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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위의청년학교 Dec 09. 2021

내가 길 위에 서게 된 이유

길 위의 청년학교 김소현

"길 위의 청년학교"는 사회변화를 꿈꾸는 청년들이 모여있는 플랫폼입니다. 청소년을 중심으로 사회를 혁신하고자 하는 '청년'으로서 지역에 살아가고자 합니다. 함께 연대하고 학습하는 18명의 청년들이 길 위에서 꿈꾸는 변화를 연재합니다.

  인생을 사는 것은 길 위를 걷는 것과 같다. 우리는 당장 앞에 어떤 장애물이 있는지도 모르는 채 길을 걷고, 당장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인생을 산다. 길의 끝을 보고 온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 길의 끝을 아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이 인생의 끝을 내다본 사람이 없기에 인생의 끝을 아는 사람도 없다.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을 살고 어려운 길을 걷고 있기에 우리는 ‘함께’를 외치며 서로 도우며 살아간다.

 

 내가 가는 길은 누구도 끝을 알 수 없기에 어렵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길을 걸었던 사람의 경험을 참고해 어려움을 덜어내고는 한다. 나에게는 그런 경험을 나누어준 사람들이 있다. 내가 가고 있는 길의 끝, 목표지가 어디인지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내가 길을 잃지 않도록 길을 함께 걸어준 사람도 있다. 경험을 나누어 끝을 알려주기는 쉽지만, 가는 길을 안내하며 함께 걸어가 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정말 감사하게도 그런 사람들과 함께 살아왔다. 지금도 인생이라는 먼 길을 걸으며 ‘길 위의 청년학교’라는 친구를 만나 목적지를 향해 걷고 있다. 길 위의 청년학교에서 알게 된 ‘내가 가고자 하는 곳’과 더불어 ‘내가 길 위에 서게 된 이유’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자신을 드러냄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회 만들기

 내가 6살이 되던 해 초등학교에도 입학하기 전에 엄마가 큰 병을 앓게 되면서 병원에 입원하셨다. 가족들은 매주 금요일 새벽이 되면 엄마를 보기 위해 12시간이 넘게 도로 위를 달렸다. 아빠는 매일 아침 일찍 일하러 나가셔서 저녁 늦게 돌아오셨기에 집에는 나와 2살, 4살 먹은 동생들만 남아있었다. 부모님께서 가정을 지키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온 힘을 다하고 계셨지만, 노력만으로 현실을 부정하기는 어려웠다. 당시 6살이 할 수 있는 요리라고는 계란 프라이 밖에 없었지만, 동생들을 챙겨야 한다는 생각에 손도 닿지 않는 주방에서 밥을 짓기 시작했다. 우리는 늦은 저녁이 되어야 만날 수 있는 아빠를, 토요일 아침이 되어야 만날 수 있는 엄마를, 가끔 찾아오시던 고모, 삼촌을 항상 기다렸다.


 아빠는 한국 GM에 근무하셨는데, 근무지가 타지로 발령 나면 우리 가족은 일자리를 따라 함께 움직였다. 지금의 집에 오기까지 12번의 이사를 거쳤다. 초등학교만 4곳을 다녔기에 다들 하나씩은 품고 있을 유년 시절 또래 친구들과의 추억이 그리 많지 않다. 친구를 사귀더라도 그 관계가 오래가지 못했기 때문에 쉽게 정을 붙이지 못했는데, 그런 나를 더 챙겨주고 이해해주던 친구들이 몇 있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그 친구들을 떠올리면 애틋한 감정이 올라온다. 하루는 2시간이 걸려 전에 살던 집 근처로 밥을 먹으러 갔다. 밥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굳이 전에 살던 집을 지나야겠다고 떼를 써 차를 돌렸고, 그날 나는 3년 만에 친구와 만날 수 있었다. 아직도 가족들은 그곳을 지나다 우연히 친구와 만난 것으로 알고 있다. 사실은 내가 그 길을 지날 예정이니 아직도 그 골목에 살고 있다면 큰길에 나와 서 있으라고 친구에게 연락했던 것이었다. 지금은 서로 바쁘다는 이유로 안부 문자조차 하지 않는 사이가 되었지만, 가끔은 생각이 난다. 그저 잘 살라고 기도한다.


 각박한 삶 속에서 우리 가족이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칠 때, 내가 가족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엄마, 아빠에게 짐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딱히 내가 짐처럼 느껴진 적은 없었지만, 여러 고민과 걱정거리가 있음을 알았기에 나에 대한 걱정이라도 덜어주고 싶었다.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한 그 어린 나이에 마음 기댈 곳 없이 동생들에게 버팀목이 되어주려 노력했다. 애써 괜찮은 척 내 힘듦을 숨기기 시작했고, 안 좋은 일이 있어도 그 슬픔을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감정의 골이 깊어지다 보니 기쁜 일도 기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어렸을 때 크게 웃어본 기억이 많지 않고, 그동안 쌓아두던 감정이 욱하고 터질 때가 종종 있었다. 어쩌다 웃음이 나면 그마저도 스스로 어색하게 느껴 입을 가리고 웃는 등. 내가 웃는 모습을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감정을 누르고 누르다 보니 타인에게 나의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 서툴러졌고, 점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삶을 살게 되었다.


 마음의 문이 굳게 닫혀있었지만, 문을 열 방법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나조차 잘 모르고 있던 빈틈을 찾아 나로서 세상을 사는 방법을 알게 해준 사람들이 있었다. 가장 힘들었던 때 교회, 지역아동센터에서 만난 선생님과 친구들이었다. 그동안의 감정을 억누르면서 들었던 생각은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였다. 너무 치열한 삶을 사는 사람들만 보고 자라서인지 내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기분으로 살아가는지 궁금해 했다. 자신의 기쁨을 나누어 내가 함께 기뻐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노력했다. 어른들은 자신이 어렵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며 동등한 처지에서 생각하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편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셨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감정표현을 어렵게 하던 벽이 허물어지고 사회에 나를 드러내는 단계에 왔다. 시간이 오래 지난 지금 그 당시에 찍었던 사진들에 비해 환하게 웃으며 찍은 사진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속으로 앓던 감정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응축되었을 때 찍었던 사진 속의 나는 너무 작아 보였다.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몸을 웅크린 채 사람들 속에 숨어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속에서 앓는 감정이 없어서인지 마음과 정신이 건강해진 것이 표정으로 드러난다. 기쁠 때, 슬플 때, 화날 때 등 다양한 상황에 맞는 다양한 표정을 지으며 그 모습을 숨기지 않는다. 1년 전 겨울 아르바이트를 하며 처음 만난 이모가 웃는 얼굴이 예쁘다며 칭찬해주셨을 때 속으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때의 기분을 잊고 싶지 않아 어떤 상황에서 짓게 된 웃음이었는지, 얼굴에 어떤 근육이 사용됐는지 기억하려 애쓰던 모습이 생각난다. 이런 과정을 겪으며 나를 드러냄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같은 고민으로 힘들어하는 청소년들에게 경험을 나누고 함께 걷고 싶다. 감정표현을 통해 나를 세상에 드러냈던 것처럼 각자의 수단으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도록 돕고 싶다. 또한, 그 과정에서 타인 속에 작용하는 자신을 발견해 주체성을 확립하기까지 함께하고 싶다.


나에게 만족을 선물하자

 ‘어중가니스트’, 우연히 보게 된 웹드라마 ‘캐스트’에서 주인공으로 나오는 임유경(최유정)이 어중간한 자신을 칭하며 만든 단어이다. 그 말을 듣고 뭐라 표현할 말이 없이 항상 어중간하던 과거의 나에게 ‘어중가니스트’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담임 선생님과의 상담에서 내 특기와 취미를 설명하는 것이 싫었다. 할 줄 아는 것은 많았지만, 특별히 잘 하는 것이 없는 것은 내 콤플렉스였다. 나름 음악이나 미술 분야에 재능이 있다고 칭찬받아오긴 했지만, 그것도 내 기준에선 어중간했다. 결정적으로는 내가 이 전공을 가졌을 때 경쟁력이 있는가, 돈 벌어 먹고살 수 있는지에 대한 두 질문에 부정적인 답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것들에 도전하며 살다 보면 언젠가 내가 잘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의 어중간함이 경험 부족에서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경험이 아닌 어중간함을 어중간하다고 여기지 않을 힘이 필요했다.



 참여는 깨어있는 어른들만 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청소년들이 어린 이유로 무시 받는 상황에서도 그게 잘못된 줄 몰랐다. 그러나 자라면서 보니 어른들이라고 다 깨어있는 것도 아니고, 청소년이라고 어린 이유로 무시의 대상이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특별히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3년간 ASPECT 청소년기자단에서 활동하며 사회에 참여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됐다. 하루는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카풀을 타고 집에 가고 있었다. 기사님의 운전이 유독 거칠었던 날 이렇게 위험하게 운전을 하다가는 조만간 사고가 날 것 같다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블랙박스를 찾았다. 블랙박스는 설치되어 있기는 했으나, 전원이 켜지지 않은 상태였다. 아침, 저녁으로 며칠을 주시했지만, 블랙박스의 전원은 켜지지 않았다. 그래서 청소년기자단 활동을 함께 하면서 카풀을 이용하던 친구와 카풀의 위험성을 알리는 기사를 작성하기로 했다. 생명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장치를 소홀히 여겼으며, 전반적인 시스템 구조상에 문제가 있었음을 함께 활동하는 친구들과 공유했고, 관련 내용을 기획해 기사로 작성했다. 두 주에 거쳐 기사를 보도했는데, 인터넷에 기사가 올라온 바로 다음 날 블랙박스에 전원이 켜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에서는 관련 내용을 함께 취재해보고 싶다는 연락을 주기도 했다. 직접 문제점을 찾고 해결방안을 찾기 위해 고민해 작성한 기사가 사회에 변화를 이끌 실마리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내가 청소년 기자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청소년도 사회에 참여하며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이때 크게 깨달았다.


 이후에는 청소년이 상상하는 행복한 마을을 꿈꾸며 직접 지역 정책에 대해 분석하고 제안하는 과정을 겪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제안한 내용이 시의 정책편성 과정에 들어가고, 실제 그 내용이 실현되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청소년들이 만들어낸 또 다른 참여, 변화를 알게 된 것이다. 그 밖에도 청소년기자단 3·4기 대표로 활동하며 지도자로써 겪을 수 있는 권한과 책임에 대해서도 학습했다.


 살면서 언제 해볼까 말까 한 활동들을 이곳을 통해 경험할 수 있었다. 달그락 에서 이루어지는 활동 대부분은 학교, 나이, 성별이 다른 청소년들과의 접촉으로 이루어진다는 특징이 있다. 특별히 다른 또래들에 비해 사람을 많이 만나며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유형의 사람이 있음을 알게 됐다. 나와 성격이 잘 맞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상식선에서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처음엔 그들을 내 기준에 맞추려고 시도했었다. 그러다 보니 그들과 많이 싸웠고, 깨져서 힘들었다. 그러다 문득 아빠가 항상 술을 마시고 들어오셔서 하던 말씀이 생각났다. ‘사람이 먼저다.’ 무엇보다 사람이 먼저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람을 내쳐서는 안 된다, 지도자로서 그 사람을 이해하고 포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너무 미워서 평생 보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도 서로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3번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 말의 뜻을 이해하기 시작한 뒤로는 그 친구들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되지만 이해하려 했다. 또, 그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람 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과정이 자연스러워질 때쯤, 이제는 내가 이해해야 할 대상이 내가 되었다. 세상에 정말 많은 사람이 있는데, 나 또한 그중 하나로 누군가의 기준에 맞춰 살 필요가 전혀 없음을 깨달았다. 나를 그 자체로 이해하고 만족한다면 늘 고민이던 어중간함은 장점으로 바뀔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주변에 우리 가족의 어려움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사회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피아노 학원은 보내주겠다던 아빠의 약속에 피아노 학원을 등록하게 된 것이다. 타고난 재능이지 배우는 족족 습득이 빨라 나보다 반년이나 먼저 배우기 시작한 친구들과 진도가 비슷했다. 그러나 그만큼 질리는 속도도 빨랐던 것 같다. 반년 만에 학원을 그만두기로 했다. 하지만 나는 끝내 학원을 그만둘 수 없었다. 당시 다니던 교회 사모님이 내가 주일 피아노 반주를 해주었으면 한다며 1년 치 학원비를 결제하셨다. 이미 질려버린 피아노였기에 또 피아노 학원에 다니는 것이 귀찮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이 나를 기억하고 생각해준다는 사실이 기뻤다. 덕분에 시간이 흘러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하고 교회를 옮길 때마다 그곳에서 피아노 반주로 섬길 수 있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기초적인 실력만 있었는데 가는 곳마다 반주자로서의 사명이 주어졌다.



군산에 이사 온 후 정착하게 된 교회에서는 지역아동센터를 운영하고 있었다. 학교가 끝나면 동생들과 그곳에서 놀고는 했다. 덕분에 또래 친구들과 걱정 없이 놀며 맛있는 밥도 먹었고, 하고 싶은 공부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다른 학교 친구와 선의의 경쟁을 하며 공부에 불을 붙였고, 친구랑 내기해 하루 만에 수학 문제집 한 권을 다 풀어버린 적도 있다. 그러면서도 한 번도 공부하는 것이 힘들지 않았고 그저 즐거웠다. 센터에서는 중학생이 되어서 더 열심히 공부할 수 있도록 과외 선생님을 만날 수 있게 도와주셨다. 또, 돈 걱정 없이 공부에 집중하고, 공부와 더불어 자기계발에도 사용할 수 있는 비용을 마련해주시기 위해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도와주시기도 했다. 옛 말에 자식에게 물고기를 먹이고 싶거든 물고기를 잡아다 주지 말고 물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치라는 말이 있다. 센터에서는 나에게 물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모든 일에 개입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노력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이후 고등학생이 되면서 청소년자치연구소 달그락달그락을 만나게 되었다. 청소년기자단 3·4기 대표로 활동하며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나왔고, 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연스레 내가 어떤 사람인지 깨닫게 됐다. 청소년 자치활동을 통해 주체성을 확립하고 지금의 나로 바로 서기까지 함께한 선생님들의 영향이 크다. 특히 낯설고 궁금한 세계에 첫발을 내디디던 날 내 손을 잡아준 선생님이 기억에 남는다. 함께 있던 날에는 아무리 지치는 활동을 하더라도 집에 돌아와 기분 좋게 잠이 들 수 있었다. 관계에서 나오는 따뜻한 힘이 내가 살아있음을 체감하게 했다. 이런 기회들을 통해 사회의 선한 영향력을 다시 보게 되었다.

 

 당시 내 옆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로부터 받은 따뜻한 힘이 현재 내 삶에 아주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어느 날 길을 걷다 문득 이 감사한 마음을 사회에 보답하고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됐다. 내게 주어진 또 다른 사명인 듯하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은 각자 나와 같은 청소년을 보호하고, 지지하는 것 등 사회에서 맡은 역할이 있었다. 처음에는 이런 삶을 봉사하고 헌신하는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맡아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그러나 굳이 다른 역할 말고 그 역할을 맡으려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나에게는 누구나 다 할 수 있고,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을 굳이 내가 하고 싶은 이유가 있다. 유년시절 어려움을 겪던 나와 같이 조금의 도움만 있으면 얼마든 일어설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하는 일을 하고 싶다.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당장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이 있을지 고민했다. 내가 다니는 교회가 있는 지역에는 유독 소외된 이웃들이 많고, 제도상 여러 방법에 따라 금전적, 정서적 지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실제로 하루하루의 생계를 고민해야 할 상황에 놓여있지만, 서류상으로 부양가족이 있거나 본인 명의로 된 재산이 있어 지원을 받지 못했다. 사회에서 누군가는 그들을 위해 일을 하고 있지만, 복지 사각지대에 가려져 눈에 띄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봤다. 그래서 그 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고민했다. 친구들과 매주 이웃들이 보낸 반찬을 포장해 홀몸 어르신 댁, 결손가정, 장애인가정에 전달했다. 장애인가정에는 청소, 설거지, 분리수거 등 가사에 도움을 주었고, 홀몸 어르신께는 동네 손주로 찾아가 안마를 하거나 말벗이 되었다. 결손가정 아이에게는 놀이 친구와 학습교사가 되어주기도 했다. 2018년에는 ‘할아버지의 새 시계(視界)’라는 이름으로 홀몸 어르신께서 찍으신 사진을 엽서로 만들어 판매하고 여러 가정에 난방비를 전달했다. 2019년에는 ‘찾아가는 음악회’를 개최해 문화생활이 어려운 이웃을 찾아가 공연을 하기도 했다. 이런 것들이 내가 선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임할 수 있는 역할이었다.

 

지금까지의 인생이 마치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과정과 비슷한 것 같다. 어렸을 때 겪은 혼란스러운 시기를 메마른 땅에 피어난 새싹이라고 표현한다면, 지역아동센터, 교회를 만나 혼란함을 잘 이겨내 중심축을 구축한 시기를 비옥한 토양에 핀 꽃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이후에 달그락을 만나 내가 누구인지 깨닫게 된 후로는 아주 탐스러운 열매를 맺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앞으로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내가 맡아야 할 역할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청소년들이 솔직한 감정표현을 통해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 절대 부끄럽지 않음을 세상에 알리고, 그 과정 중에 서로가 부대끼며 사는 공동체를 만들어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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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청년 1,2호 잡지에 수록된 청년 에세이를 브런치에 연재합니다. 2호 잡지는 현재 텀블벅 펀딩중입니다. 얼리버드로 할인 된 가격에 예약 가능하니 한번씩 살펴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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