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위치, 랜드마크
글을 써야겠다! 하고 책상에 앉으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무슨 말부터 써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글재주가 없나보다. 글을 쓰더라도 얼마 가지 않아 펜을 놓아버리게 된다. 나는 끈기도 없나보다.
처음 가보는 지역에서 길을 찾는다고 하자. 지도에 표기된 주요 건물을 보고 그 건물을 현실에서 찾아 내 현재 위치를 파악한다. 길을 걷는 내내 자신의 위치가 지도에 표기된 랜드마크와 일관되는지를 지속적으로 파악한다. 지도를 보고 길을 찾는데는 그래서 세 가지가 필요하다. 모든 정보가 질서정연하게 기록된 정답 (지도), 현실의 혼란스러운 상황 (내 위치), 둘을 일관되게 잇는 통로 (랜드마크)다.
1. 전체 구조 (지도)
2. 현재 지점 (내 위치)
3. 주요 건물 (랜드마크)
글을 적는다고 하자. 빈 화면에서 시작해 완성하기까지는 열 손가락으로 먼 길을 걸어야 한다. 아무 말이나 한두문장을 적고 끝내는 건 어렵지 않지만 글이 길어진다면 도중에 쉽게 길을 잃는다. 긴 글을 쓸 때는 그래서 목차 (지도)가 필요하다. 중간 길이의 글을 쓴다면 최소한 짦은 개념어 (랜드마크) 몇 가지를 군데군데 적어둘 필요가 있다. 모니터 화면에서 커서가 깜빡이는 지점이 내 위치다. 세 가지 (지도, 내 위치, 랜드마크)가 가리키는 바가 일관적으로 이해되는 한 길을 잃지 않는다. 그 상태를 유지하면서 글을 적는다 (=길을 걷는다). 길을 잃을듯 혼란스러울 때마다 랜드마크를 찾는다. 긴 글을 일관되게 작성하는 방법이다. 글쓰기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프로그래밍이나 음악 연주 등 결과물의 크기가 사람의 기억용량을 넘어가는 모든 창작활동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이다.
사람의 기억은 작업기억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으로 구분한다. 장기기억의 용량은 무한에 가까우나 인위적으로 접근할 수 없고, 항상 작업기억이라는 작은 창문을 통해 접근한다. 작업기억에는 한 번에 5~7단어 분량의 정보를 저장할 수 있다. 이만큼이 사람이 한꺼번에 인식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다. 장기기억 안의 어떤 개념이든 일단 이 작업기억에 올라온 후에야 손끝으로 나온다. 작업기억 안의 개념들은 일종의 랜드마크인 셈이다. 지금 당장 떠오르는 단어 5~7가지 단어를 유기적으로 연결해 문장을 작성하고 나면 작업기억에 빈 자리가 생기고, 그 빈 자리는 방금 작성한 단어와 유관한 개념들로 장기기억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채워진다. 가까운 위치의 랜드마크 몇 개를 꾸준히 이어가며 먼 길을 걷는 것과 같다.
공부를 하든 글을 쓰든 사람은 당장 머릿속에 들어있는 5~7개의 단어만 가지고 작업을 한다. 그 단어를 다 사용하면 빈 공간이 자연스럽게 채워진다. 땅 밖으로 삐져나온 고구마 줄기 하나를 뽑을 때 나머지 뿌리가 끌려나오는 것과 같다. 사람이 한 번에 기억할 수 있는 용량은 아주 작게 제한되어있지만 유관 개념이 줄줄이 뽑혀 나오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으로 큰 작품을 완성할 수가 있다. 확실하게 인식하는 사소한 것 몇 가지에 주의를 기울이기를 유지하면 결국에 큰 일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사람은 방금 자신이 창작한 글이라도 몇분 후에는 백지 위에 똑같이 반복해서 쓰지 못한다. 글 전체를 머릿속에 그대로 넣어놨다가 한꺼번에 방출하는 사람은 없다. 생각의 범위는 몇 단어, 길어야 한두 문장이 최대다. 글이 안 써지고 머릿속이 하얗게 되는 이유는 당장 작업기억 안에서 인식할 수 있는 몇 단어 분량의 정보에 주의를 기울이기보다 더 훌륭한 더 멋진, 더 긴, 그러나 자기도 그게 뭔지 모르는 결과가 손끝에서 나오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내 위치는 관심이 없으면서 세계지도를 살펴보는 셈이다. 당장 손가락을 움직여 한두단어를 제대로 적기보다 무엇이 더 좋아보이는지를 고민한다. 땅 밖으로 삐져나온 줄기는 손대지 않고, 얼마나 깊은지도 모르는 땅 속에 박힌 뿌리부터 한꺼번에 들어올리고 싶어한다는 말이다. 고구마줄기를 줄줄이 뽑듯 당장 인식할 수 있는 적은 양을 일단 제대로 풀어내는 공부를 한다면 어떨까.
먼 길을 떠날 때 길을 찾기 어렵다는 말은 내가 걷는 경로에서 질서를 유지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분량이 많아질수록 내용이 흐트러지고 일관성도 떨어진다. 사람의 작품활동은 머릿속에서 뒤엉킨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구축한 결과인데, 먼 길을 갈 때는 반드시 지도를 챙겨야 하듯 긴 글을 쓸 때도 반드시 목차가 필요하다. 혼돈 속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주의를 두는 곳은 언제나 커서 위치 앞뒤로 몇 단어 정도의 좁은 영역이다. 프로그래밍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프로그램의 전체 흐름을 정리해 지도 (다이어그램)를 그린다. 각각의 기능 단위마다 클래스 이름을 붙인다. (랜드마크). 커서위치 (내 위치)와 랜드마크, 그리고 지도가 서로 일관되는지를 지속적으로 체크한다. 그림을 그린다고 하자. 개략적인 스케치를 한다. (지도). 부분 부분을 완성한다 (랜드마크). 펜끝이 향하는 좁은 영역을 주의깊게 살핀다 (내 위치). 가만히 있다가 어느날 번쩍 장문의 글을 뽑아낼 수는 없다. 작은 메모들이 모여서 랜드마크를 만들고, 그 랜드마크끼리 이어진 짧은 길이 보이고, 짧은 그 길을 걷다 보면 멀리 떨어진 목적지까지 닿을 수 있다.
글감이 없어서 글을 못 쓰는 경우는 없다. 평소에 책은 안 읽더라도 지금껏 살아온 인생이 경험으로 있기 때문이다. 글을 못 쓰겠는 경우는 내가 거기다 작고 확실한 질서를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생각 (=내 위치)는 기본적으로 원시수프와 같은 혼돈의 영역이다. 거기다 질서를 부여하지 않는 한 그저 그 상태로 머무르게 된다. 랜드마크가 없으니 내가 지금 당장에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가야 할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질서 없이는 어떤 먼 곳에도 제대로 닿을 수 없다. 혼돈은 나의 고유한 영역, 창조의 원천이 되고 (내 위치), 거기에 질서 (지도)를 부여함으로 일관된 작품이 나온다. 혼돈과 질서의 경계는 불과 5~7단어 길이 정도의 짧은 창 (랜드마크)으로 연결된다. 그렇게 창의적이면서 일관된 창작물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글이든, 그림이든, 음악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