저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 그림을 보면 한 달쯤 지나면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물론 제가 함부로 이야기 할 수는 없겠습니다. 모두가 생존의 위기를 겪으며 처절하게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함부로 까내릴 수는 없지만, 이왕 할 거면 확실하게 과격하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보면 그런 작업들이 인정 받는 것 같습니다. 언제나 한 번 더 나아간 사람들의 작업이 재미있습니다.
어쨌든, 선에서 느낀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사진처럼 똑같이 그리는 건 누구나 시간만 있으면 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선을 그리는 건 다른 문제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