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으로 서랍장을 구매한 적이 있다. 사진으로 봤을 때는 그렇게 크지 않아보여 가벼운 마음으로 택시를 타고 갔다. 그런데 거래장소였던 아파트는 생각보다 까마득한 언덕 위에 있었고, 도착한 뒤에도 한동안 판매자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시간이 다소 지난 뒤 연락이 된 판매자는 카트를 끌고 서랍장을 가지고 내려왔다. 생각보다 서랍장이 크고 무거워서 놀랐다. 판매자도 내가 차를 끌고 오지 않고 택시를 타고 온 것에 놀란 눈치였다. 생각과 다르긴 했지만 트렁크에 실을 수는 있을 것 같아 구매하기로 했다.
- 여기 돈 드릴게요.
나는 판매자에게 2만원을 내밀었다.
- 아...네 안녕히 가세요.
그렇게 인사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판매자의 표정은 어쩐지 떨떠름해보였다. 그런데 그 이유는 잠시 후에 알 수 있었다.
원래 서랍장 가격은 2만 5천원이었는데, 내가 2만원으로 착각한 나머지 너무도 당당하게 2만원을 내밀었고 그 결과 본의 아니게 네고를 해버린 것이다.
그 뒤로 나는 종종 이 거래를 떠올렸다. 나는 사실 네고를 하지 못하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네고를 하는 상상만으로도 어쩐지 주눅이 든다. 그런데 착각 때문이긴 하지만 처음으로 얼떨결에 네고에 성공했다. 여러가지 요인들이 있었겠지만 나는 그 중에 기세도 포함이 된다고 생각한다. 정말 가격이 이만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만원을 내밀 수 있었고 그게 일종의 기세를 만든 것이다.
영화 <기생충>에서도 기세가 등장한다.
시험이라는게 뭐야? 앞으로 치고 나가는거야. 그 흐름을, 그 리듬을 놓치면 완전 꽝이야. 24번 정답? 관심없어. 나는 오로지 다혜가 이 시험 전체를 어떻게 치고 나가는가, 어떻게 장악하는가 거기에만 관심있다. 실전은 기세야 기세. 알겠어?
<기생충>에서 기우는 학력을 위조하고, 나아가서는 가족들을 모두 부잣집에 취업시킨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이야기다. 하지만 현실적인 장애물들을 넘어 앞으로 치고 나갈 수 있는 힘, 즉 기세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다.
"아버지. 전 이게 위조나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 내년에 이 대학 꼭 갈 거거든요."
라는 대사에서 알 수 있듯이, 기우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전혀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버드 협상 강의>에서도 협상에서 기세가 중요한 작용을 한다고 언급한다. 기세를 잡은 쪽이 협상의 흐름을 유리하게 전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세는 유리한 입장일 때만 가질 수 있는 걸까? 아니다. 불리할 상황일 경우에도 기세를 가질 수 있다. <하버드 협상 강의>에서는 불리한 상황일 경우, 기세를 잡기 위해서는 협상에 흥미를 보이되 비굴한 태도를 띄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세는 경험이 없으면 실제로 협상에 적용하기 어렵기 때문에 경험을 많이 쌓을 필요가 있다고 한다. 평소에 네고를 잘 하지 못했던 사람이라면 당근거래를 할때 한번쯤 시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어쩌면 인생에 더 중요한 협상이 찾아왔을 때, 기세가 필요할지 모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