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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르마타 May 17. 2022

모라토리엄의 조건

성신여대 인문도시사업단 학술세미나 토론문 (2022. 4. 21)

※ 발표자 심광현 선생님의 발표문에 대한 토론문으로 작성된 글을, 발표문 없이 읽을 수 있도록 재편집한 버전입니다.


한국의 교육체제 전반이 지속가능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작다 하더라도 대안의 모색과 실험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문제의식에 공감합니다. 저는 이 짧은 토론문에서 문화연구(cultural studies)라는 학제적(interdisciplinary)으로 여겨지는 학문을 하는 저와 동료들이 대학에서의 결핍을 느끼고 대학 밖에 신문연(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이라는 진지를 만들었던 경험, 그리고 지순협 대안대학에서 2022년 1/5학기 강의를 맡아 벼리(강의자)로서 궁리(수강자)들을 만났던 경험, 또 이제는 10년쯤 지나버리긴 했지만 제가 학부생이었던 시절의 기억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덧대어보려 합니다.     


발표문에서는 기존의 대학 내지는 경쟁교육 시스템은 물론 여기에 대한 비판조차 대안적인 사회구성체-지식구성체 구성을 위한 대안적 암묵지의 구성을 도외시하였다고 비판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느끼기에는 현재의 대학교육이 대안적 형식지나 대안적 암묵지를 직접 제공하는 양이 매우 미세하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또 그러한 가능성이 취업난이나 이른바 ‘신자유주의화’ 등으로 인해 점차 좁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대안적 사회구성체-지식구성체 구성을 위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이 그때 저에게나, 혹은 지금도 여전히 학생들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이중의 기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력한 하나는 대학생이라는 신분이 주는 모라토리엄의 시공간입니다. 당시에는 그것을 학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캠퍼스에서 했던 수업 외의 학회, 동아리 활동, 모든 인간관계와 학생사회에 대한 경험 등이 이후에도 저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암묵지의 학습이 아니었나 생각해보게 됩니다. 대학 1학년 때 뭣모르고 ‘대학생활의 로망’으로 가입했던 학회에서 슬럼에 관한 마이크 데이비스의 책을 읽고 받았던 충격은 제 삶의 회로를 바꾸어놓았고, 술에 취해 여학생들의 품평을 하던 선배들과의 술자리는 정말 싫었지만 그것 또한 제 암묵지가 되어 삶의 지향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고학년이 되었을 때는 오전에 수업을 몰아서 듣고, 독립언론으로 출근하는 삶을 어느새 살고 있었습니다. (개인적 TMI는 여기에서 마칩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대학생이라는 신분이 마치 자본주의 내에서 강제된 노동자로서의 피착취를 수행하지 않아도 되는 예외적인 시간으로 이해된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대학생들은 임시적으로나마 필요로부터의 거리를 획득합니다. 개인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 혹은 어떤 관계망 위에 놓이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이 모라토리엄은 학생들로 하여금 스펙 쌓기의 취업 준비를 미리 하거나 금융 투자에 일찍 뛰어드는 시간이 될 수도 있지만, 대안적 삶의 지향과 실천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회상하곤 하는 신자유주의 이전의 대학, 혹은 학생운동이 매우 활발했던 시기의 대학에서도 우리 대학의 공식 프로그램 자체가 대안적 암묵지를 제공했던 적은 없습니다. 대안은 늘 대안이 없어 보이는 틈을 찾아내며 사람들이 만들어 왔죠. (이러한 시각은 자율주의적인 역사관과도 맞닿아 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살펴보아야 할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대학생에게 주어진 모라토리엄은 어떻게 가능했을까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시민적 합의 형성을 통해 국가가 보장해주는 권리로서 가능해진 것이 아니라, ‘대학만 가면’이라는 말로 경쟁교육을 부추겨 온 학부모들의 재력이 뒷받침되면서, 또 부모와 주거 분리가 일어나면 좀 더 원활해지는 적당한 거짓말의 조합을 통해 매우 개인적인 방법으로만 실현되어 온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대학, 특히 학부생들을 모라토리엄의 시기에 있다고 이야기할 때, 늘 배제되는 존재는 부모가 등록금과 생활비를 제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에 졸업과 취업의 압박감을 온몸으로 견뎌내고 있는 계층의 학생들일 것입니다.     


대학원 과정으로 눈을 옮겨도 마찬가지의 시각적 사각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석사과정 입학식 때 들었던 ‘세븐 일레븐’이라는 말을 기억합니다. 대학원생이라면 모름지기 공부가 직업이고 여기에 집중해야 하니 아침 7시에 연구실에 나와 밤 11시에 집에 가는 생활을 하라는 한 교수님의 조언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세븐 일레븐’으로 생활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하시겠지요. 하지만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공부를 몇 시간이나 해야 성실한가에 대한 문제라기보다는, 이 발언뿐만 아니라 대학원 공간 내에서 교수든, 학생이든 대부분의 구성원이 하는 발언의 전제에 ‘대학원생은 돈을 벌지 않아도 될 것이다’가 너무 깊숙이 끼어있다는 사실입니다.


모라토리엄의 조건이 피교육자들에게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는 대안적인 실험의 한계도 뚜렷합니다. 야근을 하느라 수업에 못 오거나, 업무가 힘들어 리딩을 못 해오는 경우, 제가 함께 만들었던 대안언론에서 활동했던 대학생 친구들이 결국 취업철이 되면 매우 안정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 집안 사정을 이유로 석박사 진학을 망설이는 경우들은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대안적 지식구성체/사회구성체의 형성을 크게 방해합니다. 우리 세대에서 이런 경제적 기반에 관한 이야기가 자꾸 나온다면, ‘돈을 밝히는 애들’이라서라기보다는 정말 이것이 생존의 문제에 닿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학이 개인에게 주는 다른 강력한 기회는 바로 다종다양하게 발전해 온 형식지를 학습할 수 있는 넓은 수업의 폭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대학에 재미있는 수업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들을 다 듣지 못하고 졸업하는 상황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다행이도, 사실 이것은 전공 교육 압박에서 학생들을 벗어나게 하여 취업 준비를 더 하게 하려는 ‘신자유주의적 전환’인지도 모르겠지만 필수이수학점(전공별 36학점)의 제약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제 경우에는 좀 더 다양한 전공의 수업을 수강할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교양 과목 중에 필수로 이수해야 하는 강의들이 좀 더 있었는데, 인간/자연/사회/문화/세계의이해 영역에 있는 교양 강의 중 각각 3학점 이상을 수강해야 졸업요건을 채울 수 있었고, 사회과학 전공생의 경우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 심리학, 통계학 입문 강의를 꼭 들어야 했습니다.      


저희 대학이 통섭교육을 지향했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지만, 비슷한 종류의 교양필수 체계가 대부분의 대학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사회과학 연구자이지만, 당시 들었던 경제학이나 물리학 수업에서 배운 생각의 방식들이 여전히 저의 삶과 연구 속에서 연결된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K-MOOC라는 정부 사업에서 제공하는 형식지들(특히, EBS의 <위대한 수업>)도 취미처럼 보고 있습니다. 뇌과학, 수학 이런 이야기들은 들어도 잘 모르겠기도 하지만, 우리 전공에서 요새 하는 이야기들과도 연결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식 생산자인 연구자를 양성하는 대학원 교육과 관련해서 보면 학부보다 대학원에서 오히려 더 좁은 공부를 하게 되는 듯합니다. 통섭은커녕 학과 내에서의 연구주제만 달라도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많은 학생은 자신의 졸업논문 주제에 좁게 천착하고, 교수들은 그것을 전략적으로 좋은 태도로 보기도 합니다. 문화연구는 스스로 학제성을 주장하는 학문입니다만, 대학원 교육과 학회 활동이 학교, 분과학문과 지도교수별 ‘방’을 바탕으로 잘게 쪼개져 있는 상황은 문화연구의 발전 혹은 대안적 형식지의 생산을 가로막는 장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과학사회학에서 연구자 양성을 다룰 때, 연구실 문화를 통한 암묵지의 전수는 특히 중요하게 다뤄지는데, 오늘날의 인문학/사회과학 대학원에서는 지식 생산과 관련한 암묵지가 잘 전해지지 않는 것으로 느낍니다. 어떤 저널에 투고해야 하는지, 공동 연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연구 윤리는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연구로 돈을 벌기 위해서 연구팀에는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지 등의 아주 기본적인 사항들도 각개전투하는 상황입니다. 신문연을 만든 저희 구성원들이 현재의 대학에서 갈증을 느끼고 대학 밖에서 무언가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배경에는 이러한 고민도 함께 존재합니다.     


마치며 보태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저는 오늘의 주제인 ‘커먼즈’에 대해서는 과문합니다만, 때때로 커먼즈의 논의와 실천이 내부가 아닌 외부를 거점으로 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아닌가에 대해 고민하는 짧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많은 대안적인 실험과 거점들이 매우 소중하고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짧게나마 그러한 일들을 계속해서 해봤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제가 외부에서 대안을 생각했던 이유에는 늘 내부에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권력 혹은 역능을 스스로 갖추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사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대학원생보다는 실제로 좀 더 많은 권한을 가지고 계신, 그런 자리로 가실 수 있는 객관적 위치에 계신 분들은 내부를 바꾸는 데도 많은 힘을 쏟아주셔야 하지 않을까 하는. 또, 이러한 자리에서도 커먼즈를 대안적 진지보다는 보편적인 제도를 뺐어내서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 시간을 집중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대안적 실험을 하고 있는 사람들 역시, 그곳에 머무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제도 외부에서 키워낸 역능을 바탕으로 다시 제도 안으로 ‘순환’하기 위한 준비와 논의를 늘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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