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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식 Oct 18. 2024

나의 여행-- 역사와 함께 터어키 2.

투프퀼 소금 호수

나의 여행--- 역사와 함께 터어키 2.


서로마 제국이 313년  멸망하기 전에 지금의 터어키 땅에  동로마 제국이 세워진다.  

이곳에 황제의 이름을 딴 콘스탄 티노플( 현재 이스탄불 )이란 이름의 도시를 건설해서 동로마제국을

세운다.


동로마 제국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로도 1200년을 더 지탱하며 중세기 비잔틴 제국까지

콘스탄 티노플은  역사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 유명한 1000년의 제국을 이끈  동로마 제국 은  중세사까지 계속된다. 중세기엔 비잔틴 제국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비잔틴 제국.  



그리고  오스만 튀르크의 침략으로 ( 서기 1453년 ) 멸망하기까지 비잔틴 제국은 중세사의 중심에

서있었다.

멸망하기 전 3년간 비잔틴 제국은 온갖 정보전과 외교 전을 동원하여 전쟁을 막아보려 하였지만 젊은

군주 오스만의 메흐멧 2세의 정복욕을 멈출 수가 없었다.


동로마 제국이 멸망당할 즈음에 그 당시 기독교 도시 국가들인  제노바, 베네치아 등 많은 도시국가들이

비잔틴을 도와주러 오고 있었지만  오스만 터어키의 해군과  언덕에서 쏘는 포에 의해 접근을

하지 못하고 있던 차에 콘스탄 티노플이 함락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본국으로 돌아가버린다.


기독교국가가 이슬람 국가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콘스탄 티노플


아마 그전에 술탄 메흐멧 2세 가 이끄는 오스만 루크와 공방전을 한다는 것이 그들에게도 부담이 돼

었을 것이다.


 오스만 루크의 “애니 체리 “부대는 용감하고 전투를 잘하는 부대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부대의 구성원 은  어릴 적 유럽 나라에서 포로로 잡혀온 어린 소년 들이었다.

술탄은 그들을 전사로 만들어 겁 없는 군대로 만들어 놓았다.


애니체리 부대


전사에 의하면 그들이  나팔을 불며 다가오면 적군이 엄청난 공포를 느끼고 도망갔다고 한다.

오스만 튀르크는 중세사부터  근세사까지 이어져 내려오다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제국이

무너지고 만다.


터어키는 세상의 역사 중 가장 드라마틱하고 많은 전설과 이야기들이 있는 곳이다.   




터어키는 인류의 긴 역사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터어키는 오랫동안 여행하면서 느끼고 교감하면서 여행해야 하는 곳이다.  


고대사, 중세사, 근대사, 현대사 가  잘 알려져 있고  우리가  느끼고 교감할 수 있는 풍부한 역사를

가진  나라이다.


터어키는 투르크족(돌궐족 )인데 우리 교과서에서도 공부한 적 있는 익숙한 이름인 셀주크

투르크 , 오스만 튀르크로 19세기까지 세상을 호령하던 제국이었다.


우리를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이 오래전 돌궐족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돌궐은 흉노의 후예이고 오랫동안  중국을 괴롭힌 나라였다.


그도 그렇것이 중국도 먹을 것이 풍부치 않은데 추운 곳에 사는 북쪽 종족들은  자꾸 먹을 것을 구하러

남쪽으로 내려오며 중국을 침범하자 오래전부터 만리장성을 쌓으며 그들의 남하를 막고자 했다.


고구려와 돌궐은 이웃한 나라로 중국에 대해서는 서로 협력을 했다.

돌궐은 반복되는 중국의 원정으로 그들은 민족이동을 할 수밖에 없었고 서쪽으로 계속 이주하다 터어키

지방에 까지 와서 정착하게 되었다. (서돌궐족 )


그리고 남아있던 동쪽 돌궐은 몽고의 지배를 받다가 역사에서 사라진다. 신장지역의 위그루족이

그들의 후손이라 볼 수 있다.  


여행을 하다 보면 터어키는  고대사부터 중세사 근세사. 현대사 가 합쳐진 곳이라는 것을 곧 알 수 있다.

그래서 지명도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면 성경에서 나오는 비시디아 안디옥 은 현대 지명은 콘야이다.   비시디아 안디옥은 시리아

에있는 안디옥 과는 다른 곳이다. 그리고 바닷가에 잇는  서머나의 현대이름은 이즈미르이다.


 그리스 서사시에 나오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신들의 이야기 )와  오디세이(인간들의 이야기)의

발생지이기도 하고 우리에게 유명한  , 트로이 목마, 파리스왕자, 아킬레스, 아가멤논 등  이야기 가

트로이 도시국가를 중심으로 고대사가 전개된다.


실지로 트로이 (성경에서는 드로아라고 나오는 )에 가보면 각 단층에서 시대별 로 다른 단층을 볼  

있다.


보통 도시들은 기존에 있는 도시들위에 다시 건축된다.

새로운 정복자들은 기존에 있었던 모든 것들을 부수고 그 단층 위에 새로운 도시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 텔 ‘이라 부른다.


5천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여리고 (이스라엘 ) , 도 그렇고  텔아비브, 예루살렘 , 므깃도 등 오래된 도시

들에게서 이런 역사 단층들을 볼 수 있다.


트로이(드로아 )에서는 목마만이 아니고 이런 단층을 보면서 이유야 어떻든 한시대가 영원 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시대는 파괴되고 그 위에 다른 문명이 오고 다시 파괴되고 현대에 이르게 된다.

그러면서 지반은 점점 높아진다.


특별히 그런 곳들은 군사적으로 중요 한 곳이거나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잇는 곳이

많다.


트로이의 언덕 위에 올라가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저 건너의  유럽을 바라보면서 옛날 트로이 에 도착한

사람들도 이 언덕에 올라서서  바다 건너 저 건너편을 바라다보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둘러보았다.


그중에는 사도 바울도  바울의 제자 디모데도 유럽에 여행 가는 여행자들도 알렉산더의 군대들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그곳을 방문한 날도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이 바람을 잘 이용하면 저 바다도 쉽게 건널 수 있을 것 같았다.


커다란 돛을 달고  사도  바울도 디모데도 저 바다를  건넜을 것이다.

사도바울은 여기서 오래 머물렀던 것 같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잡혀있을 동안에 제자 디모데에게 부탁하는 내용이 성경에 있다.

로마로 오는 도중에 드로아(트로이 )에 사는 가보의 집에 있는 외투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다.

특히 양피지에 쓴 책들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바울도 이곳을 지난 것처럼 나도 이곳을 지나간다.


트로이 바닷가

                                            트로이 " 텔 "

이제  갑바도기아로 향한다.  가는 도중 투스귈 이라는 곳에서 소금 호수를 보았다.

남미 볼리비아 우유니 사막 가운 데었는  소금 사막과 비교할 만큼  큰 엄청난 천연 소금 호수였다.


우유니처럼 소금으로 만든 집은 없지만  얕은 호수 전부가 소금이라서 아마 위에서 보면 거대한

거울처럼 보일 것 같다.


갑바도기아로 가는 도중 지나가기 쉬운데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소금 호수를 보게 된 것이 다행이다.


나도 어릴 적 염전을 자주 다녔다.  부모님이 염전을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염전은 태양열 발전소로 바꾸느라 바쁘다.


왜냐 하면 염전은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유니나 이곳 투르퀼도 천연 그대로 놓아 둘 수 있을 만큼 큰  땅을 가지고 잇는 것이 부럽다.


투르킬 소금 호수


로마의 황제들은 제국의 통치를 순조롭게 하기 위해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사상을 전파했다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자들은 제국을 거부하는 자로 견주어 죽이는 일이 다반사였다.

가장 피를 본 사람들이 그리스도 인들이었다


유일신으로 절대로 우상을 섬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로마에 사는 그리스도 인들은 카타콤이라 불리는 지하동굴로 들어가 숨어 살았다.


카타콤


마찬가지로 이곳 동로마 제국에 살았던 그리스도인들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 지하로 내려갔다.

그들은 갑바도기아 지역에 지하 동굴을 만들어 대대로 살았다.


         괴레메

데린구유

지하동굴을 내려가다 보면 중요한 길목마다 길을 막을 수 있는 장치를 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적이 칩입할 때 도망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고 더 이상 들어올 수 없게 하기 위해 장치를 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지하에는 곳곳에  모임의 공간, 예배당, 식당 등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놓았다.

층층이 밑으로 연결이 되고 상하 고저로 거지줄처럼 미로를 만들어  칩입자들을 막았다.


동굴 안에 벽화도 그리고 조형물도 만들어 놓아서 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었다.

신앙이 얼마나 중요하길래 빛도 들어오지 않는 지하에 들어가 살려고 하였을까?


믿음 그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그들의 인생에서 중요한 건지 그들은 온갖 편하고 안락한 생활을

모두 버리며 살아간 것이다.

이곳 갑바도기아에서, 이스라엘 맛사다에서 그런 모습을 보았고 , 카다콤에서 도 광야의 수도원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았다.


그들이 생각하는 “자유” 는 믿음의 자유 , 영혼의 자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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