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반라이크 42호 '책 만드는 곳, 출판사'를 읽으며
출판사와 전원주택에는 공통의 오해가 있다. 사람들이 이 분야를 만만하게 보고 있고, (그래서인지 모르겠으나) 은퇴 후 고려하는 아이템 중 하나라는 점이다. 실제로 “은퇴하면 1인 출판사나 차리려고요”, “나중에 번잡한 도시를 떠나 조용한 전원주택에서 살고 싶어요”라는 말을 듣곤 한다.
오해라고 말한 이유가 있다. 둘 다 결코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가령 교외의 전원주택은 도시의 아파트나 빌라보다 훨씬 손이 많이 간다. 관리인이나 미화원이 알게 모르게 해온 건물 유지보수, 쓰레기 분리배출, 청소, 화단 가꾸기 등을 집주인이 처리해야 한다고 보면 된다. 특정 가족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건축가가 맞춤식으로 설계한 집이라면 나중에 팔 때 애먹을 가능성도 높다. 맞춤양복보다 기성복이 더 잘 팔리는 원리와 같다. 그래서 부동산 업계 관계자들은 전원주택에서 살아보고 싶다면 젊을 때 월세로 우선 살아보라고 권한다.
출판사도 젊을 때 경험하는 게 낫다. 그래야 내가 이 산업을 마음에 들어 하는지, 이 산업도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지 빠르게 판단할 수 있다. 출판은 여전히 로우테크 산업이고 다른 업계보다 연봉도 낮은 편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만 배우고 쌓을 수 있는 기술이 있다. 그러니 콘텐츠와 관련된 일을 오래도록 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특히 출판 창업까지 고려 중이라면 몇 년 정도 수련한다는 생각으로 출판사에서 일해보는 걸 권한다. 기왕이면 에너지가 건강할 적에, 잘 배울 수 있는 곳으로.
앞서 오해를 언급한 것처럼, 나도 그런 오해를 한 적이 있다. 기획부터 편집, 교정교열까지 할 줄 아니까 적은 자본으로 1인 출판사 하나쯤은 운영할 수 있겠다는 막연한 생각. 전 직장에서 임프린트를 만들고, 2년 동안 (잡지를 제외하고) 대략 7권의 단행본을 만들면서 그 생각은 접었다. 나름의 인지도와 현금이 있는 회사에서도 책을 만들고 파는 일이 어려운데, 그걸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겠구나 싶었다.
몇 가지 숫자도 발목을 잡았다. 누가 출판을 소자본 창업이라 했을까. 출판 역시 자본집약적 산업이다.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마찬가지로 초판 제작 비용이 높다. 물론 손익분기점을 넘기기만 하면, 이후 수익을 모두 취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초판 1쇄 다 팔기가 쉽지 않다. 초판을 다 팔기 위한 비용이 더 나갈 수도 있다. 자본을 갖춘 어느 메이저 출판사는 신간 하나를 전략적으로 띄우기 위해 서점 마케팅으로만 5천만 원에서 1억 원까지 쓴다.
책을 파는 비용은 점점 올라가는 데 비해, 도서정가제 등의 부작용으로 책 가격을 올리기 쉽지 않은 것도 문제다. 통계청의 소비자 물가조사 및 2020년 출판시장 통계에 따르면, 지난 2015년부터 2020년까지 전체 소비자 물가가 5.4% 증가한 데 비해 책값은 3.2% 상승에 그쳤다. 심지어 작년 서적류의 물가지수는 감소했다. 즉, 물가는 오르는데, 책값은 오히려 할인되고 있다는 의미.
출판업에는 이런 구조적 문제가 있지만, 나는 어릴 적부터 책에서 가장 많은 영감을 받았고, 지금도 책을 사랑한다. 내가 출판업에 뛰어들지 않은 결정적인 이유는 어쩌면 그만큼의 열정이나 자신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위에 나열한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업계에는 책을 만들고 파는 데 순수한 즐거움을 누리고 이 일에 미쳐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즐기는 사람들과 나는 싸울 자신이 없었다. 항복을 선언하고 대신 기꺼이 독자가 되었다.
어반라이크 42호는 출판사를 다룬다. 이들은 출판사를 ‘종이’라는 물성에 콘텐츠를 담아 ‘책’으로 비즈니스 하는 곳으로 규정했다. 그 정의에 동의한다. 종이, 콘텐츠, 책, 비즈니스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이 책에서 얻을 점이 충분하다.
이번 호 설문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는데, 지면상 모두 실리진 못했다. 그 사정을 편집장이 종이에 담아 양해를 구하기도 했다. 이처럼 출판에는 여전히 낭만이 있다. 이 산업은 그 어떤 숫자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인상 깊게 읽은 부분과 (지난 4월 하순에 응답한) 설문 내용은 아래에 적었다. 책에 실린 사람뿐 아니라, 출판과 관계된 모든 사람들을 응원한다. 다들 정당한 대가와 건강은 챙겨가며 일합시다.
"결국은 '기획력'이 아닐까 싶어요. 인간적인 관계가 기본이 되면, 일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데요. 어느 정도 저자와 친분을 갖는 것도 필요하지만, 편집자가 작가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획을 제안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요." (마음산책 정은숙 대표 인터뷰 중, p.23)
"과거에는 출판 분야가 수직적인 구조로 책을 만들었다면, 이제는 독자들의 반응을 즉각적으로 파악하고 적용하는 수평적인 관계로 바뀌고 있습니다. 간혹 이러한 흐름이 저자와 독자만 남아야 하는가 의구심이 들 때도 있지만 출판사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고 생각해요. 당대의 독자가 읽고 싶어 하는 글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작가에게 제안하는 것이 출판사의 역할이니까요. 시장을 읽어 소재를 발굴하고, 작가와 독자에게 제안할 수 있는 '기획력'을 키우는 일이야말로 이 시대 편집자에게 필요한 에디터십이 아닐까 싶어요." (마음산책 정은숙 대표 인터뷰 중, p.29)
"출판계에 여성 편집자의 비율은 85%인 반면, 이 중에서 10% 정도만이 창업한다고 해요. 출판사를 차리는 건 남성 편집자에 비해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중략) 출판 창업은 돈으로 하는 게 아니라, 원고로 한다고 말하곤 하는데요. 창업하겠다고 마음먹고, 원고를 받을 수 있는 저자들을 섭외해, 약속하는 등의 구체화 작업 후 창업해도 늦지 않아요.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분야의 저자들을 만나면서 부딪혀 보세요. 책을 만드는 건 그다음 문제예요. 창업을 꼭 할 필요는 없지만,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면 나는 이 정도로 만족한다는 한계를 짓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마음산책 정은숙 대표 인터뷰 중, p.33)
"특정 순간이 있었다기보다는 늘 잔잔하게 좋았어요. 책은 많은 사람이 동시에 작업해서 만들어지는 결정체이잖아요. 대표로서 하나의 판을 짜고, 잘하는 사람들을 모으고, 책을 만들기까지의 전 과정에서 얻는 희열이 있거든요. 매우 드문 경험인 건 확실해요." (읻다 김현우 대표 인터뷰 중, p.150)
"다수의 클래식 작품이 가진 긴 호흡은 섬세하게 잘 직조해 만들어진 큼직한 원단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하나하나가 모여 완성된 실체를 느끼는 순간, 극한의 감동이 주어지죠. 그래서 때때로 감상자의 인내심이 필요하기도 하지만요." (프란츠 김동연 대표, p.157)
"책은 보이는 것과 읽히는 것, 보이지 않는 물성들까지 조화를 이뤄야 해요. (...) 독립출판은 소수의 목소리가 발화할 수 있는 방식 중 하나예요. 개인의 목소리가 당위성을 갖고서 누군가를 설득할 수 있고, 존재로서 기록이 된다는 데서 의미가 있죠. 또 개인에 의한 출판이기 때문에 콘텐츠나 디자인에 대한 실험도 자유롭고 과감할 수 있고요." (6699press 이재영 대표, p.174)
"저는 늘 수신자를 알 수 없는 편지를 쓰는 사람입니다. 때문에 답장은 기대하지 않아요. SNS나 리뷰로 누군가에게 편지가 닿았다는 걸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기쁩니다. (...) 그저 편지를 썼을 뿐인데, 그저 책을 만들었을 뿐인데 이렇게 과분하게 받아도 되는 걸까. 그러면서도 덥석 그 마음들을 두 손 가득 받아 들고서는 제 안으로 가져와 차곡차곡 쌓아두곤 했습니다." (김보희 편집자 에세이 중, p.222)
"제목이나 저자에 이끌려 구매한 한 권의 책을 아주 재밌게 읽었다면, 출판사를 봐 두는 게 좋다. 본인을 만족하게 할 다른 책을 기획하고 편집하고 있을 테니까. 한 곳의 출판사 행보만 잘 알아도 절로 한 방향으로 깊어질 수 있다. (...) 출판사를 만들면서 각 출판사가 지향하는 바를 살피게 되었다. 그리고 작은 출판사를 만들수록 더 뾰족한 방향을 갖고 움직여야 시장에서 돋보인다는 것을 공급자의 입장에서 알게 되었다." (글월 문주희 대표 에세이 중, p.227)
"여전히 책을 파는 일은 만드는 일보다 몇 배는 어렵다. 기라성 같은 출판사들의 책이 꽉꽉 들어찬 서점 매대 사이, 이상하게 생긴 작고 귀여운 형광색 책 한 권이 보인다. 언제 저 신간 매대에서 내려와야 할지 불안불안 하다." (900KM 이혜민 대표 에세이 중, p.236)
평소 좋아하는 출판사를 추천해주세요.
국내: 열린책들, 미메시스, 문학과지성사, 북스톤, 어크로스, 항해, 유유, 문학동네, 알마, 창비, 민음사, 안그라픽스, 워크룸, 왓어북, 브로드컬리 / 국외: Penguin Books(Penguin Random House), Phaidon, Rizzoli, The MIT Press, Birkhäuser Architecture, Hatje Cantz, Gestalten
소장하고 있는 책들 중 어느 출판사 책이 가장 많나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특정 출판사 책이 압도적으로 많은 건 아닙니다만, 서재를 보니 미메시스의 그래픽 노블 시리즈, 북스톤, 어크로스, 항해 출판사의 책들이 주로 많네요. 각각의 출판사에 지인이 있어서, 직접 산 책도 있고 받은 책들도 있습니다. 가장 종수가 많은 곳은 사실 비미디어컴퍼니인데요. 이곳과 2013년부터 연을 맺었기 때문에 매거진 B, F, 임프린트인 ‘레퍼런스 바이 비(REFERENCE by B)’에서 출간한 ‘잡스(JOBS)’ 시리즈 등 거의 모든 책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대략 90종)
최근 구입한 책은 무엇인가요? 어떤 이유로 구입하게 되었나요?
<문 앞의 야만인들>, <인간의 내밀한 역사>, <시모어 번스타인의 말>, <스토너> 이렇게 네 권입니다. 누군가의 추천을 통해 전부터 사려고 했던 책들이에요. 공통점을 꼽으라면, 인간의 다중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겠네요.
만약 자신이 출판사를 만든다면 어떤 장르나 특징을 가진 출판사를 만들고 싶나요?
각자의 생애주기에 필요한 그림책을 제공하는 출판사를 막연히 상상해보고 있어요. 한창 꿈을 탐색할 초등학교 저학년이나, 새로운 꿈을 필요로 하는 직장인 모두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그림책이면 좋겠습니다.
자신이 구입한 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무엇인가요?
폴 오스터의 <우연의 음악>. 고등학생 때 이 소설을 처음 접한 뒤, 폴 오스터의 작품 세계에 본격적으로 빠진 기억이 나요. 흡입력 있는 전개와 ‘우연’이 가진 힘을 묘사한 장면들이 인상적이어서 아직까지도 여운이 남아요.
책을 구입하는 곳은 어디인가요?
교보문고 온라인 또는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가장 자주 사고 있어요. 특별한 이유는 있는 건 아니지만, 접근성이 좋고 가장 상품군이 많다고 생각해서 이곳에서 사는 것 같아요. 그 외에 지인들이 독립 출판을 할 경우, 텀블벅 후원을 통해 사기도 하고 여행 중 독립 서점에 들를 때 적어도 한 권씩 사려고 해요. (예: 부산 영도의 손목서가)
책을 고르는 기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1. 나의 세계를 확장시켜줄 수 있는 책인가 (SF, 과학, 철학, 소설 관련)
2. 현재 속한 산업, 직무에 도움이 되는 책인가 (주로 자기계발, 경제/경영, 금융, 비즈니스)
3. 현재 내 생애주기에 도움이 되는 책인가 (결혼, 육아 관련)
4. 주변 사람들이 강력하게 추천하는 책인가
5. 꼭 읽고 싶은 주제의 소설인가
나의 인생책 세 권을 소개해주세요.
파트리크 쥐스킨트, <좀머 씨 이야기> (열린책들) - 처음 읽은 건 초등학생 때로 기억해요. 짧은 분량의 동화이지만, 장 자끄 상뻬의 그림과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글이 빚어낸 동화 속 세계를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종종 곱씹곤 합니다.
로버트 메이너드 피어시그,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문학과지성사) - 2015년 모터사이클 여행을 떠날 때 가져갔던 책 중 하나. 과거 정신병 이력을 화자와 정신병 초기 증세를 보이고 있는 아들과 17일 동안 모터사이클 여행을 떠난 내용과 자전적 이야기가 교차 편집된 책으로,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에 대해 대안적인 삶의 태도로 답하고 있습니다.
법정스님, <일기일회> (문학의숲) - 지난 2003년부터 2009년까지 법정스님이 진행한 법문 일부를 엮은 책. 역시 모터사이클 여행 때 가져갔던 책이에요. 글 한 편을 조금씩 아껴 읽으며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는 데 큰 도움을 얻은 책입니다. 비록 절판된 책이지만 중고로 종종 구할 수 있더군요.
평소 즐겨 읽는 장르는 무엇인가요?
에세이, 인문사회, 경제경영, 사회과학
요즘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는 무엇인가요?
지난 4월 초 막 딸이 태어나, (당시) 이름도 정해지지 않은 신생아와 매일 새벽마다 고군분투 중입니다. 모든 관심사가 ‘어떻게 하면 이 아이를 잘 키울(재울) 수 있을까’로 쏠리다 보니 앞서 이 고생을 겪은 부모들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나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육아서 쪽으로 자연히 시선이 가고 있습니다. 그 외 업무적으로 금융시장을 엿볼 일이 많아서 경제나 재테크 분야에도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책을 읽을 때 나만의 BGM으로 선택하고 싶은 음악은 무엇인가요?
호주 출신의 루크 하워드(Luke Howard)가 작곡한 앨범 <The Sand That Ate the Sea>. 동명의 영화 사운드트랙으로 유튜브뮤직, 애플뮤직, 스포티파이, 밴드캠프 등에서도 들으실 수 있습니다. 루크 하워드의 다른 앨범들이나 ECM 레이블에서 나온 다양한 CD들이 주로 책 읽기에 적당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