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뒤면 초등학교라는 새로운 사회로 진출하게 되는 아이. 자기소개에 따라오는 숫자가 하나 커졌음을 멋지게 증명하고 싶은 듯, 요즘의 아이는 조금 더 복잡한 규칙과 과정을 요하는 보드 게임을 향해 자신의 호기심과 욕구를 자주 드러내곤 한다. 보드 게임이라는 말만 들어도 두 눈을 반짝이는 8세 어린이를 위해, 우리 가족은 가까운 동네의 한 보드게임 카페에서 새해 첫 주말의 첫 일정을 시작했다.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게임을 시작하려면, 그 게임 안의 세계를 관통하고 지배하는 규칙부터 알고 익혀야 한다. 카페 내 보드게임 진열장에서 아이가 고르고 꺼내 왔던 대부분의 게임은 아이에게 처음 만나는 게임이자 처음 만나는 세계였다. 낯선 세계에 발을 들일 때마다, 그 세계의 생소한 규칙을 읽고 이해할 때마다 아이는 한참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모든 규칙을 한 번에 다 알기 힘들다는 어려움과 빨리 게임을 시작하고 싶은 간절함을 동시에 표현하는 아이. 그런 아이에게 나는 여러 번 반복해 말했다. 엄마와 아빠 또한 너처럼 아직 이 게임의 규칙을 완벽하게 이해하진 못했다고. 그러니 직접 게임을 하면서 같이 규칙을 익혀보자고. 그렇게 우리는 아이의 손을 잡고 ‘깍두기’ 판의 문을 함께 열었다.
설명서의 규칙을 머리에 어느 정도 입력했다 할지라도, 곧바로 게임을 수월하게 진행하는 것은 어른에게도 꽤나 어려운 일. 생각지도 못한 실수와 멈춤, 갈등과 후회의 순간을 경험해야 어른도 아이도 비로소 이 세계의 규칙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낯선 세계의 질서를 제대로 익히는 것은 낯섦 속에 끈질기게 머무르고 숱하게 흔들리고 주저 없이 헤매야 가능한 일. 여섯 시간 동안 여러 개의 보드게임을 만나고 여러 곳의 세계에 머무르며 우리는 이해의 정도를 함께 높여갔다. 각각의 세계가 품고 있는 어려움과 즐거움을 함께 겪어갔다.
가상의 보드게임과는 달리 실제의 삶에는 ‘깍두기’ 판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언제나 실수에의 두려움, 실패에의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제 속도로 하루씩 자라는 아이의 삶에도, ‘엄마’라는 정체성을 안고 아이와 함께 하루씩 자라 가는 나의 삶에도 되감기(rewind) 버튼이나 새로 시작(restart) 버튼은 없다. 가끔은 이 다난한 삶이 단판에 끝나는 게임처럼 느껴져 한없이 마음이 가난해진다.
그러나 무수한 실수와 실패는 정지(pause) 버튼 없는 게임을 조금씩 더 잘 풀어나갈 수 있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어른으로서, 양육자로서, 그리고 같은 플레이어로서 우리는 아이에게 이 가능성을 끈질기게 말하고 숱하게 보여주고 주저 없이 알려주어야 한다.
눈앞의 패배에 울먹이는 여덟 살 플레이어에게 삼십 여년 먼저 산 선배 플레이어로서 내어줄 수 있는 가장 큰 도움은 무엇일까. 아이에게 아이 몫의 카드를 다시 나눠주는 일이 아닐까. 당장의 실수와 실패에 눈물 나게 속상하고 어이없어 화가 날 지라도, 네가 이 게임을 쉽게 놓아버리지 않도록. 네가 이 세계에 계속 머무를 수 있도록.
각자의 판 위에서 태어난 모든 생명의 성장 과정은 곧 자신이 살아갈 판의 규칙을 온몸으로 겪는 과정이기도 하다. 어느 게임에서든, 어느 세계에서든 그곳의 규칙과 이치를 습득(習得)하는 일은 체득(體得)하는 일과 다름없다. 딱 한 번 듣는다고, 딱 한 번 봤다고, 딱 한 번 경험했다고 완전하며 온전한 이해를 확신할 수 없는 삶은 모든 생명의 공통된 조건이리라. 수없이 부딪히고 고민하고 걱정하는 과정을 거쳐야 오롯한 이해를 경험할 수 있는 삶은 모든 생명의 공평한 조건이리라. 그렇기에 우리는 함께 믿어야 한다. 울음과 함께 내뱉은 첫 숨의 순간부터 힘겹게 마지막 숨을 내뱉는 순간까지, 단 하나의 ‘판(board)’ 위에서 펼쳐지는 이 ‘삶’은 단판인 듯 단판 아닌 게임(game)이라는 것을.
첫 판의 결과에 한참 속상해 했던 아이는 세 번째 판이 끝나서야 배시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눈물과 웃음 속에서 어느새 완벽하게 규칙을 이해하게 된 한 세계의 상자를, 우리는 함께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