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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한극장옆골목 May 05. 2021

디지털 서재는 뭔가 허전하다

나는 어려서부터 책이 좋았다. 나가서 뛰어노는 대신 집에서 책을 읽는게 좋았다. 책을 읽는 것도 좋았지만, 책 그 자체가 좋았다. 그러다가 대학생 시절 공부하면서 돈이 필요해 집에 있는 책을 하나둘씩 가져다 팔았다. 다행히 바로 취업을 했고, 그 이후부터 내가 번 돈으로 책을 모으기 시작했다. 신입사원 때는 책을 모으는 방법에 대해서 프레젠테이션을 하기도 했고, 고전을 읽고 토론하는 사내 동호회를 하기도 했다. 주말이면 배낭에 책을 10권씩 담아 카페로 가는 것이 취미였다. 한 권을 읽다가 집중력이 떨어지면 다른 분야의 책으로 바꿔 읽는 것을 반복하는 식이었다. 요즘엔 책을 읽는 것보다 책 쇼핑을 더 좋아하는 것 같긴 하지만.


서울대입구 모텔촌 원룸에 살던 시절. 혼자 사는 살림에 책만 점점 많아지자 관리가 안 됐다. 나 누울 자리도 부족한 곳이었으니까. 이걸 어떻게 처리할까 하다가, 전자책이 생각났다. 그래서 종이책의 심을 자르고 스캔을 떠서 PDF 파일로 변환했다. 두꺼운 책, 오래된 책, 권수가 많은 전집은 스캔을 떠놓으니 보기도 편하고 보관하기도 좋았다. 가지고 있는 책 대부분을 디지털로 옮긴 후, 새로 구입하는 책은 전부 리디북스를 통해 전자책으로 구입했다. 전자책이라고 해서 종이책보다 특별히 저렴한 건 아니었지만, 할인 이벤트도 자주 하고 쿠폰도 많이 뿌리는 편이라 꽤 경제적이었다.


그렇게 종이책 대신 전자책이 점점 쌓였다. 전자책 중에 찾는 책이 없을 때는 종이책으로 구입한 후에 스캔을 떴다. 전자책은 너무나 편리했다. 아이폰과 아이패드로 언제 어디서든 내가 원하는 책을 볼 수 있었다. 몇 페이지까지 봤는지 항상 동기화가 되어 이어볼 수 있었다. 종이책과 달리 반듯하게 형광펜으로 줄을 그을 수 있었다. 필요하면 쉽게 수정이 가능했다. 책이 상하지 않고도 메모를 남길 수 있었고, 메모만 따로 모아서 볼 수도 있었다. 종이책은 목차가 전부지만, 전자책은 검색으로 원하는 내용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전자책은 내 독서 경험을 엄청나게 바꿔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종이책이 필요하다. 전자책은 너무 편리했지만 종이책의 장점을 이길 수가 없었다. 책장에 꽂혀있는 책이 주는 영감. 손에 만질 수 있는 형체. 책장에서 뽑아들었을 때의 무게. 두 손가락으로 페이지를 잡았을 때 느껴지는 종이의 질감.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 그리고 종이의 냄새. 전자책은 책의 내용 외에 별다른 영감을 주지 못했다. 디지털 서재에는 책이 쌓여갔지만, 내 방 책장처럼 무언가 채워지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럼 어쩌지. 나는 절충안을 생각해냈다. 출퇴근을 하면서 언제든 전자책을 읽고 메모를 한다. 그리고 정말 마음에 드는 책은 종이책으로 사서 책장에 꽂아두기로.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책들로 책장을 다시 채워나가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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