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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다시 뺏어오기

by soripza

국기는 나라를 상징한다. 즉, 이미지는 집단을 상징한다. 독일의 각 마을에는 문장이 있고, 주(州)역시 그러하다. 텍스트는 기호와 결합할 때 그 의미를 확대하고 재생산하기가 용이해진다. 그것은 길거리에 있는 간판과는 다르다. 최신 스마트폰을 뒤로 돌리면 있는 문양이나, 자동차 맨 앞에 달린 로고가 그렇다. 대량 생산품에는 그것이 ‘어디’제품인가에 대한 표식으로 가득하다. 다만, 그것이 자랑스러울 때에만. 어떤 제품들은 그 ‘자랑’스러움을 모방하기 위해 그 이미지를 복사한다. 기능까지 구현되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이러한 문맥에서 태극기를 생각해본다면, 적어도 2010년도 들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태극기의 이미지는 거의 바닥으로 떨어져버렸다. 거의 매주 광장에서, 혹은 탄핵 반대 집회에서 사랑들이 가지고 나오는 것은 태극기이다. 그들은 근대적의미로서의 국가의 의미를 그들만의 방식으로 적극 투영시킨다. 근대적의미의 바탕에서 국가를 나누는 것은 사상과 이념이며, 그 일원들은 국가를 유지시키는 이데올로기를 위해 투쟁해야한다. 그래서 그들은 광장에서 계속해서 ‘자유’를 외친다.


하지만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지구를 휩쓸고 간 이후로 이 시스템은 이제 (적어도) 내부적으로는 많은 나라에서 적용되지 않는다. 현대 국가는 이데올로기를 오로지 피상적인 이미지로서만 이용한다. 국내 언론에서는 몇 십년째 중국과 북한을 끊임없이 공산주의, 사회주의라고 말하면서 결국엔 사람들에게 빨갱이 콤플렉스를 심어주는 것을 성공했지만, 한반도 위쪽과 오른쪽에 있는 국가는 결국엔 일당독재일 뿐이다. 중국은 이미 자본주의화가 끝났다. 거기엔 그 자본주의를 가끔씩 마음대로 해석하고 그것으로 벌을 줄 수 있는 강한 공안경찰의 힘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광장에 모인 태극기를 든 인원들은 아직 그들이 지지하는 인물처럼 사고회로가 70년대에 혹은 그보다 더 전에 머물러있다. 그들은 태극기와 성조기 최근에는 이스라엘 국기까지 혼합시킨다. 그것이 가리키는 바는 명징하다. 그것은 자본주의다. 이스라엘의 자본과 이어진 미국의 정치계가 그들이 생각하는 ‘동맹’이고 그들은 그것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보라. 며칠 전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있는 병원을 공습했다. 이 공습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미국은 두 번째 트럼프 임기를 막 시작했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힘을 자랑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비록 그것은 실패로 보이지만.


우리는 그들은 태극기 ‘부대’라고 부른다. 부대는 전투인력이고 이는 곧 국가에 귀속된 군인들의 집단을 말한다. 훈련소나 부대에서 정훈교육을 받으면 연설인사로 퇴역한 군인 출신 인사가 나온다. 그들은 ‘반공’을 외치면서 ‘이데올로기’의 다름을 강조한다. 30~50년대에 만들어진 전쟁 선전용 영상 푸티지를 보여준다. 인터넷에서는 검열될 전쟁터의 이미지를 보여주면서 애국심이 고취되리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러한 교육방법은 이제 더 이상 선진국 시스템 하에서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그 효력이 예전만 못하다. 결국 낡은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애국심은 그 감성을 공유할 수 있는 그 세대 사람들에게만 전파되고, 결국 그들이 광장으로 나와 스스로 태극기-부대가 된다.


그들은 총과 칼 대신 과거의 독재자와 현재의 독재자가 되려고 노력한 인물들의 얼굴이 그려진 조악한 물건들을 몸에 두른다. 누군가가 생각나는 선글라스를 끼고, 한물간 트로트나 뽕짝에 조악한 가사를 붙여 선전 선동물로 이용한다. 애석한 일이지만, 결국 그들은 그들과 같은 낡은 이념을 가진 젊은이들을 동원해 국가의 헌법 기관을 공격하는데에 까지 성공했다. 이점에서는 그들이 사랑하는, 국회의사당을 공격한 미국의 일원들과 동일시 된다. 이처럼, 적어도 한국 내에서 태극기의 위상은 그 이미지가 상징하는 국가를 오히려 공격하는 집단의 상징으로까지 떨어져 버렸다.


그들에게서 태극기를 뺏어오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들은 그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자본주의에 의해 지탱된다. 당일치기로 일당을 받고-이 수고비는 보통 보수 기독교를 지원하거나 혹은 다른 간접적인 방식으로 지원하는 기업들에 의해 지불된다.-관광버스를 타고 원정을 온다. 하지만 실상은, 그들의 삶이 좋아지려면 신자유주의 내지는 고어자본주의를 거침없이 내뱉는 수구 세력과의 관계 단절이 필요하다. 그럼으로서 그들은 당일치기로 수고비를 받고 광장에서 소리를 외치는 대신, 그들이 사는 마을에서, 그들의 집 안에서 편안한 의자에 앉아 더이상 최소한의 생활비를 받기위한 원정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서 모자란 것은 결국 시간과 돈이다. 시간은 그들을 생물학적으로 약하게 할 것이며, 자본은 이 태극기 부대를 위시한 정치적 협잡들이 더 이상 먹히지 않을 때 그 손을 거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가속화시켜줄 것은 결국 대선의 결과일 것이며, 그 후에 이루어질 수 있는 자본-엘리트 주의 시스템의 재-개편일 것이다. 그러면 그들의 손에서 태극기는 다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손아귀의 힘이 떨어지면서 태극기가 바닥에 닿기 그 직전에 우리는 그것을 다시 들어올릴 것이다. 더러운 얼룩들을 닦아내고, 헤진 부분들을 수선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전체주의를 싫어하지만, 적어도 후진 과거의 이데올로기로부터 그 이미지를 구원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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