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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위의청년학교 Jun 25. 2022

Plan B를 꿈꾸며 살아가는 중입니다

길위의청년학교 손지완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진로에 대한 고민은 언제 끝이 날까요? 올해로 꽉 찬 50세가 된 길 위의 청년인 나 역시 미래에 대한 확신도 없고 고민도 끝나지 않고 있는 진행형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들처럼 ‘난 뭐하고 살지?’에 대한 고민의 과정들을 나누며 위로와 응원을 하고 싶다.


‘응답하라 1988’ 덕선이와 같은 해에 고2였던 나는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였다.  미술시간에 그림을 잘 그리면 미술 선생님이 교실 뒷벽에 그림을 붙여 주곤 했다. 교실 뒷벽에 걸린 내 그림을 보고 뿌듯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대견해했던 기억이 난다. 


어느 날 미술시간에 선생님이 수채 풍경화를 그리고 있던 제 옆에서 팔짱을 끼고 그리는 모습을 바라보시면서 

‘너 미술학원 다니니?’

‘아니요~ 안다녀요....’

‘학원 안다니고 이 만큼 그리면.... 전공하면 잘하겠다! 재능이 있네 ~ 미대가라~!’


한 번도 뭐가 되어야겠다, 되고 싶다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진로에 대해서 묻는 사람도 물어봐야 된다라고 생각을 안 해 보았던 터에 선생님의 그 말은 나를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엄마가 오면 미대 간다고 이야기해 봐야지 하고 그날부터 내 머릿속은 온통 미대였다. 한 달에 한번 엄마가 집에 오는 날 용기를 내서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미술 선생님이 내가 그림에 재능이 있데~ 나 미대 가도 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학교 졸업하고 일하고 앞가림할 생각이나 해야지~!’ ‘동생이 셋이다! 


엄마의 단호한 대답에 내가 처음으로 꿈꾸어 본 희망은 바로 접었다. 대단히 미술에 대한 집념이 있거나 그렇지는 않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버릴 수 없었던 그림에 대한 미련은 남았다. 어느 날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동네에 화실이 생긴 걸 발견했다. 문을 열고 풍겨오는 물감 냄새를 지금도 기억이 난다. 용기를 내서 등록을 하고 1년을 데생을 배웠다. 그러나 화실을 오래도록 다닐 수가 없었다. 학원비도 비쌌지만 이걸 더 배워서 먹고살 수 없다는 것을 선생님을 통해서 알게 됐다. 4년 미술 전공을 하고 할 수 있는 건 동네 화실이나 미술학원 운영을 하는 것과 어렵지만 간간히 좋아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먹고살만한 수입이 없다면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없다는 것을 20대 초반이 지나면서 하나씩 배워갔다. 그때부터 무언가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하게 되었다.


답답한 마음을 물어볼 곳이 없었다는 것과 함께 고민해 줄 누군가가 없었다는 것이 오래도록 아쉬움으로 남는다. 1980년대 후반에 지금처럼 청소년 공간들이 있었다면 내 삶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한다. 그리고 함께 고민할 누군가가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질문할 수 있는 시간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왜냐고 묻는다면 스스로에게 묻고 새로운 무언가를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자신 안에서 꿈틀거려야 답을 찾으려는 시도가 이루어질 테니까. 지금 돌아보니 그것은 ‘호기심’이다. 이것도 궁금하고 저것도 궁금하고 ‘해보고 싶다’라는 나의 호기심이었다.

     

내 삶의 밑천은 영화와 도서관이었다.     

할머니와 살았던 어린 시절 갈 곳도 할 것도 많지 않았고 그저 내가 갈 수 있는 곳이란 동네 마을문고였다. 지금도 나는 서점과 도서관을 좋아한다. 학구적인 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책을 뒤적거리는 것과 새로운 것들을 만나는 것이 여전히 좋다. 자꾸만 ‘라떼는 말이야’ 라가 떠오르는데 그때는 인터넷이라는 플랫폼이 존재하지 않았다. 할머니와 사는 어린 여자아이가 할 수 있는 취미 생활이라는 것은 고작 TV에서 방영되는 ‘주말의 명화’를 시청하는 것이었다. ‘세계명작영화’ ‘명화극장’ 영화를 방송하는 날을 TV 옆 벽에 적어 놓고 애타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시청하는 일이었고 그런 모든 것들을 매일 곁에 두고 볼 수 있다는 것이 큰 즐거움중 하나였다.


1984년 중학교 1학년 때 스크린이라는 영화잡지가 처음 나왔을 때의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한 그 잡지를 당시 가격 3,800원 정도의 거금을 주고 구입했다. 검색을 해보았더니 그때 짜장면 가격이 한 그릇에 500원이었으니 할머니가 알았다면 기절하셨을지도 모르겠다. 잡지에 나온 전 세계 영화 이야기와 감독, 배우들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 또 보는 것이 가장 즐거웠던 일이었다. ‘쉘부르의 우산’ ‘로마의 휴일’ ‘사운드 오브 뮤직’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 ‘왕과 나’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셀 수도 없는 영화 이야기에 달마다 잡지를 기다리는 일은 큰 기쁨이었다.


어렸을 때의 영화에 대한 관심과 경험은 지금까지도 내 삶의 큰 배경이 되고 있다. 세상 어떤 것도 쓸모가 없는 일은 없다는 것을 지나 온 기억들이 말해 주는 것 같다. 지금도 내가 기획하는 프로그램에는 그림 그리는 벽화사업, 젠탱글을 그리는 자기 들여다보기 수업, 영화를 통한 상담 활동, 자원봉사활동으로  자주 운영되고 있다. 먼 훗날을 준비하는 마음이라기보다는 지금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에 대해 귀 기울이는 것을 놓치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나의 쓸모 찾기에 늦은 때는 없다.     

세상에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들은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중국의 장자(莊子)는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없다’라고 했다. 인간은 쓸모가 있는 것은 알고 있지만, 쓸모없는 것을 쓸모 있게 사용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라고 한다. 어떤 것이 쓸모가 있고 없고는 세상을 읽어내는 안목으로 쓸모가 없는 것 같아 보이는 것을 오히려 쓸모 있게 창조하는 것이 더 멋진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의 쓸모를 찾아 헤매던 20대의 중반에 청소년 수련원에서 일을 할 기회가 왔다. 하루 걸러 캠프 파이어를 하고 촛불 의식으로 청소년들의 눈물을 함께하고 장기자랑, 산악행군을 하던 때였다. 나와 딱 맞는 일을 찾은 것 같았고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산속에서 생활해야 하는 날이 대부분이었고 남자 교관들만 있는 곳에서 여자 교관이 나 하나인 그곳이 처음엔 신나고 재미있는 일이었지만 친구들이랑 카페 가고 싶었고 놀고 싶은 마음이 컸다. 매일 세상의 생활이 그리웠고 하얀 바지, 하얀 모자, 단체복이 아닌 예쁜 옷들을 입고 세상 속에서 살고 싶었다.


나는 사직서를 내고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다. 20대 후반의 여성이 다시 직장을 구하기 쉽지도 않았다. 결혼 적령기의 여성은 곧 결혼하고 사직할 것이라는 인식으로 취업이 쉽지 않았다. 사랑해서라기보다 해야 할 때가 되어서 숙제처럼 결혼을 했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은 직장생활을 하는 것보다 더 힘들었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이 컸다. 작은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닐 때 즈음에는 외벌이 가정의 경제사정은 그리 좋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보니 주변의 육아 동지들이 하나둘 취업을 하기 시작했다. 경력이 단절된 여성이 그것도 주부가 선택할 수 있는 직장은 한정적이다 못해 정해져 있었다.


아이가 어려서 돌봐줄 사람이 없다면 대기업의 하청 공장에서 주어지는 단순 조립 아르바이트를 집안에 쌓아놓고 하거나 대형마트의 캐셔, 가까운 기업공단의 저임금 공장일들이 대부분이었다. 육아 동지 친구 집에 놀러 가서 아르바이트하는 것을 한번 해보겠냐고 해서 하루하고 포기했다. 개당 10원하는 일을 100개를 해야 고작 1,000원이 되는 일을 육아에 전념하지도 못하고 하는 것은 할 일이 아닌 것 같아 일찍 포기를 했다. 그리고 육아 동기들이 모이는 수다 자리에서 공장에서 벌어지는 불평등한 처우와 현장의 이야기를 듣고 포기, 대형마트 캐서는 화장실 갈 때도 눈치가 보이고 종일 서서 일하다 보니 몸이 아파 병원비가 더 든다는 이야기를 듣고 모든 걸 접었다. 부당함과 불평등함을 입을 닫고 일을 하기가 어려운 나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아이를 돌봐 줄 사람 없는 독박 육아 쟁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이가 자라면서 돈이 들어갈 일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것을 육아를 하면서 알게 됐다.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생계형 공모전이 시작되었다.     

도서관을 좋아했던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 여전히 도서관을 즐겨 이용했고 아이들과 도서관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아이들의 동화 독서토론 모임을 만들고 참여하고 성인 독서토론 모임도 만들고 참여하고 도서관은 세상과 소통하는 통로였고 언제나 나의 스승이었다. 도서관에서 검색을 하던 중 브라더미싱 회사에서 재봉틀을 비롯한 상품들을 건 공모전을 발견했다. 바느질에 관련된 글을 써서 제출하면 재봉틀을 준다는 것이었다. 글을 써서 제출했고 1등 상품인 재봉틀은 갖지 못했고 3등으로 책과 부자재를 받게 되었다. 


나의 생계형 공모전은 여기서부터 출발하게 되었다. 필요한 것들을 구입할 수 있는 것을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들을 공모전으로 돈이든 현물을 얻으면 된다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MP3가 필요해서 경기도문화재단 사진 공모전을 통해서 얻었고 아들을 공부시키기 위한 교재를 얻기 위해 학습교재 회사의 모니터단을 신청해서 1년치 문제집과 자습서를 얻고 상품권이 필요하면 지역 지자체의 크고 작은 공모전에 참여해서 온누리 상품권을 받아 시장 쇼핑을 했고 결과도 좋은 편이었다. 불규칙한 소득도 도움이 되었지만 채울 수 없는 무언가가 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삶의 방향을 틀게 해 준 정책 아이디어 공모전에 비용이 비싼 예방접종 비용의 부담이 큰 것을 알게 된 육아의 경험으로 ‘영유아 예방접종 무료’를 정책 제안서를 제출했고 채택이 되었다고 청와대에서 아이디어를 내준 사람들에게 등기로 우편물을 보내주었다. 사소한 생활의 문제를 제안할 수 있고 그런 제안들이 받아들여서 정책으로 나온다는 것이 놀랍고 뿌듯했다. 그다음 해인 2009년 행정안전부에서 주부들의 시선으로 정책제안을 하는 정책제안 모니터단이 발족을 하게 되었고 참여를 신청하고 자칭, 타칭 엄청난 경쟁력을 뚫고 지역에 5명의 모니터단으로 뽑혔고 적극적인 태도 덕분에 공식적인 대표가 되었다. 은둔의 고수와 같은 쟁쟁한 이력을 가진 5명의 주부들이 모여 한 달에 한번 정책 제안을 나누고 수정하고 지역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도 그분들과 지역에서 각자의 위치에서 함께 고민하는 파트너로 지내고 있다. 3년간 정책모니터 대표단을 이끌고 5명으로 시작했던 모니터단은 50명으로 늘어났고 해마다 우수 제안상 등으로 대표로 있던 3년간 경기도 3위를 랭크하고 학교 때 받지 못했던 수많은 상을 안겨다 주었고 제겐 커다란 커리어가 되었다. 그리고 경기도여성가족연구원(현재 경기도여성가족재단) 뉴스레터 제호 공모하여 지금도 운영되고 있는 ‘경기가족여성e야기 뉴스레터’ 는 공모전에 제안하여 만든 이름이다. 그 당시에 상금도 받은 기억이 난다.


다양한 방법으로 생활비를 공모전으로 대체하긴 했지만 장기적인 미래를 계획할 수 없어서 아이를 키우며 온라인으로 할 수 있는 공부를 시작했다. 평생교육사 국가자격을 취득할 수 있는 사이버대학에 등록을 했고 새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학비를 어떻게 조달할지가 고민이었다. 육아와 학업을 함께 하는 전업주부의 고민을 누가 알 수 있을까 그러나 항상 궁하면 통했다. 공모전과 생계는 나를 채찍질하는 동기였고 온라인 세상에 온전히 던져져 나를 시험해보는 기회이자 장이었다. 공모전을 마구 뒤지고 있던 어느 날 200만원 상금이 걸린 대회가 눈앞에 출현했다. 시민과의 소통 활성화와 새로운 행정 여건에 맞는 생활공감 행정 실현을 위해 시민을 대상으로 한 거액의 상금이 걸린 공모전 3등만 해도 좋겠다는 마음으로 안성의 여러 문제들을 뒤지고 검색과 정보 수집하고 문제를 분석하고 ‘안성맞춤 박물관 시설 확충과 판매기능 보강’으로 최우수상 200만원을 거머쥐게 되었다. 내가 자료를 수집하고 고민해서 얻어낸  손가락으로 품을 팔아서 번 가장 많은 액수의 상금이었다. 크게 눈을 뜨고 손가락으로 정보 수집을 한다면 생각보다 많은 대회들이 곳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의 가능성도 알아가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     


없으면 만들어내면 되는 거다.     

“세상의 모든 것은 아름다워야 한다”라는 나만의 삶의 기준을 가지고 사는 나의 아름답게 살고 싶은 욕구와 넉넉하지 못한 생활비는 나를 핸드메이더로 만들었다. 아파트 마당에 버려진 가구를 집으로 가져와 페인트 칠하고 나무를 덧대고 재사용하는 것과 바느질로 아이의 옷을 만들어 입히는 일은 육아 스트레스를 해소하기에도 좋았고 나의 생활 기술력을 나날이 키우는 긍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배워본 일 없는 드릴과 직소를 사용하는 경험을 일찍이 했더라면 전 아마 공대를 진로로 선택했을 수도 있었으리라. 나의 재능을 또 찾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치수를 재는 일, 도면을 그리는 일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나중에 부자재를 선택하고 조립을 할 때 오류가 적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기본이 튼튼해야 된다는 세상의 진리를 가구 업싸이클링을 통해서 배웠다. 커튼이 비싸다는 것을 그리고 인테리어 비용이 비싸야 하는지를 바느질을 하면서 페인트칠을 하면서 깨달았다. 


어린이 집에서 아이가 입을 앞치마, 아이 도시락 가방부터 필요한 것들을 포털 지역 육아 동아리 카페에서 패턴을 구하고 부자재도 교환하고 나누고 가끔 정모를 통해 서로가 만든 옷이며 인형, 가방들을 공유하고 분석도 하는 제법 전문적인 양재 동아리를 만들고 활동했다. 친구를 찾는 일도 육아를 하는 일도, 핸드메이더로써 역량을 쌓는 일도 온라인 카페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도구를 잘 선택하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이 든다. 나의 강점은 아마도 두려움 없는 확장성인 것 같다. 즐거움으로 취미를 즐기고 필요를 누리며 셀프로 익힌 솜씨로 지역에서 열린 재활용 공모전에 인형을 만들어 제출하고 여러 번 수상을 하게 되자 지역의 방송국 프로그램 출현도 하게 됐다. 그때 익힌 경험들은 청소년들과 지역 청소년 축제의 행사장을 세팅하거나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세상에 쓸모없는 것이 있을까요?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없다. 쓸모를 만들고 기회를 만들고 실천하고 도전하는 시도가 스스로를 성장하게 만든다. 필요한 것들을 구입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방법이라면 나에게 맞는 것들을 만들어 내는 창조의 과정은 또 다른 즐거움이고 성찰이었다. 생활의 기술 속에서 재사용, 재활용, 업싸이클, 공유 나눔들을 배웠다. 세상 속에서 배우기를 주저하지 말고 시도하고 도전하길 바란다. 그 안에서 분명 배움과 즐거움이 일어난다. 나의 핸드 메이더로서의 삶은 앞으로도 지속될 예정이다.     



세상 속에서 방법을 찾았다.     

지속적으로 만들고 나누고 공유하는 일들을 했고 지역 안에서 기부 활동을 짬짬이 하고 있던 터라 안성에 아름다운 가게를 검색 하던 중 매장은 없고 아름다운 가게 안성점을 만드는 위원회가 있는 걸 알게 되었다. 기부물품들을 모아 함께하는 모니터단 회원들과 기증하러 갔다가 세상 밖의 두 번째 엄마 같은 분을 만났고 2년간 아름다운가게에서 활동천사로 봉사했고 오늘날까지도 운영위원으로 8년째 봉사 중이다. 그리고 지역의 환경단체에서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기후 강의를 시작으로 교구 제작, 녹색장터, 정책제안 활동들을 하다 보니 지역역사편찬위원회, 지역 청소년 관련 각종 위원회 등 곳곳에서 제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역의 여러 단체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그동안의 활동들이 지금껏 지역의 네트워크 자원들이 되었다.


안성에 있는 중학교에서 교육복지우선지원사업을 운영한지 10년 차가 되어 간다. 지역의 청소년들을 지역에서 함께 품는 일과 지역 안에서의 청소년 문화의 변화를 만들어가는 일들을 하고 있다. 지역안에 청소년기관도 없고 청소년 축제도 전무한 곳에서 맨땅에 헤딩하듯 청소년 프리마켓 축제를 만들어 4년간 운영했고 청소년 자원봉사 활동과 청소년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청소년에 관한 시선을 바꾸고 청소년문화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외침의 역할을 하고 있다. 청소년 사업을 하면서 과거의 나를 자주 돌아본다. 무수히 헤매고 어려웠던 날들을..


왜 우리는 질문하고 물어보는 것에 익숙하지 않을까? 나 역시 그러지 못했다. 청소년들에게 그리고 청소년을 지나 청년의 길목에 서 있는 여러분들에게 가까운 곳에 멘토라는 거창한 이름 말고 나의 고민을 함께 나눌 선배 어른을 찾아보라고 꼭 전해주고 싶다. 내가 궁금한 내가 알고 싶은 해답을 들고 나타나 줄 귀인이 없다는 것이다. 두눈 크게 뜨고 찾아보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찾고 살펴보아야 한다고 그리고 함께 이야기하고 나누라고 말이다. 내 삶에 변화를 촉진해 줄 촉진자를 보물찾기 하듯 찾아 나서야 한다.     


또다시 독립을 꿈꾼다.     

나는 이제 또 무엇을 할 것인가? 내 삶의 갈림길에 나를 놓고 내 삶의 변화의 촉진자를 찾아 SNS를 뒤지고 책을 읽었다. 그러던 중에 페이스북에서 군산 달그락을 만나게 되었다. 내 삶의 동력인 호기심으로 달그락을 찾았고 온라인을 통해 자주 살펴보았고 만남의 기회를 찾아서 달그락을 만나러 군산을 찾아갔다. 군산엔 아름다운 명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터에 곳곳을 걸어서 군산을 만났다. 군산은 매력적인 곳이다. 과거의 아픈 시간들을 잘 품어내고 현재를 재해석한 멋진 도시다. 그곳에서 더 멋진 역할을 하고 있는 달그락을 보유한 탐나는 곳이기도 하다.


SNS가 만들어준 인연으로 저는 지금 길위의 청년학교와 함께 하고 있다. 함께 할 수 있음이 감사하다. 새로운 촉진자인 스승들을 만났고 반드시 학교 안이 아닌 자유로운 선택권을 가지고 미래에 청소년들과 함께 세상의 변화를 기획해보고 싶은 바램을 실천할 수 있는 배움을 하고 있다. 그리고 청소년이든 누구이든 삶의 호기심을 함께 탐구하고 시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다. 늦은 때는 없다고 생각한다. 긴 삶 중에 어려서 일찍이 큰 숙제를 만날 수도 있고 나이가 들어서 만 날 수도 있다. 


이제 조금씩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아 간다. 많은 경험을 겪고 나서야 내가 보이기 시작했고 경험이 거울이 되어주고 있다. 좋은 멘토인 선배 시민과 후배 시민이 만나 삶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는 문턱 낮은 복합문화공간을 운영하고 싶다. 삶의 여정 안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문제를 함께 풀어나갈 수 있는 기회를 생산하는 기획자가 되고 싶다.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을 찾고 만나 함께 먹고사니즘을 고민하고 위안하고 경험할 기회가 부족한 청소년, 청년들과 함께 하면 더 좋겠다. 문화복합공간으로 만남의 장소이자 전시, 공연, 강연 등 콘텐츠를 생산하고 판매하고 소득을 만들 수 있는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 과정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프로그램, 행사로 기획하여 경제적 자립도 하고 싶다.


사회의 관습에 밀려 내 의지와 관계없이 밀려서 20대를 살아왔다. 이제 탐구하고 비판하고 성찰하며 온전한 존재로 자연과 환경을 지키는 긍정적인 영향력을 나누며 세상 안에서 자연을 헤치지 않고 공존하는 삶의 방법을 찾아내며 함께 살고 싶은 계획을 하나씩 이루어 나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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