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검고 하얀 새가 있었다.
한쪽 벽에 통창을 낸 카페에 앉아, 나는 그곳을 바라보았다. 바깥의 길 위에선 한껏 고개를 위로 꺾어도 제대로 보기 힘든 곳. 2층의 창가에선 살짝 고개를 위로 들면 바로 볼 수 있는 곳. 벌거벗은 가지와 가지 사이에 자리한 가지로 만든 집. 그곳에, 검고 하얀 새가 있었다. 두 눈 아래 책상만 잠자코 내려다봤다면 보지 못했을 창 너머 높은 곳에.
검고 하얀 새는 부지런히 제 몸을 움직였다. 제 날개로 후련히 날아갔다가 제 집으로 돌연히 돌아와 제 고개를 꾸준히 흔들었다. 그 모든 몸짓은 검고 하얀 제 삶을 가호하는 어떠한 신호이자 기호일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몸짓의 뜻을, 나는 알 수 없었다. 미동 없이 한참을 바라본다고 해서 바로 해독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었다.
검고 하얀 새의 이름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 삶의 어느 순간을 오래 응시하고 있었지만, 그 삶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고 쉬이 응답할 수 없었다. 지금껏 검고 하얀 새의 이야기를 부러 청해 듣고 만난 적이 없었으니까. 있으나 있는 줄도 몰랐던, 보고도 보지 못했던 존재는 ‘앎’이란 점으로 삶에 쉬이 찍힐 수 없었다.
그곳에, 검고 하얀 새가 있었다.
그저 그곳을 바라보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앎이었다.
검고 하얀 새의 곁에 검고 하얀 또 다른 새가 찾아왔다. 둘의 사이에는 무엇이 놓여 있을까. 둘이 함께 만들어낸 작고 동그란 세계들이 모여 있을까. 둘이 함께 찾아낸 얇고 가느다란 세계들이 쌓여 있을까. 검고 하얀 새를 알지 못하기에, 벌거벗은 가지 위에 내 좁고 얕은 상상만을 걸쳐볼 뿐이었다.
너를 선명히 알고 싶었다. 숱한 날, 숱한 곳에서 같은 하늘을 나누며 살고 있었을 너의 이름을 분명히 알고 싶었다. 연사와 확대 기능에 의존해 가며, 검고 하얀 새를 작은 화면 안에 담으려 애를 썼다. 가만히 기다리며 서서히 다가가는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검고 하얀 두 날개로 활강하는 너의 모습을 한 장의 사진으로 붙잡아낼 수 있었다. 그제야, 너의 이름을 확언하게 되었다.
어디론가 네가 날아갔을 때, 너의 집은 (겨울의 차가운 입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꼿꼿하게 너를 기다렸다. 그 안에서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은 일을, 나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너에 대한 나의 ‘앎’은 네 세계에 내 시선을 올려 둔 이십 여 분의 시간과 너의 이름뿐이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은 다음의 걸음으로 이어졌다. 잔에 담긴 식은 커피를 한 입에 마신 뒤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의 하원까지는 아직 한두 시간이 남아있었다.
익숙한 도서관의 익숙지 않은 청구 기호 앞. 그곳에서 누군가의 정성 어린 그림과 애정 어린 문장으로 포착된 너의 삶을 한 장씩 넘겨갔다. 너와 같은 하늘을 나누며 살고 있는 다른 삶을 한 장씩 마주했다. 바깥의 길 위에서 한껏 고개를 위로 꺾는다 해도 쉽게 만나지는 못할 너희의 세계가, 이곳에 있었다. 있으나 있는 줄도 몰랐던 곳에. 보고도 보지 못했던 곳에. 그러나 이제는 분명히 있고 선명히 보이는 곳에.
이제는 검고 하얀 새를 다 안다고, 고작 몇 페이지의 ‘앎’에 의존해 이렇게 말할 수는 없다. 이 작은 점과 같은 ‘앎’이 삶의 어느 선과 면으로 번지고 퍼져 나가는 일이, 보이는 것 너머를 가늠하고 상상하는 일이, 누구도 상처를 받지 않는 앎이,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는 삶이 그렇게 쉬울 리 없다.
그럼에도, 이 글의 첫 문장을 바꿔 말할 수 있게 된 ‘앎’의 기쁨을 오늘에 조금 더 붙잡아 두고 싶다.
그곳에, 검고 하얀 까치(Magpie)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