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런치 #5] 손의 모험
만들기의 기억
어린 시절 아빠는 냄비 손잡이를 만드는 공장을 운영하셨다. 형광등 불빛 아래 훤히 보이던 공장 내부의 설비, 각종 재료, 그리고 완성된 제품들. 프레스 기계가 일정한 간격으로 작동하던 소리. 플라스틱 원료가 녹는 냄새.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신기해하며 감각하던 내가 거기 있었다. 내가 더욱 신기해했던 건 아빠 사무실의 수많은 샘플들이었다. 해외 출장을 다녀오시면 항상 신제품 샘플과 카탈로그들을 챙겨 오셨고, 나는 그것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맞이했다. 아빠는 만드는 사람이었고, 그래서인지 나 역시 어려서부터 만들기를 좋아했다.
설명서대로 조립한 레고를 며칠 만에 다 부수고 내가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곤 했다. 고장 난 시계를 고쳐보겠답시고 무작정 분해해 보기도 하고, 과학상자를 가지고 이래저래 씨름했던 것도 생각난다. 이렇게 손으로 직접 뭔가를 만들었던 유년의 기억들은 쉽게 휘발되지 않고 오래도록 남아있다.
손을 쓴다는 것, 직접 만든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어린아이였을 때 걸음마를 익히고 주변에 존재하는 것들을 인식하고 그 원리를 하나하나 배웠던 것과 비슷하다. 만들기에 몰입할 때 우리는 사물과 세계를 사용 설명서나 정형화된 지식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으로 직접 이해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 P 35
그런데 언제부터 만들기와 멀어진 걸까?
'손' 쉽게 살 수 있는 세상, 우리가 잃어버린 것
만들기 자체가 업이거나, 일부러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는 이상, 어른이 된 우리의 삶에서 만들기를 위한 자리는 거의 없다. 굳이 직접 뭔가를 만들지 않아도 다른 전문 영역에서의 경제활동을 통해 벌어들인 소득으로 필요한 것을 구매하면 되니까. 쓰다가 고장 나더라도 고민할 것 없이 수리센터에 보내거나, 새 제품을 사버리면 되니까. 자본주의 시스템이 고도화됨에 따라 우리는 상품이든 서비스든 뭐든 손쉽게 살 수 있는 세상, 그래서 손이 쉽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살게 되었다.
전문성 극대화와 시장에서의 교환 활동을 통해 사회 전체의 경제 효용은 증대되었지만, 개개인의 입장에서는 시스템과 타인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게 된다. '손에 거머쥐다', '손바닥 위에서 논다', '손에 넣다' 등의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손이 주로 능력 & 통제력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시스템에 순응하며 자신의 전문 영역 밖의 많은 것들을 손에서 놓아버리는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상의 소소한 일들을 스스로 해결하던 시대, 그 시대를 살았던 세대와는 다른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직접 무언가를 해본다는 경험은 점점 드물어지고, 그럴 기회가 사라지고 있다. 우리는 멈출 줄 모르는 거대한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서 각자에게 주어진 전문 영역에서, 주어진 일을 최대한 잘 해내기 위한 능력을 키우는 데 집중한다. 그리고 그러느라 내 삶 주변 일들을 직접 돌볼 수 있는 중요한 능력을 잃어 간다. - P 45
더욱 큰 문제는 최근 들어 그 거대한 시스템이 엄청난 속도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전문성의 경계가 빠르게 무너지고 있으며, 이는 우리의 미래 소비 능력을 위협한다. 삶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가는 상태에서 삶을 유지시켜줄 소비 능력마저 위협받을지 모른다는 사실은 우리를 불안과 두려움에 빠뜨린다.
만들기를 통한 주체성 회복
저자인 릴리쿰 3인은 '스스로 생산할 능력이 있다면, 사회에서 낙오하거나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질 수 있다.'라고 말하며, 만들기를 통해 삶에 대한 주체성을 회복할 것을 권한다. 이때의 만들기는 단순한 물리적 활동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삶에 대한 새로운 태도이며, 새로운 감각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소비사회의 타성을 벗어나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된다.
제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경험하고 직접 만들어 쓰거나 고쳐 쓸 수 있는 능력을 장착하는 것, 그러고자 노력하는 것은 내 삶을 이루는 물건들을 주도적으로 장악해 삶에서 주체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본능적인 욕구에 가깝다. - P 101
그리고 경험을 바탕으로 릴리쿰의 다양한 만들기 실험들을 소개한다. 공방 인테리어 공사를 직접 해보는 것, 아이폰을 뜯어 직접 고쳐보는 것, 왕초보 목공 수업을 기획해서 사람들에게 만들기를 소개하는 것과 같이 스스로 만들고, 고치고, 공유하는 삶에 대한 실험이다. 물론, 드론 대신 종이 연에 카메라를 달아 날리려다 실패한 것과 같이 그들의 실험은 많은 경우 '쓸데없는 짓'으로 돌아가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언컨대, 우리는 매번 실패했습니다."라고 스스로 실패를 인정 & 선언할 때 느껴지는 의연함과 뿌듯함은 그들이 진정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며 부러움을 느끼게 만든다.
스스로 만들고, 고치고, 공유하는 삶의 태도
최근 메이커 붐이 일면서 각종 만들기 클래스들이 생겨나고 있다. 손의 모험을 떠나는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겠으나, 일정한 비용을 지불하고 / 정형화된 커리큘럼 속에서 / 일회성 체험으로 그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결국 만드는 과정에서의 즐거움과 다 만든 후의 만족감을 얻기 위해 만들기마저 소비해버리는 꼴은 아닌가. 그렇다면 클래스의 수강생들은 만드는 사람인가, 소비자인가.
이렇듯 어떤 활동이 '만들기'인지, 어떤 사람이 '만드는 사람'인지에 대한 기준은 모호하다.
저자가 '만들기'를 두고 어떤 현상이나 활동이 아닌, 삶의 태도에 집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메이커란 무엇인가, 누가 메이커인가 생각할 때 기준이 그 사람이 무엇을 만드는지, 지금 무엇을 할 줄 아는지가 돼서는 안 된다. 자기 자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사물과 세계에 어떤 생각과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이런 기준은 모호할 수밖에 없다. 결론이 개인마다 다를 수도 있다. - P 223
느리고, 서투르고, 누가 시키지 않았고, 그냥 구매하는 것이 훨씬 편하고 효율적이어도 스스로 만들고
전문가에게 맡기거나, 새로 하나 사는 게 시간과 노력을 훨씬 절약해도 고치고
그 과정을 여러 사람들과 함께하고, 손의 모험 이야기를 공유하는
그런 삶의 태도.
손의 모험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할 때,
삶을 온전히 감각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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