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진 Dec 03. 2019

2. 나는 언제든 약자가 될 수 있어

저녁 6시의 노란 조끼

노란 조끼를 주는 손이 탐탁지 않았다. 하지만 속마음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억지로 조끼를 겉옷 위에 걸치고 전단지를 받았다. 저녁 6시의 번화가는 수많은 인파로 가득했다.

적당한 길목을 찾아보다 횡단보도 앞에 자리를 잡았다. 어스름이 내리자, 노란 조끼는 더욱 눈에 띄었다.

신호를 기다리는 행인 한 명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웃음으로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고 싶었다.


”‘416 생명안전공원’을 아세요?”

행인의 눈빛에 일순간 경계심이 서렸다. 서둘러 전단지를 내밀었다.

처음은 아무렇지 않았다. 그때는 몰랐다. 노란 조끼를 입은 1시간으로 모든 게 바뀔 줄은.


간호학과에서는 3, 4학년 동안  다양한 영역의 현장 실습을 나간다.

2017년 5월, 안산의 어느 정신보건센터에 방문하게 된 계기도 실습 대상자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답답한 병원 실습에서 벗어날 수 있어 들뜬상태였지만, 마음이 무겁기도 했다.

나는 간호실습생이기 전에, 세월호 참사를 목격한 한 사람의 국민이었다.

2014년 4월, 나는 뉴스를 보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갓 스무 살이 되어 캠퍼스의 낭만에 취했던 시절이었다.

세월호 3주기가 되어서야 안산으로 간다고 생각하니, 그때의 텁텁하고 미안했던 감정이 되살아났다.

‘지금 와서 뭘 어쩌겠다고’하는 냉소도 반쯤 섞여 있었다.


참사 이후, 언론과 미디어는 세월호 참사와 유가족에게 앞다투어 자극적인 프레임을 씌웠다.

‘투쟁’, ‘분노’, 그리고 궁극에는 ‘지겹게 헤쳐먹는다’는 ‘탐욕’의 프레임까지 완성했다.

하지만 실제로 만난 세월호 유가족은 어떤 하나의 프레임에 갇힐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남들처럼 열심히 살아가는 평범한 이웃이고,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들이었다.

타지 사람이 오면 자신들만 아는 소문난 맛집을 찾아가 대접하고,

자식 자랑을 늘어놓다 일순간 겸연쩍게 웃기도 하는 사람들이었다.


노란 조끼를 입고 전단지를 돌리게 된 것은 예전의 미안한 감정과 인간적인 호감 때문이었다.

의료인으로서 대상자와 ‘라포(rapport: 의사소통에서 상대방과 형성되는 친밀감 또는 신뢰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책임감도 작용했다.

그리고 노란 조끼를 입는 순간 알게 되었다. 세상이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방식에 대해서.


방탄조끼는 총의 탄알을 막아 심장과 복부의 장기를 보호한다. 구명조끼는 물에 빠져도 몸을 뜰 수 있게 함으로써 체온을 유지하고 호흡을 가능하게 한다. 안전 조끼는 위험한 작업 환경에 있는 노동자를 사고와 장애로부터 보호한다. 이중 어디에도 노란 조끼는 속하지 못했다.


“그놈의 세월호! 세월호!”


한 무리의 남자들이 내 옆의 가판대를 발로 차며 욕을 했다.

‘416 생명안전공원’을 홍보하는 전단지는 유가족들의 눈앞에서 버려지거나 찢어졌다.

노란 조끼를 입고 있기 때문에,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에 나는 폭력적 위협을 당해도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

여성이자, 대학생으로서 내가 보호받던 사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노란 조끼를 입은 지, 단 십 분 만의 일이었다. 낄낄대며 횡단보도를 가로지르는 그들이 괴물처럼 보였다.

이 조끼를 3년이나 입은 유가족들에게 묻고 싶었다. 당신들은 어떻게 여전히 사람으로 있을 수 있냐고.


그 후로 나는 언제, 어디서든 내가 사회적 약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산다.

부당한 권력에 의해 직장에서 쫓겨날 수도 있고, 위험한 작업을 하다가 사고나 장해를 입을 수도 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사람들로 인해 소중한 가족을 잃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은 세상을 살아가며 또 다른 약자들과 연대하는 일을 두렵지 않게 만든다.

혼자 밥을 먹고 영화를 보는 일처럼 혼자 추모문화제에 참석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

그러니까 내가 살아서 글을 쓰고, 돈을 버는 원동력은 결국 희망과 위로로 표현되는 아주 단순한 마음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예쁘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다. 나는 여기에 ‘실제로 보아야 예쁘다’라는 구절을 덧붙이고 싶다.

얼굴도 모르는 연예인에게 서슴 없는 악플을 던지고, 그걸 조용히 방관하는 세상이다.

정치인도 아닌 평범한 엄마와 아빠가 법을 바꾸기 위해 카메라 앞에 서는 세상이다.

세월호 유가족의 노란 조끼를 입으면서 진실은 실제로 보아야만 발견할 수 있는 것임을 알았다.


네가 아는 게 틀렸다고 말할 수도 있다. 네가 모르는 게  더 많다고 말할 수도 있다.

결국은 너도 비겁한 어른으로 살아가다 죽을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맞는 말이다.

그래도 말만 하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는 말을 지지리도 안 듣는 사람이 되는 게 나으니까, 이렇게 사는 거다.

선량한 유유상종이 악을 이기는 사회를, 여전히 믿고 기다리고 지켜주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1. 네가 나의 도착점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