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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린정원 Sep 08. 2019

빅이슈가 전해준 감동

2015년 8월, 그리고 2019년 9월

2015.08.17


1

매일 지나다닐 수밖에 없는 을지로 입구역에는 늘 노숙인들이 많다. 매캐한 냄새 때문에 멀찌감치에서부터 존재감을 드러내는 분들이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 즈음, 방송에서 을지로 입구역 노숙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접했다. 강원도 산골에서 초등학교만 나와 일거리를 잡았던 한 남자는 무슨 기구한 사연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하철 역을 전전하며 산지 몇 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 스무 시간 가까이 폐지를 주워 손에 쥐는 것은 몇 천 원밖에 되지 않는단다. 식사는 하루 한 끼가 기본이고 그것도 거를 때가 많다고 했다. 그러다 폐지 값이 떨어져 리어카를 한 가득 채워 가져가도 밥 한 끼 사먹을 돈조차 벌 수 없게 되자, 그는 더 이상 힘들게 일하기를 멈추기로 했다. 일할수록 손해라는 절망스러운 말을 내뱉으며.


다큐멘터리에 등장했던 노숙인들이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다큐를 보기 전과 후에 노숙인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저들의 잘못으로 저기에 저런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게 아닐텐데...' 자본주의 시대에 '살아가기 위한' 개인의 노력과 책임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사회가 저들을 방치한다는 느낌에, 한동안 출퇴근길에 마주칠 수밖에 없는 노숙인들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2


어제 우연히 종각역을 지나다 빅판을 보았다. '빅판'은 빅이슈 판매원을 지칭하는 말이다. 빅판들은 늘 정해진 장소에서만 판매활동을 벌이고, 늘 그 자리를 지키며 묵묵히 빅이슈(BIG ISSUE)를 알린다. 5,000원에 잡지를 판매하면 절반은 빅판에게 수익이 돌아가고 나머지 절반은 운영비로 사용되어 지속적으로 잡지를 발행하는 구조다. 빅이슈는 홈리스들의 자립을 지원하는 글로벌 사회적 기업인 것이다. 재능기부로 만들어지지만 5,000원이라는 값이 결코 비싸다 생각되지 않을 만큼 알찬 컨텐츠를 담고 있다.



(좌) 빅이슈의 표지 / (우) 뜯기 쉽게 붙여놓은 앙증맞은 스티커


밤이 되어 어두운 와중에도 빨간 조끼와 빅이슈임을 알리는 소리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빅이슈의 기업이념에 매우 동감하고 지지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만 정기구독을 신청하지 않았다. 굳이 길거리를 지나다 마주치는 빅판들에게 구입을 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자립을 이런 방식으로나마 응원하고 싶어서다.


빅판에게 5,000원을 드리고 잡지를 받아들면 무언가 뿌듯함과 함께 애잔함이 남는다. '이 분은 또 어떤 사연이 있어 이곳에 있을까?' 가볍고도 무거운 마음을 달래며 몇 걸음을 옮기다 특이한 무언가가 눈에 띈다. 잡지를 포장한 비닐 한쪽에 헬로키티 스티커가 붙어 있다. 아마도 잡지를 받아든 독자들이 뜯기 쉽게 하려고 붙여 놓은 모양이다. 이 작은 스티커에 빅판의 (혹은 포장을 도운 자원봉사자의) 배려가 전해진다. 비록 지금은 홈리스(Homeless)이고 길거리에 우두커니 홀로 서서 잡지를 판매하고 있지만, 누군가의 아버지요 아들로 돌아갈 빅판의 모습을 그려본다. 커피 한 잔 값으로 이들과 간접적으로나마 밥 한 끼, 물 한 모금을 나누었다는 기쁨은 또다시 다음 호 빅이슈를 기다리게 한다.


이런 일을 나도 하고 싶다. 사람을 살리는 일, 함께 일하며 서로를 살아가게 하는 일을 하고 싶다.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 안에서도 이익창출과 바람직한 분배가 충분히 가능한 그런 구조를 만들고 싶다.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질지 모르나 지금은 그 일들을 위한 경험과 지식을 쌓는 시간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2019.09.05


1

행사 때문에 코엑스를 지나다 오랜만에 빅이슈를 샀는데 속지 중간에 이런 편지가 꽂혀있다.


"가끔 가을하늘의 유혹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 곳 삼성역 6번 출구에 가면 빅이슈 판매원이 있다'는 꾸준함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자기만의 성실함이 참 멋지다. 한동안 빅이슈를 못 본 사이에 전부 다 이렇게 바뀐 건지, 아니면 이곳에서만 이런 글을 넣으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의외의 포인트에서 감동을 받았다. 나는 도움을 주고자 적은 돈을 지불하고 잡지를 샀는데 오히려 마음이 따뜻해지는 선물을 받은 것 같았다.



2

다음 날도 같은 일로 어제와 같이 지하철 출구를 지나는데, 역시나 어제 계시던 분이 늘 그렇듯 빅이슈 잡지를 들고 묵묵히 그 자리에 계신다. 어제의 인상깊었던 편지 얘기를 꺼내 인사를 할까 말까 몇 번을 망설이다 빅판분에게 부담이 될까 싶어 그냥 돌아섰다. 마침, 낮은 계단이지만 유모차를 어쩔 줄 몰라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아기 엄마에게 익숙하다는 듯 다가가 힘을 보탠 후 다시 본인의 자리로 돌아가 안내문구를 들고 서 계신다.


안 되겠다. 이대로 돌아가면 아쉬움이 남을 것 같아서 슬그머니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어제 여기서 잡지를 샀는데 안에 편지가 들어있더라구요."

"아, 안녕하세요?"

"그런 편지글 정말 오랜만이어서 진짜 감동 받았어요!"

"아.. 뭘요. 시는 시인의 글을 가져다 쓴 것 뿐이고, 그냥 별 건 아닌 글인데 잡지마다 하나씩 넣거든요.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밝게 웃어주시는 모습에 인사를 건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제 SNS에 올린 글도 보셨다며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진다.


"하늘 사진이 많으시더라고요. 저는 하루 종일 여기 안에만 있으니까 하늘을 볼 수가 없거든요."

편지에 쓰여있던 '가을 하늘의 유혹'이라는 말이 이분에게는 정말로 피히가 힘든 장면이지 않았을까 상상이 됐다.


일하는 사무실이 고층이라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을 보며 '오늘은 흐리네', '오늘은 좀 멀리까지 보이네' 하며 내가 무심히 지나치는 순간이 누군가에게는 그토록 보고 싶은 찰나의 순간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했다.

 

한 여름 더위에 지쳐서 며칠 전에는 큰 맘을 먹고 일찍 판매를 정리하고 수원화성 야간축제에 다녀오셨다고. "잘 하셨어요!" 하고 응원의 말을 전했다.



3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출구를 묻는 어르신들, 약간의 시비조로 말을 거는 행인들을 차분히 응대해주시는 모습에서 하루 이틀 쌓인 내공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혼잡한 코엑스 앞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도움을 주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계셨던 것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일부러 더 여쭤보지 않고 대학생으로 보이는 손님이 오자 얼른 자리를 비켜주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일면식도 없던 사람과, 그것도 길거리에서 이렇게 마음을 전하는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게 너무나도 신기하고 묘한 경험이었다. 무심코 지나칠 땐 알지 못했던 빅판분의 따뜻함과 상냥함을 알게 된 것이 더욱 놀라웠다.


돌아오는 길에 내 SNS에서 '좋아요'를 누르고 가신 그분을 확인했다. 앞으로도 마음만 있다면원 이런저런 방법으로 연락할 수 있겠지만 그저 지켜보며 마음속으로 그분을 응원하기로 했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에게 연락처를 묻지 않는 것처럼.


'오늘 사온 지난 호 잡지에는 또 어떤 편지가 들어있을까?'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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