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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위의청년학교 Apr 30. 2022

변화는 어디에서 오는가

길위의청년학교 이재명

길 위의 청년 1,2호 잡지에 수록된 청년비전 에세이를 연재합니다.



 장남이었던 나는 어릴 적부터 무척 소심했다. 가정형편이 좋지 않아 가난하다는 걸 일찍부터 알았다. 학교에 가져가야 할 준비물 살 돈을 달라는 말을 못해서 참고 참다가 결국 당일 아침에 겨우 얘기를 꺼냈다가 욕을 바가지로 먹고 나선 아예 말을 못하기도 했다. 그런 나를 부모님은 해달라는 것 없이 손이 가지 않아 잘 컸다고 하시곤 했다. 나라고 왜 바라는 게 없었겠나마는 이미 나는 속마음과 욕구를 숨기는 게 주특기가 되어 있었다. 가난한 부모는 용돈이란 걸 준 적이 없었고,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렸을 적에 나는 동전에 집착했다. 실제 돈을 가질 수 없었기에 대용물을 가지고 다니곤 했는데 그 대용물이란 플라스틱으로 된 병뚜껑의 속지였다. 동그랗게 생긴 게 마치 동전 같았다. 그걸 가지고 있으면 괜히 안심이 되었다. 나의 것에 대한 경계는 분명했으나 남의 것에 대한 경계는 모호했다. 나의 것은 주지 않으면서 남의 것은 탐했다. 먹을 것이 생기면 동생들에게 나눠주지 않다가도 동생들에게 먹을 것이 생기면 기어이 빼앗아 먹었다.


 1989년에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그 무렵은 전교조가 막 설립되던 무렵이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도 전교조 선생님이 두 분 계셨는데 국어과목과 세계사과목이었다. 수업이 재미있었고 성품이 다른 과목 선생님들과 달랐다. 그 두 선생님의 해직이 발표되었고 700여명가량이었던 전교생이 선생님들을 보낼 수 없다며 운동장으로 뛰쳐나갔다. 그때 나는 상위권 그룹의 몇몇 학생들과 함께 교실에 남아있었다. 속으로 생각했다. ‘에이 바보 같은 놈들, 이번 기회에 등수나 올려야겠다.’ 그 이후로 친구들에게 두고두고 의리 없는 놈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이 행동이 부끄럽다고 자각하게 했던 계기가 2번 있었다. 한번은 나름 노력으로 제법 상위권에 이르렀던 고등학교 3학년 때 체육대학을 지망하던 친구의 부탁으로 개인교습을 하면서였다. 알고 보니 그 친구는 고등학생 운동권이었다. 나는 과목을 알려주었고 그는 나에게 사상을 전해주었다. 또 한 번은 대학에 가서 선배들이 몰래 보여주었던 <닫힌 교문을 열며>라는 영화를 보고 펑펑 울고 나서였다. 대학에 가면 절대 데모 같은 건 하지 말라시던 부모님 말씀대로 살고자 했지만 철거민들을 만나고 농민아저씨들을 만나면서 사회의 부조리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호세 마리아 신부님과 장일순 선생님     

 90년대는 사회주의가 무너지는 충격을 목격하면서 노동운동을 지향하던 대학가에서 협동조합운동, 생활문화운동 등 시민사회영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시기였다. 그 무렵 돌아다니던 책이 있었는데 “몬드라곤에서 배우자”라는 제목으로 제본된 두꺼운 책이었다. 치열했던 내전으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스페인의 몬드라곤이라는 작은 마을에 부임했던 25세 젊은 사제였던 호세 마리아 신부는 고조된 갈등과 가난으로 인해 공동체가 파괴된 그곳에서 지역민들과 함께 평생을 바쳐 협동조합을 일구었다. 책은 어려웠지만 감동적이었다.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지만 스페인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멀게 만 느껴졌다. 


 그러던 차에 원주 한살림 협동조합의 정신적 지주였던 장일순 선생님의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책을 만나게 되었다. 쌀 한 톨 속에 우주가 담겨 있다는 생각 자체가 놀라웠다. 제목부터 눈길을 잡아 끌었던 선생님의 말씀들은 정말 주옥같았다. 단숨에 읽어 내려갔고 읽는 내내 심장이 두근거렸다. 유기농, 무농약이 당연히 좋은 것인 줄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장일순 선생님은 더 나아가서 한살림 협동조합이, 무농약이,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자신과 가족만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일갈했다. 태양이 없으면, 공기가 없으면, 땅이 없으면 우리가 존재하지 못하듯이 일체 만물이, 인간 모두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술 한잔 드시고 집으로 걸어 들어가시며 발밑에 밟히는 잡초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그런 것들을 드러내는 것이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협동조합 공동체를 상상하며 설레었고 막연하게나마 세상에 기여하는 활동가를 동경했다. 


 활동가를 동경해서 시민단체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돌이켜보면 사명감이나 소명의식으로 시작한 건 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할 당시는 IMF구제금융 상황이었고 다들 취업이 어려운 시절이었다. 몇 달을 매일 친구들과 술로 지새웠다. 술 사먹을 돈은 어디서 났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다가 사달이 났다. A형 간염이라고 했다. 간수치가 1,500까지 올라갔다. 아버지가 계신 시골에서 반년 넘게 요양을 했다. 석산을 개발하던 사업이 망하자 아버지는 어머니와 이혼하곤 도망치듯 시골로 내려갔는데 거기서 포도농사를 짓고 계셨다. 몸이 어느 정도 낫게 되자 아버지는 농사일을 거들라고 했다. 병이 나을 때까지 돌봐주셨으니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농사일은 숨이 턱턱 막혔다. 그런데 그보다도 말벗과 친구가 없는 게 더 힘들었다. 외롭고 막막했다. 그때 YMCA에서 일하던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실무 간사를 뽑는데 내 생각이 났다며 일해 볼 생각이 있냐고 물었다. 생각할 것도 없이 그러마하고 답했다. 숨이 턱턱 막히게 힘들고 외로운 시골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활동가로서 삶이 시작되었다.


 남양주YMCA에 첫 출근 했던 날짜를 기억한다. 2001년 2월 19일. 전날 밤 설레어서 잠을 설쳤다. 그 당시에 나의 선택지는 환경운동연합과 YMCA였는데, YMCA를 선택한 이유는 생활협동조합(생협)운동을 해서였다. 그런데 삶이라는 게 내 뜻대로만 되는 게 아닌지라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할 수는 없었다. 생협운동이 보람되고 즐거웠지만 나의 주 업무는 아니었고 나에게는 생활재(유기농 채소 등 물품을 이르는 말)를 공급(배달)하는 탑차 운행 등 보조업무가 주어졌다. 나의 주 업무는 환경운동이었고 그 중에서 반딧불이 지킴이 활동비중이 높았다. 서식환경 조사를 위해 마킹이라고 해서 반딧불이를 채집해서 표식을 해야 했는데 새벽 1~2시까지 이어졌다. 그 외에 프로포절 작성, 회원모집, 사회교육 프로그램, 아기스포츠단(유치원) 차량운행, 포럼, 시민사회 연대활동 등 여러 일들도 병행해야 했다. 한 YMCA 선배는 인건비는 스스로 벌어야 한다고 조언해주었다.


 YMCA에 들어가서 처음 한 것도 프로포절 작성이었다. 프로포절을 잘 작성하는 것과 선정되는 것이 능력으로 인정받았다. 회원모집(모금)이 가장 힘들었다. 보험회사에서 실적그래프를 그려놓고 목표달성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손을 벌려야 했고 마치 구걸하는 것만 같았다. 준비되지 않은 채로 중간 관리자 역할이 맡겨졌다. 나의 주관적인 생각으론 중간 관리자는 잔소리와 싫은 소리를 하는 위치였다. 필요한 역할이었으리라. 하지만 나는 악역을 맡기 싫었다. 점점 소진되는 느낌이 3년 주기로 찾아왔다. 3년 마다 일을 계속할지, 그만둘 지 고민에 빠져 허우적대었다. 그러면서도 나에게 잘 맞는 일이 무엇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딱 9년이 채워지던 해 12월에 YMCA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4년간 여기저기 떠돌며 방황했다. 그때 만났던 사람들과 경험했던 순간들로 인해, 하고 싶은 것만 하려했던 나의 모습이 180도 달라졌다.


온전함의 발견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엔 스님, 밀랍초를 만드는 귀화한 독일인과 한국인 부부, 수의 짓는 할머니, 우렁이 농장주인, 김 공장 일꾼들, 마음수련원에서 만난 사람들, 동네 할머니, 귀농한 형님들,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올 법한 도사님, 소 키우는 동갑내기 등 다양했다.


 그들을 만나고 함께 살기도 하면서 얻은 한 가지는 이중성에 관한 깨달음이다. 그들 중에는 소박한 삶을 온전하게 살아 온 분도 있었지만 겉으론 그럴싸해 보이지만 정작 속마음은 뒤틀린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뒤틀린 사람과 내가 겹쳐 보였다. 여기서 표현하는 이중성은 파커 파머의 책 <온전한 삶으로의 여행>의 표현을 빌려왔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신념에 따라 나서야 하는 이슈를 보고도 못 본 척하거나 듣고도 못 들은 척하기, 재능을 이기적으로 사용하기, 소신에 위배되는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등이다. 


 개인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환경 이슈로 친구들을 비난하고 강요했다. “야! 지금 지구온난화와 환경오염이 이렇게 심각한데 네가 경유 자동차를 타고 다녀서 그래. 나는 환경을 위해 차를 사지 않을 거야!” 그런데 사실 차를 사지 않은 게 아니라 못 산 것이고 가진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보다 경제적으로 나은 친구들에 대한 열등감을 숨기기 위해 환경 이슈로 포장한 것이다. 그 당시에는 신념으로 믿어 착각했었지만 드러나지 않았던 내면을 만나고 신념으로 포장된 열등감이었다는 걸 알고 나니  부끄러웠다.


청소년활동가의 씨앗      

 나는 모태신앙이었지만 일요일에 교회에 가기 싫었고 그 시간에 만화를 보고 싶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던 어머니는 어느 날 갑자기 신이 내렸다며 신내림굿을 받았고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자연스레 나도 교회에 발길을 끊었다. 고등학교에 가서 선배의 권유로 교회에 다시 나가게 되었고 꽤 열심히 다녔다. 무슨 임원인가를 맡았는데 고등부를 이따금 도와주던 여선생님이 있었다. 어느 날 임원들이 고생하니 저녁을 사주겠다며 자신의 직장 근처인 충무로로 불렀다. 경양식집에서 오무라이스를 먹었다. 부모도 아니고 친척도 아니면서 나에게 밥을 사주며 꿈이 뭔지, 뭐가 하고 싶은 지 물어본 어른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겨울이었지만 따듯했다. 나도 저런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쩌면 이때 씨앗이 뿌려진 것인지도 모른다.


 경기도 남양주시에는 축령산자연휴양림이란 곳이 있다. YMCA에서 일할 때 그곳에서 <숲 체험 학교>라는 2박 3일짜리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아마 수원이었던 것 같다. 그날도 아침에 45인승 버스에 아이들을 태워서 축령산으로 이동을 하려는데, 제법 덩치가 큰 5학년 학생이 버스에 타자마자 맨 뒷좌석으로 터벅터벅 걸어간다. 가방을 휙 집어던지더니 팔짱끼고 앞좌석에 다리를 척 걸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쟤, 뭐지?’ 속으로 생각하며 살피는데 밖에선 어머니가 손 흔들며 잘 다녀오라 하는데도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 진우(가명)가 내 모둠에 들어왔다. 모둠이름을 짓고, 깃발을 만들고, 서로 소개하며 사전 준비를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건드리면 터트리겠다는 듯이 살기 어린 눈빛에 고난을 몽땅 짊어진 듯 잔뜩 찡그린 눈썹과 짜증이 덕지덕지 묻은 입을 삐죽이며 “이거, 꼭 해야 되는 거예요?”, “안 하면 안 돼요? 하기 싫은데.”, “아~씨, 피곤해.”  삐딱하게 분위기를 흐린다. 아이들도 그의 눈치를 보느라 숨죽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맞부딪치면 안 되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다른 참가자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진우가 지금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데, 우리 딱 5분만 아무것도 하지 말자고. 침묵으로 고요한 정적의 5분은 무척 길었다. 고개를 푹 숙인 아이들의 한숨소리와 적막한 시간들이 흐르던 중 못 견디겠는지 진우가 정적을 깨트리며 뭐라도 하잖다. 준비한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2박 3일 내내 비가 왔다. 비가 꽤 왔고 나뭇잎으로 배를 만들어서 빗물로 생긴 물길에 띄웠고, 빗방울에 젖은 거미줄을 찾아다녔다. 판초우의를 입고 빗소리를 몸으로 느끼며 빗물 웅덩이에서 첨벙첨벙 뛰어다녔다. 프로그램의 압권은 안대로 눈을 가리고 짝의 안내를 받는 것이었다. 시각을 차단하면 불안해진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한 발짝도 떼기 힘들다. 진우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엉거주춤한 동작으로 걸었다. 조금씩 마음을 열었고 자기 이야기를 꺼냈다. 진우는 방학 내내 캠프를 돌았다고 했다. 여기를 마치면 바로 강원도 어디로 가서 해부하는 캠프에 들어간다고 했고 싫고 짜증이 난다고 했다. 마지막 날이 되어서 돌아가야 하는 순간, 진우의 표정과 눈을 잊을 수가 없다. 첫날, 그렇게도 하기 싫다고 오만가지 인상을 쓰며 사납게 굴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어쩌면 그리도 해맑고 천진하던지, 하루만 더 있으면 안 되냐고 묻던 그 아이의 간절한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엄마의 마음은 아들에게 뭐든 해주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정작 당사자가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는 안중에 없었을 것이다. 그걸 감내하고 견뎌왔을 진우가 짠했다. 나는 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믿어왔다. 그런데 그 순간엔 사람이 변할 수 있구나. 자연과 함께하면서 놀라울 정도로 바뀌는 구나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년 후 나또한 변화되었다. 그러니 사람은 누구나 변할 수 있음을 지금은 믿는다.

 

 지금쯤 20대 후반이 되었을 진우와 만남은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경험이다. 마흔 살을 앞두고 떠올린 이 장면으로 인해 인생 후반기를 청소년, 어린이와 함께 활동하는 삶을 살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씨앗은 싹이 텄다. 


청소년 활동가의 자격     

 청소년 활동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나서 얼마 후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대안학교에서 교사를 채용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교장선생님을 비롯해서 교사들과도 잘 알고 지냈고, 일부 학부모들 그리고 학생들과도 안면이 있었으며 게다가 교사를 채용한다고 알려주신 분도 당연히 내가 뽑힐 거라고 격려해주셨다. 나는 당연히 내가 채용되리라 믿었다. 하지만 하느님은 아직 내가 자격이 되지 않았다고 알려주셨다. 면접을 보고나서 똑 떨어졌기 때문이다. 꼭 되고 싶었고 당연히 될 거라고 생각했기에 탈락을 알리는 장문의 문자를 보면서 아득해지듯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암담했다. 한편으론 나 같은 인재를 안 뽑는다며 혼자서 마구 화를 냈다. 


 다른 대안 학교에 서류를 내고 준비를 하던 중에 묘한 경험을 했다. 어느 어스름한 저녁 무렵에 집으로 돌아가려고 버스를 기다리는데 문득 길 건너편 불이 켜진 미용실에 눈길이 갔다. 손님이 하나도 없이 TV를 보고 있는 남자 미용사를 보는데, 그 장면이 눈에 딱 들어온 순간 그 사람이 내 마음으로 쏙 들어왔다. 오늘 저 가게에는 손님이 몇 명이나 왔을까? 임대료와 공과금은 얼마나 될까? 자녀가 있나? 몇 명이나 있지? 교육비는? 숱한 생각들이 짧은 한순간에 나에게 훅 들어왔다. 나와 일면식도 없고 이야기 나눠본 적도 없는 모르는 사람인데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떨 지가 헤아려지는 게 신기했다. 이게 뭐지? 놀라움과 함께 ‘나는 대안학교 교사를 왜 하려고 했나?’ 하는 질문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내 그 답을 찾았다. 마트의 수산코너에서 장화신고 앞치마 두르고 생선을 손질하는 일은 내가 못하겠다, 공사장에 나가서 막일은 못하겠다는 거였다. 그런데 대안학교 교사는 좀 그럴싸한 거다. 왠지 주변사람들에게 인정받을 것 같고 월급은 적지만 그럴 듯하게 보이는 직업인 거였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정작 내 안에서는 ‘해도 괜찮을 일’과 ‘하면 창피한 일’을 구분하고 있었다는 게 발각되자 몹시 수치스럽고 부끄러웠다.


 서류를 넣었던 대안학교에서 같이 한번 해보면 좋겠다, 면접 보자 이런 연락이 왔는데 정중하게 거절하는 메일을 보내고 가구 만드는 공장에 취직했다. 낮다고 여겨왔던 일을 해보자고 결심하고 1년 반 정도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청소년 지도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이 무렵이었다. 정건희 소장님이 군산에서 달그락 달그락을 만들고 활동하는 소식을 메일과 페이스북을 통해 접하면서 청소년들이 자치적으로 활동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궁금하고 알고 싶었다. 그러던 중에 장수로 내려왔다. 장수에 내려온 이유는 아무 연고 없는 곳에서 청소년 활동을 처음부터 차근차근 시작하고 싶어서였다.  



길 위의 청년학교를 만나다.     

 정건희 소장님의 권유로 길 위의 청년학교에 결합했다. 3개월 동안 매주 금요일 밤 3시간씩 <청소년 활동론>을 공부했다. 안 그래도 할 일이 많고 일정이 빠듯한데 과연 이걸 꾸준히 할 수 있을까? 의구심과 함께 길 위의 청년학교에 찾아온 사람들은 어떤 삶의 스토리를 지니고 있을까? 호기심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책을 읽고 사례를 들으며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발견되었다. 신선했다. 나도 저렇게 해 봐야지. 달그락 같은 공간이 장수에 생기면 좋겠다. Y회관을 세워야 하나? 어떻게 만들어 볼 수 있을까? 설레는 마음도 일었다. 한편 타 기관에서, 또 달그락에서 활동하는 사례를 들으면서 장수에서 내가 청소년을 만나는 방식이나 사례와 비교하는 마음이 들었다. 묘한 질투가 일더니 한동안은 무척 우울한 생각들이 나를 지배했다. 공간도 없이 혼자 일하는 내 신세가 처량했다. 달그락에서 활동가들이 열정적으로 일하는 걸 보면서 동료가 없는 설움과 외로움도 느꼈다. 그러면서 5년간 나의 활동을 돌아보았다. 열심히 했지만 다음 단계에 대한 그림이 명확하지 않다는 걸 발견했다.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다는 걸 자각했다. 내년이면 장수에 YMCA가 문을 연지 10년이 된다. 10주년을 맞아 나는 어떤 그림을 제시할 수 있을까? 아직은 명료하게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장수의 청소년과 YMCA 회원들이 120% 행복하게 만들고 싶다.     


농사는 짓지 못하지만 <사람 농사>를 꿈꾼다     

 내가 앞으로 그리는 10년은 장수 곳곳에 청소년 피스메이커의 씨앗을 뿌리고 싹을 틔우는 것이다. 피스메이커는 놀이터이다. 청소년들이 모여서 놀고 친해지고 그리고 하고 싶은 것을 찾아서 해보도록 지원하는 놀이터이다. 여기 모인 청소년들은 자신을 이해하고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법을 배울 것이다.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방법을 찾고 시도하며 실험을 할 것이다. 언제 현실이 될지 모르지만 일단 꿈을 꾸어본다. 청소년들이 놀고 쉬며 맘껏 도전하고 실험할 수 있는 플랫폼을 청소년들이 직접 설계하고 운영하며 해보고 싶은 건 마음껏 해볼 수 있는 장을 마련해보고 싶다. 그 안에서 청소년들은 성장하고 나눠주고 후배를 기르며 자기 삶을 주도하며 살게 될 것이다.


 지금껏 내가 청소년들에게 뭔가 주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받은 게 더 많다. 때로는 청소년과 다투기도 하고 논쟁을 벌이기도 하며 주장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며 성찰한다, 때로는 실수할까 두려워 멈칫하면서도 속마음을 드러나거나 자기 의견을 표현하는 청소년들의 모습에 대견해 하고, 때로는 위안을 받는다. 그렇게 나또한 변화하고 배우며 성장한다.


 꿈을 꾸면 이루어진다. 만약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건 깊은 의식 아래에서는 믿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전주YMCA에서 운영하는 위탁대안학교에서 국어강사로 청소년들을 만나고 있다. 대안학교 교사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달그락과 청소년자치연구소를 만나고 싶다는 꿈도 이루어졌고 그밖에 개인적으로 꿈꾸었던 것들도 많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분명한 건 꿈이 이루어지되 자기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이다. 자기책임을 질 준비와 자격이 될 때 꿈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내가 10여 년 전에 끄적거렸던 스케치북엔 50평 쯤 되는 청소년공간에 대한 구상이 그려져 있다. 뭐, 아직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그려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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