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시험기간 딴 짓

by soripza


시험 기간이 되면 다른 것에 관심이 가기 마련이다. 중학교 때는 중간고사 기간 동안 집에 일찍 오면, 괜스레 다음날 시험 볼 과목의 교과서를 들여다보다가 이내 흥미를 잃고(아마도 수학이나 과학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직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는 동생의 방에서 피아노를 쳤다. 대학교 때는 갑자기 미뤄왔던 소설책을 읽거나, 평소에 그리 재밌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게임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갑자기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언제부터인가 취미가 '영화 감상'으로 굳어졌다. 대학교 저학년까지만 해도 할리우드 영화가 나오면 극장에 가끔 가는 정도였지만, 시나브로 CGV 아트하우스 영화들을 접하고 GV를 다니면서 아트하우스 영화에 빠지게 됐고, 3년 전부터는 일 년에 적어도 백 편을 보는 것이 목표가 됐다. 영화를 보는 창구가 어디냐고 한다면 극장이 절반 정도, 그리고 모바일 기기 혹은 티비를 통해 OTT로 보는 게 절반 정도 되는 것 같다. 한국에 있을 때는 극장에 자주 갈 수가 있었다. 회사에 다니기 전엔 집에서 3호선 지하철만 타면 압구정 CGV 아트하우스가 있었고, 회사에 들어간 이후에도 천안에 아트하우스관이 있었고(지금은 사라졌지만) GV도 가끔 동시 생방으로 볼 수가 있었다. 동시에 왓챠에서는 지나간 영화들, 혹은 명작들을 짚으며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노스탤지어를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독일에 온 이후로는 영화 보기가 조금은 더 까다로워졌다. 한글 자막이 없는 것이 제일 아쉬운 부분이다. 베를린이야 외국인들이 상대적으로 많아서 영어 자막이 있거나 영어로 된 영화에 독일어 자막을 입혀주면 그나마 볼만했지만, 작은 도시로 옮기고 나서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을 보기는 어렵고, 있더라도 독일어 더빙이 되어 있어서 극장으로 발걸음이 잘 가지 않았다. (작년에 아나톨과 본 <퍼펙트 데이즈>가 그랬다. 첫 대사가 더빙임을 알아챈 순간 우리 모두 분함을 느꼈다.) OTT는 원래 왓챠와 넷플릭스를 썼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넷플릭스가 지역락이 걸리면서 더 이상 동생 계정에 접속을 하지 못하게 됐다. 따로 계정을 팔까도 했지만 달달이 나가는 구독료가 약간 부담돼서 그냥 내버려뒀다.


그러다가 MUBI라는 플랫폼을 알게 되었고, 학생 요금으로 저렴하게 구독을 시작했다. MUBI는 왓챠보다 라인업이 적지만, 좀 더 내 취향에 맞는 영화들이 올라온다. 다만, 영화가 걸리는 기간은 좀 더 자유분방해서, 담아뒀다가 잊을 때쯤 영화가 내리는 날이 7일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는 메일을 받는다. 어제는 거기에서 <Grand Theft Hamlet>이라는, GTA 온라인(약탈하고 범죄 저지르는 게임)에서 팬데믹 기간에 일자리를 잃은 두 명의 연극배우가 사람들을 끌어모아 게임 속 연극 무대(그래픽으로 구현된)에서 [햄릿]을 올리는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DVD를 사서 모으기 시작했다. 나는 미니멀 리스트가 되기는 틀린 것 같다. 어떤 부분에서는 미니멀을 추구하지만, 책에 이어서 DVD가 그 틀을 벗어나버렸다. 독일에 있으면서 이따금씩 아마존에서 DVD를 사기도 하고, Yes24에서도 한국 집으로 DVD를 시키기도 한다. DVD를 시킬 때의 규칙은 '내가 좋아하는 감독'의 컬렉션을 모으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독일 기숙사엔 '크리스티안 페졸트'의 거의 모든 DVD를 모아둔 상태이고, 이외에도 '에드워드 양'과 '하마구치 류스케'의 작품들이 추가되는 중이다.


OTT는 너무나 많다. 내가 좋아하는 페촐트의 전작을 수입한 엠엔엔 인터내셔널이 출시한 '콜렉티코'라는 서비스도 구독하게 됐다. 거기에는 DVD로 나오지 않은 페촐트의 TV 영화들을 언제 어디서나 다시 볼 수 있고, (아직 보지 않았지만) 장 뤽 고다르와 내가 미쳐 이름을 알지 못하는 고전 영화들이 리스트를 채우고 있다. 한편, 유튜브에서도 몇몇 개의 영화를 구입한 적도 있다. 다만 유튜브 영화 구매는 웬만하면 한국에서 하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지역이 바뀌면 같은 영화라도 한국 자막이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국 유튜브에서 구매할 수 없는 다른 작품 몇 개도 소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미국 아마존도 그 리스트에 추가된 것 같다. 작년 베를린영화제에서 사랑하게 된 <너는 나를 불태워 Tu me Abrasas>라는 영화, 그 영화를 만든 마티아스 피녜이로의 예전 작 몇 개가 미국 아마존에 있었다. 결제를 하려고 했는데 막혀서, 미국 주소를 추가하기도 하고 VPN을 써서 미국으로 지역을 바꿔보기도 하다가 결국엔 기프트 카드를 유일한 구매 방법으로 정하고, 왜인지 등록되어 있던 삼성카드를 없애버리니(어차피 이전 카드라 기간이 만료됐다.) 결재를 할 수 있었다. 오늘은 10년 전쯤 그가 만든 <Viola>라는 영화를 봤다. 우연찮게도, 어제 본 <Grand Theft Hamlet>와 비슷하게도, <Viola>역시 영화에 연극배우들이 나오고, 셰익스피어의 대사들을 읊으며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다른 시점에 만들어진 영화들이 갑자기 맥락을 가지고 나에게 연속적으로 들이닥칠 때보다 흥분되는 일은 없다.


독일에서는 가끔 친구들과 함께 저녁에 'FilmFriday'를 가지곤 한다. 내가 DVD를 가져와 보기도 하고, 아마존에서 보고 싶은 영화를 골라 보기도 한다. 사실 지난주 금요일엔 내가 아나톨에게 선물했었던 베를린을 무대로 한 (아나톨은 베를린 출신이다.) 페촐트의 <운디네>를 같이 봤다. 막스는 영화가 졸리다고 했지만, 4년 전 한국에서 내가 감독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자 영화를 이해하는 게 큰 도움이 됐다며 좋아했다. 이번 주 금요일에도 왠지 할 것 같은데 그때는 오늘 역시 아마존 미국에서 찾은 다큐멘터리 영화 <Exiles 천안문의 망명자들>을 권해볼 생각이다. 참고로 이 영화는 독일에 오기 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내가 본 것 중 최고라고 생각하는 작품이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기립박수를 친 적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동안 그 영화의 DVD를 찾고 싶어서 사방팔방을 뒤졌었는데, 이 영화 역시 오늘에 이르러서야 갑자기 나에게 다시 나타나주어 감사할 따름이다.


오늘은 BMS(Battery Management System)이라는 과목의 시험을 봤다. 나에겐 아직 두 개의 시험(Computational Material Design, Analog Ciruittechnology)과 연구 모듈 리포트 제출이 남아있다. 3월 12일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이 모든 것을 끝마칠 수 있길 바란다. 오늘은 신나게 딴짓을 했으니, 내일은 또 이것들에 집중하고... 아마도 3주가 조금 안 남은 시간 동안 난 또 다른 것에 정신을 뺏기겠지만. 요새 들어 삶의 태도를 조금씩 바꿔보려고 생각 중이기도 하다. 그냥 그때그때 원하는 걸 미루지 말고 하기. 현재의 날 갈아 넣어서 미래가 좋아진다는 생각보단, 미래를 내가 어찌할 수 없으니까 좀 더 현실에서 내가 기분이 좋아지는 것들을 하기. 그것을 하는 바람에 해야 될 것을 덜 하게 되더라도, 그것에 죄의식-보다는 마음의 짐-을 덜 느껴보기. <Viola>에서 주인공이 말했듯, 현재의 사랑에 최선을 다하기. 지금의 나에게는 공부도 영화도 글쓰기도 모두 사랑이니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His 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