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훈아의 '영영'을 부르는 교포 남편
노래하는 걸 좋아하는 나를 위해 남편은 어느 날 블루투스 마이크를 사 왔다. 우리는 그날 곧바로 거실의 큰 TV 화면에 유튜브 노래방 영상을 띄웠다.
나의 선곡은 모조리 한국 노래. 심지어, 8-90년대 발라드를 유독 좋아하는 나는 오랜만에 그 시절 감성에 젖어, 내 있는 감정 없는 감정을 모조리 끌어올려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남편의 선곡.
영영
그렇다. 1.5세 도도한 교포 남인 남편의 선곡은, 다름 아닌 나훈아의 '영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남편의 노래.
잊으라 했는데. 잊어달라 했는데. 그런데도 아직 너를 잊지 못하네. 어떻게 잊을까. 어찌하면 좋을까. 세월가도 아직 난, 너를 잊지 못하네. 아직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나 봐.
세상에...
어찌나 웃었던지. ㅋㅋㅋ
힙합을 좋아하고 랩만 하는 남편이 서투른 한국말로 나훈아의 영영을 부르는데, '그에게도 한국인 피가 흐르긴 흐르는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두 개의 다른 자아가 충돌해 낯설면서도 익숙한,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 들었다. 나훈아의 영영은 시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노래라고 했다. 그렇게 한국 문화를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접했던 남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한국 문화가 자신의 일부가 된 것이다.
나를 만나기 전 오랫동안 한국 드라마나 노래를 듣지 않았다던 남편은, 나와 만난 이후 강제적(?) 혹은 반 강제적으로 많은 한국 드라마와 영화를 접하게 됐다. 한 때는 나보다 더 꼬꼬무에 꽂혀 한국 근대사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고, 나의 부수적인 설명까지 더해져 지금은 제법 깊이 있는 이해를 갖추게 된 것 같다.
나의 뿌리가 된 나의 문화에 대해 대화하고 공감할 수 있다는 것. 그건 우리 관계에서 큰 플러스 요인이자 근본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나는 아마 외국인과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토종 중에서도 토종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남편과의 이 교차점이 굉장히 중요했다. 그래서 2세보다는 1.5세인 남편과 더 쉽게 연결고리가 만들어진 게 아닐까?
하... 진짜 영어 때문에 미치겠어. 회사에서 미팅 중에 아무 말도 못 했어...
영어에 대한 나의 고민을 가장 많이 들어주고, 힘을 주고, 또 가장 많이 도와주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남편이다.
남편은 어렸을 적 미국에 왔기 때문에, 영어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야생에 던져졌다. 부모님이 집에서 기본적인 것을 열심히 가르쳐주셨고, 어린 나이에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는 속도는 훨씬 빨랐지만, 어려움이 없지는 않았다고 했다.
<남편의 이야기>
아버지가 야구를 굉장히 좋아하셨어. 그래서 TV로 함께 야구 중계를 자주 보면서 야구 용어에 대해 배웠지. 어렸을 때 리틀리그에 들어가서 야구를 했었는데, 어느 날 공이 라인 밖으로 넘어가 파울이 된 거야. 그래서 외쳤지.
남편: 아! 저거 파울이야!
친구들: (... 뭐라는 거지?) 아니야. 저거 퐈울이야.
남편: 아니야. 파울이야!!
친구들: 아니야. 퐈울이야!!!
나는 ㅍ발음을 P로 해서 정직한 한국식으로 발음했고, 그들은 F 발음을 썼던 거지. "퐈울" 이라고.
그때 그 순간 느꼈던 창피함은 아직도 잊지 못해. 내 기억 한편에 깊이 새겨진 것 같아.
남편은 어릴 적 이런 사소한 에피소드들이 꽤 많았다고 했다. 왜 없었겠나. 아무리 어린 나이라도 새 언어를 배우고 쓴다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 그렇기 때문에 내가 겪고 있을 어려움을 어느 정도는 이해한다고 했다. 만약 그가 "그냥 열심히 하면 돼! 왜 그렇게 빨리 영어가 늘지 않는지 이해를 못 하겠어" 이렇게 말했다면? 아마 나는 그와 대화도, 관계도 오래 이어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남편은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며, 늘 본인의 이야기가 나에게 작은 영감이 되길 바랐다. 그리고 어떻게 두 언어를 익힐 수 있었는지 종종 조언해 주었다. 물론 남편과 나의 상황이 같지는 않았지만, 나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도와주려는 그 마음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던 것 같다.
사실, 가장 큰 교차점은 한국어이다. 남편이 한국어를 하지 못했다면?
이관계는 어디로 갔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친한 미국인 동료들과도 가끔 속 깊은 대화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늘 내가 말하려는 바가 제대로 전달이 되었을지, 어쩌다 가끔 장난을 쳤을 때도 이게 장난으로 받아들여졌을지 의문이 들곤 한다. 또 많은 경우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기도 한다.
그렇기에 백 퍼센트 미국인과 만난다? 나 같은 토종 중의 토종이?
상상할 수 없다. ㅋㅋ
*커버 이미지: Photo by Michael Hamments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