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사의 CEO 에드 캣멀이 직접 쓴 '창의성을 지휘하라'
먼저 밝혀둘 것은 자기계발서나 CEO 자서전 류의 책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읽지 않는다. 대부분 '결과' 만을 담고 있고 그 '과정'을 만드는 고민을 고의로 누락하여 마치 영웅담이나 세상의 유일한 해법을 발견한 듯 주장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더욱 심각한 문제점은 성공의 원인을 특정 요인으로 한정하기 때문에 실제론 어떤 상황에서 어떤 요인이 영향을 주었는지 학습할 수가 없다.
하지만 지난 주말 여자친구의 소개로 우연히 읽은 이 '창의성을 지휘하라'는 정반대의 책이다. 어쩌다보니 픽사라는 조직을 만들게 되고 스티브 잡스를 만나고 디즈니까지 총괄하는 사장이 된 '과정', 즉 프로세스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훨씬 보편적이고 실증적인 경영학을 소개하는 책이다. 회사의 비전과 문화, 조직을 바꿀 수 있는 경영자 관점의 서적이므로 팀장 이상의 경영자에게 더 추천하고 싶다. (아무래도 직원입장에서 본다면 우리회사는 왜 이런 리더가 없지, 라는 생각이 들 것 같다.)
책의 저자인 에드 캣멀, 그는 누구인가?
79년 스타워즈를 만든 조지루카스의 회사에 입사하여 이미지 합성 기법을 개발. 86년에는 스티브 잡스, 존 래스터와 함께 픽사를 창업. 이후 아카데미 상을 5차례 수상. 14편의 픽사 작품은 연속으로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 최초의 장편 3D 애니메이션인 토이 스토리 제작. 2006년 디즈니가 픽사를 인수합병한 뒤 디즈니 애니메이션 사장이 되었고 곧 라푼젤, 주먹왕 랄프, 겨울왕국을 히트 시키며 16년간 침체기를 겪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부활시킴.
이런 Fact만 보면 태어날 때부터 대단한 능력을 가진 천재가 픽사에서 작품을 만들 때마다 짠, 하고 나타나서 창의성을 발휘하여 성공을 만드는 마이더스 같은 존재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컴퓨터 공학자로 스토리제작에 재능이 없음을 깨닫고 좋은 인재를 확보하고 무엇보다 '창의적인 조직'을 만들기 위해 기업의 문제를 해결하는 경영자이다. 사실 그림과 각본에 재능이 없어 컴퓨터 공학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3D 애니메이션을 만들게 된 계기가 되었다. 즉 어떤 천재성이 아니라 창의성을 발휘하기 위한 조직을 만들어 나가는 문제해결력이 뛰어난 사람이 더 정확한 표현이며 이 책은 그러한 창의적인 문화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한 방법과 시행착오를 담은 일종의 수기이다.
에드 캣멀과 함께 한 세 명의 리더 - 알렉스 슈어, 조지 루카스, 스티브 잡스 3명의 리더
억만장자인 알렉스 슈어는 에드 캣멀이 박사과정을 마치자 새로운 부서를 맡을 기회를 주고 전권을 위임하였다. '나보다 더 똑똑한 사람을 채용하자' 는 원칙을 이 때부터 실행하게 되었으며 이 후 그는 스타워즈로 최초의 컴퓨터 그래픽을 시작한 조지 루카스의 루카스필름에 들어간다.
기술이 영화 제작 과정에 새로운 가치를 더할 수 있다고 믿게 된 계기가 되었으나 조지 루카스의 이혼으로 CG를 담당하는 그래픽 파트를 매각하면서 84년에 해고되고 1년 뒤인 85년에 스티브 잡스를 만난다. 스티브 잡스는 당시 애플에서 쫓겨난 뒤 애플에 복수하기 위해 애플과 경쟁할 PC를 만들자 하였지만 에드 캣멀은 당시 이 제안을 거절한다. 몇 년 뒤 NEXT 컴퓨터로 화려하게 복귀한 스티브 잡스는 최초의 3D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비전에 동의하며 함께 픽사를 시작하게 된다.
토이스토리의 탄생, 픽사 신화의 시작
토이스토리는 역사상 첫 번째 3D 애니메이션이었고 픽사를 약 8년 이상의 적자에서 구해준 영웅이다. 그는 '성공해야 할 필요성'과 '무지'가 조합되어 이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고 하며 동시에 최초의 목표인 '3D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을 이루며 다음 비전을 고민하고 이윽고 지속가능한 창의적 조직문화를 조성하는 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선정한다.
사실 경영자로서 가장 큰 공감이 되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처음 조직을 만들 때는 시장을 늘리고 좋은 인재를 확보하고, 누구나 알 수 있는 그런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야지 하고 생각하지만 막상 이 것이 어느 정도 달성되면 그 뒤에는 구체적인 목표를 잃게 된다. 이 시점에서 철학이 필요하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다음의 고민은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이다. 세상에 어떤 흔적을 남기고 싶은 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는 점과 그 결론이 많은 부분에서 감정몰입이 된 부분이었다.
픽사의 원칙 : 스토리가 왕이다, 프로세스를 신뢰하라
좋은 경영자는 성공공식을 만드는 사람이다. 그는 토이스토리의 성공을 재현하기 위한 일에 몰두하는데 첫 번째는 스토리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한 프로세스가 중요하다는 것을 픽사의 원칙으로 삼는다. 흔히 창의성인 사람들이란 몇 일만에 미친듯이 시나리오를 쓰고 제작자에게 시나리오를 던지는 그런 영웅 같은 모습을 기대하지만 실제 창의성이란 물집이 나올 때까지 펜을 잡고 있는 시간에 비례한다.
픽사이든, 애플이든, 구글이든, 어떤 회사든지 간에 1,2명의 핵심인력이 마법을 부리는 회사는 없다. 실제로는 토이스토리의 제작에 5년이 걸리고 수도 없이 스토리를 뒤집었던 것처럼 인고의 시간을 견디고 불확실성에 감내하는 자세, 여기에 약간의 재능이 추가된 것이 바로 창의성이라는 것이기 때문에 픽사는 1) 하루에 한 번씩 팀 내부에서 피드백을 하는 데일리 미팅, 2) 전체 직원들과 소통하는 노트 미팅, 3) 제작단계의 작품을 다른 팀과 함께 리뷰하는 브레인트러스트 리뷰 등의 프로세스를 꼼꼼하게 만들었다.
즉 창의성을 만들 수 있는 프로세스와 환경, 의사결정 원칙을 만들었기 때문에 창의적인 작품을 연속적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책에 적힌 다양한 방법론은 구글이나 우리 회사 역시 창의성을 높이기 위해 하고 있는 것들로, 나 역시 창의성은 프로세스에서 나온다고 믿으며 실제 이러한 프로세스에서 나온 결과물이 가장 창의적이었다. 즉 중요한 것은 창의적인 결과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창의적인 결과물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좋은 리더를 평가하는 방법
에드 캣멀이 말한 '리더를 판단하는 것은 현장 직원들이다. 현장 직원들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평가 소스이다. 만약 팀원들이 잘 협력해 핵심적인 문제를 풀고 있다면 경영자로서 합격'이라는 말에 100% 동의한다. 리더의 의미는 리더 스스로가 아닌 팔로워의 역량에 의존한다. 리더의 역량을 결정하는 것은 팔로워이다.
동시에 실무적으로 픽사가 성장하며 좋은 리더들이 발굴되지 않는, 모든 기업의 경영자가 겪는 문제를 제시한다. 회사가 커지며 좋은 리더가 발굴되지 않는 이유는 작은 회사 였을 때와는 달리 리더들과 함께 하며 능력을 흡수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를 멘토링 제도로 극복하고자 하였으며 제작감독과 약 8개월간 함께 근무하며 지식을 흡수하는 방법을 도입하게 된다.
변화와 불안에 대처하는 방법
성공할 수록 구성원들은 변화를 두렵게 느끼게 된다. 이미 성공한 회사에서는 성공은 당연한 것이고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곧 실패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성공한 회사들이 점점 경직되는 경향이 있는데 픽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부분은 책에 상세하게 나와 있어 생략하지만 인상 깊은 방법은 픽사 유니버시티와 단편 애니메이션의 제작을 통한 회사의 문화를 만들어간 것이다.
픽사 유니버시티는 당초 직원의 역량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고 요즘도 픽사의 장편 애니메이션 앞에 등장하는 짧은 애니메이션은 새로운 기술을 시도해보고 새로운 감독을 발굴하기 위한 것이 초기의 주 목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목적은 모두 달성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자유로운 소통, 단편 애니메이션을 통해 이윤 뿐이 아닌 작품을 소중하게 대하는 회사라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았게 되었으며 바로 이것이 가장 큰 성과가 된 것이다.
경영자로서의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책
이 책의 가장 큰 가치는 에드 캣멀이 처음 픽사를 만든 80년대 초반 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했던 수 많은 고민과 실패들을 고스란히 적어 두었다는 점이다.
'왜 직원들은 예전만큼 창의성을 발휘하지 못할까', '왜 직원들은 경영자들에게 솔직하게 이야기 하지 못할까', '이제 나는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하는가', '천재를 만났을 때의 무기력함', '나는 직원들에게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와 같은 경영자라면 누구나 느낄 만한 이야기들을 구체적이고 솔직하게 적어 두었다.
픽사 내의 경영적 기법을 배우는 의미도 있지만 나에게 있어 이 책은 동료의 일기장을 훔쳐본 듯한 느낌으로 단 숨에 읽어내릴 수 있었다.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경영자라면 반드시 추천하고 싶은 너무나 인간적인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