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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ripza Feb 26. 2024

74'Berlinale <Architecton> 감상평

베를린에 4개월 만에 왔다. 새로운 도시로 이주하기 전, 짐들을 박스로 싸서 지인의 집에 뒀었고, 그것을 다시 바이로이트로 붙인 것이 10월 초였으니. 이번에도 그때와 같이 버스를 타고 4시간 정도를 걸려 베를린에 도착했다.



 호텔에 체크인을 한 뒤 나는 베를린에 살았을 때 갔었던 한인 미용실로 가 머리를 정돈했고 그 길로는 Dussmannkaufkaus로 향해 미리 찜해뒀던 영화제 굿즈 몇 개와 작은 책 두 권, 그리고 DVD하나를 산 뒤에 오늘의 영화가 상영되는 Verti Music Hall로 향했다. 이곳에서는 주로 콘서트나 공연이 열리는데, 수천 명을 가용할 수 있는 장소라서 베를린영화제에서는 주로 관객들이 많이 몰리는 경쟁작이나, 특별초청작이 상영된다. 작년에 나는 이곳에서 <길복순>과 내가 좋아하는 페촐트의 <Roter Himmel>을 봤었다. 내가 오늘 본 영화는, 올해 74번째 영화제의 경쟁작 중 하나인 <Architecton>. 콘크리트라는 건축 재료의 물성과 그를 둘러싼 질문을 던지는 다큐멘터리 영화라고 소개됐던 것이다. 



고대하던 첫 영화가 시작됐고, 나는 혹시나 오프닝이 일 년 사이 바뀌었을 까 기대했지만, 약간의 사운드만 첨가되고 나머지는 똑같은 것 같았다. 그렇다고 실망한 것은 아니었지만… 
 영화의 첫 장면은, 작년 전쟁으로 인해 폭격당한 우크라이나 도시의 건물들이었다. 반전이 영화의 큰 주제인가? 하면서 다음 장면은 돌무더기들이 폭파되어 쓸려 내려가는 장면들. 그러다가 장면이 바뀌면서 한 노인이 아주 큰 돌을 어루만지는 장면이 이어지면서 나는 그 두 지점 사이의 연결 고리를 찾기 위해 무던히 머리를 돌렸다. 


영화는 대사가 거의 없다. 앞서 나온 돌덩이들이 콘크리트로 변해가는 과정, 폐허가 된 고대 유적의 흔적, 그리고 이십 세기와 이십일 세기에 거쳐 건축된 것으로 보이는, 하지만 그 역시 무너지거나 폐허가 된 건물들 안과 밖을 훑는다. 한편, 앞서 나온 노인-한 건축가-가 자신의 집 근처의 아주 기초적인, 땅을 파고 돌들을 주위로 심는 행위를 하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전체적인 영화의 이동이 아주 느려서, 졸음이 몰려오기도 했지만 영화가 주는 영상미는 좋았다. 조금 동떨어진 이야기지만, 하이라이트 영상과 도파민을 위한 짧은 영상들의 홍수 속에서 이런 템포의 영상을 보는 것은 일종의 치유처럼 느껴졌다. 



영화에 대한 감을 잡는 것은, 말미에 에필로그 형식으로 나오는 사람들의 대화-자세히는 노 교수와 그를 찾아온 사람-를 통해 가능했다. 그는 아스팔트라는 건축재료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가 말하길, 아스팔트는 돌과 나무와 같은 물성과 다르게 속이 마르고 그 때문에 자연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이 그 물체를 흉측하게 만든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 역시 건축가로 살며 콘크리트를 사용한 건물들을 많이 만들었지만 그것에 대해 후회한다고 했다. 한편 그는 이탈리아 출신이기도 했는데, 자신의 동료들이 밀란에 새로운 고층건물을 짓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고 했다. 그 행위는 그저 고층건물로 이루어진 지평선에 또 다른 조금 낮거나, 조금 높은 흉측한 긴 박스 하나를 들이서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독창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내가 생각하는 건축에 대해서도 되짚어보았다. 나는 모던한 건축물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리고 그 모던한 건축물들이란, 주로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해서 지어졌다. 그리고 분명, 콘크리트라는 물성은 인류에게 있어서 아주 크고, 가용인원도 넉넉한 건물들을 상대적으로 빠른 시간에 지을 수 있게 해 줬다. 건설 시간을 단축해 주고, 규격-모듈-에 따라 ‘찍어’ 내는 것도 가능하니까. 그런 점에서 나는 그 물성을 살린, 조금은 칙칙할지도 모르지만 회색의 느낌을 잘 살린 건물들을 좋아했다. 하지만 영화의 건축가는, 이런 식으로 반문한다. 우리-아마도 인류-는 왜 삼 백 년이나 삼 천년을 버티는 건축을 하지 않고, 고작 삼십 년 후에 다시 철거할 건물을 짓고 있는가?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아파트와 재건축에 대해 생각했다. 오래 유지되는 건물이 아니니, 그것들은 자기 제거되고 건폐물로 바뀐다. 그것들은 포크레인에 의해 해체되고, 덤프트럭에 의해 옮겨지고 종단에는 거대한 쓰레기 더비로 바뀐다. 



그가 앞서 말한 ‘자연으로의 환원성’을 생각해 본다면, 보통의 사람들이 사는 보통의 콘크리트 건축물의 말로는 이것들과 같다. 나는 내가 살았었던 옥수동을 생각했다. 내가 살던 동네 역시 콘크리트나 벽돌로 된 낡은 주택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었다. 건설 붐 혹은 재개발이라는 명목아래 건물들은 하나씩 부서졌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사를 늦게 하는 바람에, 나는 몇 개월 동안은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가는 길에 놓인, 천막에 대충 써진 채 폭격을 맞은 것처럼 널브러진 잔해들을 보고, 먼지를 맡고 기침을 했다. 아침시간과 이른 오후까지 드릴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나 역시 콘크리트에 의해 실향민이 된 사람이다. 원래 집이 있던 자리에는 엘레강스한 이름을 가진 매끈한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그리고 그 속은 새것으로 채워졌지만, 거기에는 나의 예전 시절을 보냈던 공간들은 없어져버렸다.

 

그 순간 나는 영화에서 나온 콘크리트 건물들의 폐허장면들이 반전이나 지진에 의한 슬픔을 표시하는 것이 아닌, 콘크리트라는 재료로 만들어진, 그리고 종단에 어떠한 이유 던 지 더 이상 쓰이지 않고 폐허가 되어버린 ‘괴상하고 흉측한’ 모습 그 자체를 들여다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중간 보여주는, 자연상태에 있는 돌과 나무 그리고 그것들로 지은 신전을 보여주는 모습들은 그것과의 대비였던 것이다. 건축가가 자신의 집 바로 옆에 지은 건축물은 마치 마법진 같은 것이었고, 자신이 이 안에서 나오는 마지막 사람임을 선언한다. 그가 설계도를 그리는 장면에서 ‘leave it be(그대로 두라)’라는 것을 말하는 것도, 한 편으론 자연을 그대로 두라라는 메시지가 있으면서도 동시엔 오래도록 유지되는 건축을 하자는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시간에도 거의 대부분의 건축물이 콘크리트로 지어진다. 독일에서는 3D프린터로 건물을 짓는 공법까지 등장했고, 그 기계가 건물을 짓는 장면도 영화에서 나온다. 그것은 건설 시점의 인간의 노동력을 줄여줄 것은 분명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점점 가속화되는 ‘건축 재료의 콘크리트화’를 보여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콘크리트를 만들기 위해 산을 깎은 단면과, 바로 그 옆에 다른 웅덩이를 파 그곳에 버려지는 건폐물을 비춘다. 이 장면은 내가 앞서 말했었던, ‘환원될 수 없는’ 콘크리트의 물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번 학기 같은 학과에 있는 막스는 나에게 자신이 옛 건축물들을 좋아한다 말했다. 로코코와 같은 이전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그리고 돌을 하나하나 깎아 쌓아 올린 고전적인 것들을 보며 그는 감탄을 했고 몇 번이나 그것을 강조했다. 학교 안에 있는, 콘크리트로 지은 벙커 같은 건물도 그는 hässlich(혐오스러운)라는 단어까지 써가며 싫어했다. 오늘 영화를 통해 이제는 그의 감정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건축가가 말한 것처럼, 건축가는 단순히 설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사람의 움직임 또한 고려한다. 그런 점에서, 유한한 자원을 가진 유한한 행성에서 앞으로의 인류를 위해 어떠한 건축이 우리에게 필요한 지 질문을 던져주는 이 영화가 난 마음에 들었다. 나의 건축 기호에 대해서도 다시 되새길만한 지점을 새겨주는 흥미로운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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