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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명호 Jun 04. 2017

지금, 오늘, 현재를 사는 이유

관심이 없고 마음이 없는 2

#1


포기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듣고 자랐다.

견뎌야 하고 버텨야 했다.


나는 왜 그러는 줄 모르고

계속 견디고 버텼다.


견디고 버틴다는 의미는

보통 밝은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

밝은 미래가 과연 있다면 말이다.


열 다섯, 어느 날이었다.

몸이 가렵고 진물이 났다. 갑자기, 어느 예고도 없이.


가려움과 진물, 딱지는 하루도 거르질 않고 반복됐다.

움직이면 진물 내린 곳이 아렸고 말하면 잠시 아물었던 상처가 터져 내렸다.

속으로 삭히면서 마음이 헐었다.


엄마는 말했다.

"그건 다 네가 밤에 잠을 늦게 자서 그런 거야."

"비듬 떨어지니까 얼마나 더럽냐."


선생님, 친구는 말했다.

"다 치료된다고 하던데 너 노력을 안 하는 거 아니냐."

"야 그만 좀 긁어."


진물이 아물다 다시 열꽃이 피기를 수없이 반복하던 사이,

팔을 접으면 다리를 움직이면 입술을 열면 눈을 껌벅이면 진물이 새나왔고,

머리를 감으면 고개를 저으면 세수를 하면 쓰라려 표정을 구겼다.

나는 어느 밤에 죽어야 할지 계속 고민했다.


아파서 죽는다는 생각은 없었다.

마음이 없었다. 어디에서도 마음을 찾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사회는-

쟤 아토피 있대,

쟤 왜 저래,

아 진짜 보기도 싫다.

하나씩, 다시 하나씩 사람을 무너 뜨리고 밟았다.


괜찮다- 사실, 지금에서야 말이다.


습관처럼 함부러 말을 하는 사람들은 흔하게 말한다.

노력, 그 단어를 말한다.


노력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단어 나열만으로도 길고 복잡하다.


일상 사이에서 노력하지 않았던 적도 없었다.

사람들을 곁에 두고 서로 불편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조직, 직장, 일 사이에서 잠시라도 머물던 곳에서 작은 흔적이라도 남겼다.

일반적으로 정의하는 선을 넘어서 노력했다. 결과를 만들었다.


노력하지 않았다는 말,

내가 사는 이 일상에 소홀했다는 말에는

조금도 동의할 수 없다.


그런 말을 왜 들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함부로 쏟아지는 그 말들을

아직까지 이해할 수 없다.


미래를 위해, 이 진물이 낫고 마음 병까지 사라지길 기다리기를

돈이 있고 그것으로 걱정하지 않을 때까지 견디기를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어느 자리를 만들기까지 버티기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던 그때를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지금, 오늘, 현재를 살기로 했다.


검은 물로 흘러들어갈 씩씩한 결정을 못 내렸으니까.

전철 한복판에 떨어져서 수습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할 마음은 없었으니까.


어쩌면 나는,

노력, 언제, 꿈, 미래 따위는 잠시 미루어도 된다- 이야기 하고 싶다.

작은 것을 포기하지 못 해 전체를 포기하려 하는 당신에게.


어쩌면 나는,

누구나 이런 일상을 살아도 된다- 이야기 하고 싶다.


어쩌면 시선을 걱정하지 않고 그냥 하고 싶어서 했던 거의 첫 번째 일.

2005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나고 길에서 산타 모자를 팔았다.




#2


요즘 진물이 없다. 어린 날부터 이 날을 꿈꿨다. 진물이 없는 날이 온다면, 꿈꾸는 모든 일을 무모하리만큼 해보기로 수없이 다짐했다. 일기를 들추면 어느 날 장갑을 끼고 손을 묶고 간신히 잠들던 때로 돌아간다. 잠자다가 조용히 죽기를 바라던 날이 일주일에 네다섯 날이었다. 이제는 피딱지와 거친 가려움이 훈장처럼 남긴 깊은 목주름만이 남았지만 부끄럽지 않다.


진물 없는 날에는 무모하기로 다짐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직장이 아닌 곳에 나앉아 무모하게, 다시 무모하게 지내고 있다.


그 아픈 말, 아픈 마음을 듣고 싶어 하지 않을지 몰라도

그 시간들을 지났다는 말 정도는 하고 싶었다.


일상만은 포기하지 않고 견뎠다.

만나는 작은 것들에 집중했다.


나는 진물 없는 날을 바라면서

보통 일상을 꿈꾸게 됐다.


그래서 나는,

보통 일상을 듣는 별별 취미를 하나 들였다.


<목욕탕>이란 이름으로 부른다.

긴 시간 보통 일상을 듣고 문장으로 지루하게 정리하는 게 전부인 취미.

벌써 이백 명, 4년을 해오고 있지만 나이 쉰이 되어도 하고 싶은 작은 일.


나는 사람들에게 보통 일상을 이야기 하고 싶다.

내일이 아닌 지금, 오늘, 현재를 말하는 보통 일상.


일상을 묶은 문장들을 나열하려고 한다.

보통 일상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117.

돈 아닌 일에 관심 기울이는 사람은 드물다. 먹고 살기 위한 최소한을 넘어선 것에 욕심 부리지 않는다고 했다. 한 해에 한 가지씩 취미를 달리 한다면 훌쩍 나이 들었을 때 어떤 취미를 가져볼 수 있을까 고민한다고 했다.


118

그녀는 건강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행복했으며 하고픈 일을 떠올릴 때 밝게 웃을 줄 알았다. 스물의 초입은 늘 그렇게 싱그러우면 좋겠다.


122

그녀는 이제 막 스스로 해야 할 일을 찾고 망설이며 배우고 있었다. 모르는 일이 아는 일보다 많다는 것을 알면 그때 시작이다. 이제 더이상 고등학생이 아닌 일상을 듣는다.


127

이십대 초반 남자는 그렇다. 대학을 통해 낯선 자율을 겪고 다시 연애를 꿈꾸며 다가올 입대를 걱정한다. 그러면서 스스로가 누리는 일상을 하나씩 찾게 된다. 시행착오를 부지런히 겪을수록 수년 후 맞을 일상이 더 달고 기름질지 모른다.


130

어른에게 듣는 말은 달고 깊다. 쓴소리라도 그 뒤로 밴 진심은 세월이 만들었다. 배워가지 못 할 일은 없다. 적는 일을 멈춰 듣게 됐을 때 그렇게 배웠다.


132

낯설게 만났다. 만나서 일상을 들었다. 듣기로 해놓고 도리어 털어놓기도 했다. 일상 속 공감할 소재가 많았던 만남이었다. 그녀는 서툴지만 강했다.


162

일에 파묻혀 지냈다. 그때를 떠올렸을 때 아쉬운 일이있다. 사람에게 덜 다가가고 덜 마음을 열고 덜 이야기 했던 일이 아쉽다. 나는 스스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랐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말할 시간을 찾지 못 했다.

늘 따뜻하거나 미련하거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누구를 구분하거나 제한하려고 하지 않았고 그랬다고 믿었다. 스스로를 높이는 사람에게는 마음을 두지 않았다. 스스로를 낮추면 곁에 두고 싶었다.

어쩌면 과거 그 어떤 날보다도 여유를 찾지 못 했다. 어느 꿈을 꿨는데 그러면서 숨을 들이쉬다가 턱턱 숨이 막혀 체하곤 했다. 생각이 흩어져 잠이 들면 사람들은 걱정을 했고 이불을 덮어줬다. 바닥에 쓰러져 잠들었고 그때마다 사람들은 걱정을 했다.

어느 날 일을 접었다. 나는 단지 꿈으로 향하는 일을 하고 싶었고 누군가에게 말했던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단지 그뿐이었고 일을 접는다는 사실이 서운하거나 낯설지 않았다.

큰 파도처럼 후회가 밀려왔다. 일은 후회를남기지 않았는데 사람이 미련처럼 남았다. 그 기간 동안은 어쩌면 사람을 잃고 얻었고 실망했고 배웠던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그녀가 기억하는 것보다 내게 놓인 현실이 단지 '일'로 엮였던 범위가 컸을 때 그녀를 만났다.


163

재작년 여름이었다. 일상을 듣기로 했으면서 시간을 찾지 못 했다. 서로에게 밀려드는 내일, 다시 내일은 만남에 기약을 두지 않았다. 계획하지 않고 치앙마이에서 만났다. 그녀는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하고 있었다. 라이카 필름 사진기를 손에 들었다. 여행을 하면서 때때로 외롭다고 했다. 배에 탈이 났고 음식들이 아른거려 견딜수 없다고 했다. 느낌으로 찾겠다며 골목을 헤매다가 어느 카페에 앉았다. 수다를 떨었다.


164

낯선 자리에 앉아 땀이 차도록 글을 썼다. 보통 계획에 대한 글이었다. 글이 차오르고 방향이며 말을 재단하는 일은 흥미에 맞았다. 고양이에게 한창 시간을 내어줬더니 배가 고팠다. 밖을 나섰다. 베트남 설날 ‘뗏’을 맞아 큰 길에서 좁은 길로 들어가는 거의 모든 가게는 닫았다. 비빌 곳을 찾아 걷다가 노점에 기대어 쌀국수를 마셨다. 다리 저리도록 걸었다. 어느 카페에 들어섰다. 자리에 앉으며 익숙한 글자가 있는 책에 시선이 닿았다. 너스레를 떨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했다. 낯설면서 이상한 일이 거듭되는 사이에도 계속 일상 묻는 일을 했다. 잘 지내고 있음을 스스로 확인하는 일을 하고있다.


165

서울 올 날을 셌다. 세면서 하나든 둘이든 만나고 싶은 인연을 적었다. 서울 추운 바람 맞으면서 약속 셋을 잡았다. 처음 약속은 낯설게 받은 연락에서 시작했다. 어떤 실험을 준비하고 있다면서 이야기를 꺼냈다. 재작년 이맘쯤 시작했던 ‘목욕탕’을 이유로 만난 그 사람은 하고픈 이야기가 붐볐다. 주고 싶어도 전할 방법이 없던 쓰지 않았던 이야기를 할 기회가 아닐까 생각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하더라, 어떤 기업에서 1년을 근무하다가 퇴직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하더라. 어떤 자격으로 도움을 건네거나 흩어지지 말라 조언을 말하는지 스스로에게 웃음이 났다. 찾았다면 찾을 수 있다면 계속 나아가면 했다. 순수하지만 추진력이며 자존감이 떨어진 어느 날을 시기를 달리해 서로 만났다. 저기 저 사람이 이야기를 걸어 기분이 들떴다. 서로 괜찮다, 괜찮다 말 뒤에 감추고 있었다. 몇 시간을 떠들었다.


166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채용을 진행하고 있었다. 백 서른에서 넷으로 숫자를 줄였을 때 그를 만났다. 불편한 자리에 그를 불렀다. 미안한 마음에 긴 편지를 적어 보냈지만 몇 달이 지나도록 마음에 잔상처럼 그가 남았다. 일을 접었고 다시 만나자고 했다. 세종시 한복판으로 갔다. 미안했고 수줍었는데 만나길 잘했다 생각했다. 밀린 이야기를 긴 시간 돌아서 했다. 막걸리와 맥주를 마시면서 묻기는 처음이었는데 오락가락 해도 괜찮았다.다시는 만나지 못 할 것 같던 인연을 만났고 걷거나 이야기 했다. 자전거를 탔고 그가 이름을 나열하는 어느 사람들 이야기를 들었다. 지구를 구하는 사람을 만났다.


167

나는 요 며칠 헌법이 얼마나 아름다운 문장인지 체감했다. ‘필리버스터’는 끝이 예쁘지 않았지만 서로 배웠다. 그들은 정치를 한다면서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다. 이상한 일이다. 교과서에서 보던 그런 어른들은 어디서 만나는지 모르겠다.

따뜻한 인연을 기다리다가 연락이 닿았다. 동갑내기 ‘김민규’를 만났다.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기운을 얻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라디오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 마음으로 팟캐스트 ‘당신의 물건’을 꾸리고 있었다. 시작은 ‘필리버스터’ 이야기였고 틈틈이 그는 관련 소식을 살폈다. 일상을 듣기로 했다. 말이 쏟아졌고 주워서 담다가 포기하고 녹음했다. 곧 백수가 될 예정이라고 했고 그냥 산다고 했다.


168

그는 ‘여행이 가르칠 정도로 대단한가?’ 의문이 들었다고 했다. 그때 나는 태국 치앙마이에 집을 얻어 잠시 멈춰있었다. ‘쏘주’를 한잔 하자 들었다. 서울에서 만나 삼겹살과 소주를 했다. 나는 네 가지 방향으로 진행하던사업 계획을 꺼냈고 그때 만난 친구들 이야기를 했다. 구분을 두지 않고 누구나 여행 이야기 할 수 있는 판을 기획했었다 말했다. 그 이야기를 애써 맺었다. 도리어 듣기로 했다. 그는 꼰대가 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는 싸이월드에서 세계일주 클럽을 운영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여행을 업으로 삼아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살고 있다고 했다. 뒤늦게 아이들에게 줄 게 없을까 걱정되어 결혼한다면 외국에서 살 계획이라고 했다. 적어도 언어 능력은 줄 수 있지 않겠냐면서 웃었다. 불쑥 추운 날이었다.


169

공군에서 주최하는 제주 어느 일에 몇 가지 대행을 했었다. 그때 그와 인연이 닿았다. 그는 중위를 달고 있었으며 전역을 손꼽고 있었다. 제주와 오산에서 몇 번 대화하고 인사했고 몇 달이 지났다. 그는 녹색 양말을 신고 폴폴 뛰어 다니던 나의 모습을 떠올리며 사진을 걸었다. 그 소식을 보고 나는 수줍게 연락을 했다. 자리를 만들었다. 별 일 없이 만났는데 이야기는 괜찮았다. 낯설게 서로 살아가는 고민을 나눴다. 그는 그냥 적당히 산다고 했다. 되게 잘 사는 것 같진 않고 그렇다고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 근근이 산다고 했고 하루하루 살지만 절박한 의미는 아니라고 했다. 나도 그랬다.


170

‘청년’이란 말을 듣고 지내던 때가 있었다. 그는 늘 ‘청년’이란 이름으로 날 불렀다. 스물 다섯 신입사원이 듣기 시작하던 그 말을 다시 듣게 됐다. 우연하게 그것도 결혼식장 복도에서. 설레는 그 단어를 가만히 놓칠 수 없어 다시 약속을 잡았다.

강남역에서 신분당선으로 환승했다. 판교역에서 만났다.날은 쌀쌀했다. 판교 어느 6층 자리에서 밤을 맞고 새벽을 시작하던 날을 기억했다. 그 순간 모두는 기억 속에서 예뻤다. 그를 만났을 때 엊그제 일처럼 2011년, 2012년, 2013년을 입으로 말했다. 그는 지난밤 회식에서 과음을 했다. 숱하게 넘어갔을 그 술잔들이 떠올라서 웃었다. 남자 둘은 떠들었다. 웃었다. 그는 좋은 시간이었다 했다.


171

만 원 들고 한 주에 한 번은 꼬박꼬박 서울가던 인천 아이들이 있었다. 초등학생부터 중학생까지 몇 년을 다녔다. 이해도 못 하면서 전시를 다녔다. 둘이나 셋이 모여 갔다.버스와 전철 요금을 내고 입장료를 내고 맥도날드에서 빅맥 세트를 하나 주문하면 만 원이거나 돈이 남았다. 오천 원밖에 없거나 돈이 아예 없어도 서로 용돈을 나누면서 그냥 서울로 향했다. 재밌었다.

서울 다니던 셋은 서른이 됐다. 모이기로 약속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그때 그 코흘리던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친구와 나는 일찍 도착했다. 주차장에서 할 일이 없었다. 시간을 소비하면서 일상을 들었다. 서른인데 몸만 컸다.


172

그녀는 웃었는데 나는 울음이 났다. 그녀는 계속 웃었고 웃음 표시를 어디에도 달 수 없었다. 나는 듣는 내내 목 소매를 당겨 입을 가렸다가 열었다가 했다. 대구에서 만난 그녀는 꼭 찾던 사람이었다. 처음 만났는데 서로를 잇는 부분이 여럿이었다. 듣고 싶은 이야기가 톡톡 튀었다. 그녀가 일을 생각하고 스스로 놓인 오늘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배우고 돌아섰다. 독립출판 ‘정직한 마음’에 그녀 이름이 적혔고 연락했고 약속을 잡았다. 느낌이 돋았는데 연락은 옳았다. 그녀는 웃고 있었는데 생각 속에는 이미 두텁게 다져둔 고민들이 있었다. 널려있던 고민과 생각들 사이에서 몇몇 이야기를 들었다. 응원하고 싶었고 응원을 얻었다.


173

대구에 와서 찬 바닥에서 입김 호호 불면서 잤다. 나날이 춥고 거듭할수록 체력이 떨어져더운 바닥을 찾아야 하나 생각했다. 이게 무엇을 하는 건가 생각했다. 나는 흔들리는 시간을 반듯하게 접어 날리고 있을 뿐인데.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좋아하는 일을 하고 돈을 벌어도 회복되지 않으면 과연 나는 어디로 가서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씩 덜어내고 자리를 잡는 시간을 소모하고 있다. 사람이 상처를 받으면 무엇으로 회복하는지 잘 모르겠다. 대구에서 변변하지 않은 일만 할 생각으로왔다. 그 사이에 ‘최보규’를 만났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느낌이었다. 시련에 약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유리 같은 사람이었다. 서로 그런 이야기를 했다.


174

“고마워요.” 반복하는 사이였다. 일이나 사람 따위에서 무엇이든 견뎌야 하는 사이였다. 긴 이야기 나누지 못 해 서운한 사이였다. 괜찮은 사이였는지 모르겠다. 흩어지는 인연이 될 무렵 긴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표현하지 못 하겠다며 속상해 했다. 허세로 보일까 걱정했다. 일보다 스스로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는 과정을 힘들어 했다. 이야기 매듭마다 “좋아요.” 아니면 “괜찮아요.” 했다.

그녀는 “기가 빨렸어요.” 했다. 혼신을 다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175

오르락 내리락 하는 날이 있다. 들뜨면 현실이 아리고 내려앉으면 한없이 떨어지는 날이 있다.그녀를 만났을 때 날은 춥고 마음은 오르락 내리락 했다. 대구 어느 독립출판 서점에 앉아 낮이나 밤이나 별별 이야기를 했다. 걱정은 해도 지나치게 옭아매진 말라고 했고 흔들리더라도 무너지진 말자고 했다. 자격은 없어도 때때로 무거운 말을 했고 거의 가벼운 말을 했다. 경북대학교 서문 어귀에서 독립출판 책을 늘어놓고 같이 앉았다. 그 자리에서 일상을 들었고 이 기록은 그때 들었던 이야기 가운데 일부이다. 기댈 때마다 그곳이 부서지는 날이 있었는데 그 어느 날에 얽힌 기록이다.


176

누군가 손꼽아 기다리지 않는 편인데 그녀는 기다렸다. 실망할지 모른다며 그녀는 걱정했다. 그녀는 독립출판 형태를 빌려 ‘구질구직’이란 이름을 가진 책을 스스로 묶었다. 출판사는‘백전백패’를 이름으로 걸었다. 사전에서 ‘구질’은 앓은 지 오래되어 고치기 어려운 병, ‘구직’은 일자리를 구함, 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취업을 준비하는 그녀 글을 읽고 속상했고 웃었다.

벚꽃이 맺힌 날 만났다. 낯설었다. 긴 시간을 떠들었는데 소재는 모자라지 않았다. 그녀는“이야기 듣다 보니까 묘하다는 말을 많이 쓰시던데 매력 있는 단어예요.” 했다. 또 그녀는“자극적인 단어가 없는 대화라 좋았어요.” 했다.


177

잔잔한 일상을 듣는 내내 그녀가 짓는 표정을 살폈다. 보통 수줍었는데 때때로 웃음이 터졌다. 그녀는 스물한 살을 말했고 나는 그녀를 처음 만났다. 2층으로 이루어진 카페 입구에서 서성이다가 문을 밀어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 얼굴도 키도 목소리도 몰랐지만 서로 눈이 마주쳤을 때 나란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혹시?” 서로 어색하게 웃었고 음료를 주문했다. 2층으로 올라갔을 때 등 뒤로 고양이 그림이 있었고 나무 탁자에 팔을 짚으며 앉았다. 그녀도 나도 어색했지만 그래도 나는 몇몇 사람들을 계속 만나오던 사람이다. 앞서 말을 꺼냈고웃었으며 긴장을 헤치는 몇몇 장애물을 옆으로 밀어두었다. 태국에서 온 그녀에게 시간을 빌렸다.


178

그리고 9월이 됐다. 여름 나기가 힘겹지 않은 여름이 있었겠냐만 나는 이 여름이 유독 더 길고 힘겨웠다. 어쩌면 기억이 맞다면 그 저녁 나는, 거의 반년만에 마음이 편했다. 몇몇이 둥글게 모여 부산으로 뛰어 들었다가 흠뻑 웃고 돌아왔던 그런 저녁이었다.

그 저녁이 있는 방 곳곳에는 저마다 사연 하나씩 꼭 틀어쥔 물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가방 하나, 우산 하나,쓰레기 한 줌으로 흩어져 여행이 남긴 흔적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 귀퉁이에 앉아 일상을 들었다. 사진을 좋아하는 사소하게 웃는 소소한 순간을 아끼는 말하지 않았지만 이미 익숙했던 그런 일상이었다. 그는 수줍게 웃으면서 “별 얘기가 없어요.” 말했다. 녹음을 돌려 듣는 내내 그는 웃다가 수줍었다.


179

일상처럼 잔잔한 문장을 만들고 싶을 무렵, 연락을 하나 얻었다. 연락에는 긴 문장이 담겨있었다. 어떤 주제로든 대화를 하고 싶다는 문장은 그 시기, 그 순간 내게 특별했다. 며칠 뒤 낯선 그 남자와 나는 만났다. 궁금한 일은 무엇인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지 서로 하나씩 꺼내면서 시간을 소모했다.

그는 가슴 떨리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PCT(Pacific Crest Trail)를 걷고 왔고 다시 찾을 가슴 떨리는 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도움을 서로 주고 받을 수 있을지 사실 잘 몰랐지만 거짓을 포함하지 않았던 그 대화 그 느낌 그 마음이 긴 잔상을 남겼다. 어쩌면 계속 실패하고 다시 또 다시 그 가슴 떨리는 일을 찾아 어딘지 모를 길 위에서 서로 망설일지 모른다. 서로 망설일 때, 그때 손을 내밀 그런 인연이면 그런 기억이면 어떨까 생각했다.

캄보디아 씨엠립에 보름을 있었다. 그냥 가만히 그냥 어느 구석에서 이 문장을 정리했다. 길을 걷고 커피를 마시고 지쳐버렸을 그때, 가슴 뛰는 일을 찾는 이 기록 이 순간이 작은 위로가 되는 상상을 했다.


180

어쩌면 긴 시간 이어가는 이 기록이 흔들리는 일상 속 몇 안 남아있는 끈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흔들리는 일상 어느 복판에서 그를 만났다. 그 시기 나는 아팠다. 이상하게 기운이 없고 면역력이 가파르게 떨어졌다. 염증이 오르거나 가렵거나 했다. 멀리 계속 멀리 도망쳤고 캄보디아 씨엠립에서 며칠 계속 앉아만 있었다. 세상 그리고 사람들이 무섭고 낯설었다.

그는 내가 가만히 앉아 있는 앙코르 게스트하우스를 며칠 뒤면 인수한다 말했다. 새롭게 무엇을 만들고 어떤 시도를 해볼 생각이라면서 그는 웃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을 사소한 기억 사이에서 또렷하게 기억한다. 설렌 이야기였다.

거의 매일 그는 한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자리에 앉으면 잿빛 고양이 한 마리, 어린 금빛 고양이 한 마리가 엉겼고 그 사이에서 그는 노트북을 만졌다. 그러다가 문득 프놈펜에 간다는 그를 따라나섰다. 빠르게 움직였고 롱 찬다라, 빈 방, 보쌈, 국수, 빔 프로젝터, 벽지, 소나기를 만났다. 프놈펜 일정은 만 하루를 채우지 못 했다. 캄보디아 뽕짝 사이로 나란히 버스 의자에 앉아 씨엠립으로 돌아오는 어느 오후, 일상을 들었다.


181

여행은 거짓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믿었던 사실이나 현실은 여행에서 거짓이 됐다.

꼭 그렇게 서울을 벗어난다고 더 나은 현실은 없었다. 꼭 그러지 않아도 어떤 방황을 하지 않아도 이 현실 위에서 잘 지낼 수 있을지 모르는데 나는 더 나은 현실을 찾고 싶었다. 하필이면 여행에서.

사람이 그립고 거짓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무렵 여행에서 돌아왔다. 나는 아직 세상이 검정이라고 믿으면서 다시 세상을 검정이 아니라고 믿기 위해 돌아왔다.

세상은 아직 검정이고 나도 계속 검정이지만 그렇다고 검정이 맞다고 믿을 생각은 없다.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서로 덜 지치고 함께 잊지 않고 당신이 그리고 내가 아픈 일을 계속 살피고 지내면 좋겠다.

여행에서는 다그치는 사람들을 덜 만났다. 덜 지치고 덜 아프려고 덜 다그치려고 나는 여행을 찾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했다.
당신 생각을 했다.


182

그녀는 표선면 표선리 어느 조용한 바다 앞에서 거의 한 달을 살고 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수줍었다. 서로 며칠을 데면데면 했다. 공간에 아직 찬 공기만 머물 때 함께 정리를 하고 물건을 채우고 설거지를 함께 했다. 거의 나가지 않았고 가끔 다녔다. 그녀가 때때로 버스를 타고 먼 길을 다녀오게 되면 추위를 피해 데리러 갔다 데려 오면서 별별 이야기를 했다. 낮이나 밤에는 칭찬 받길 좋아하는 그녀에게 어쩌면 긴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좋아할 수는 있지만 어떤 위로가 될 수는 없겠다고 생각했던 그 시간과 공간에 그녀가 있었다. 늘 그랬고 지금도 그렇듯 일상은 쉽지 않아서 늘 어렵지만 그녀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오빠 이거 어때요?" 물어보는 순간들을 이제 꼭 기억하고 싶었다. 아침이 밝았고 바람이 덜 불고 바닷물이 빛나고 있는 어느 일상 사이에서 다 씻고 나와 화장을 하러 가는 뒷모습을 봤다. 사람들은 둥글게 앉아 밥을 먹거나 웃거나 가만히 누워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183

정신 없는 시간 사이에 만났던 그 남자는 때마다 부끄럽게 웃었다. 애써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지 않고 조용하게 어울렸다. 만나는 인연 하나하나에 조심스러웠다. 서툴더라도 서두르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어느 이른 낮, 사람들은 부스스 일어나 ‘짜글이’를 찾았다. 그는 한 냄비 끓여 내놓고 사람들은 둥글게 모여 식사를 했다. 자연스럽게. 함께 식사를 하면서 한 끼, 한 끼마다 가까워졌다. 아무 일 없었지만 좋았다.

사람들이 공간을 잠시 비웠을 때 자리를 나눠 앉아 이야기를 했다. 그가 떠나기 전, 잘 지내는지 잘 지냈는지 물었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문장들을 보니, 시간이 꽤 흘렀다.




#3


나는 참으로 긴 시간을 돌아
아빠에게 약속한 것들을 지켜나가고 있다.
또 무너질 듯하던 나는 어느새 다시 자리를 잡았다.

동인천 병원 501호에 들어갔을 때
나는 어쩌면 오늘을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살고 싶어도 그러지 못 할 때
더 서로를 걱정하며 사랑하는 법을 배웠고
더 아프도록 현재를 아끼지 않고 사용해야 하는 이유를 알았다.


나는 지금 잘 지낸다.

어쩌면 불안해서 더 잘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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