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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환 Oct 27. 2020

암모니아 냄새를 딛고 일어서다.

열등감과 수치심으로 가득했던 마음의 공간

냄새쯤이야 참을 수 있어야지!

화장실을 갈 때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가져간다. 이제 스마트폰은 휴지와 더불어 배변 활동 중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품이 되었다. 뭐라도 읽기 위해서다. 변기에 앉아 소셜미디어에 올라오는 글들을 읽다 보면 넋을 놓고 앉아있게 된다. '똥 쌀 때 읽기 좋은 글'이라는 카테고리가 따로 있는 걸 봐서는 이런 습관을 지닌 사람이 나 말고도 많은 것 같다. 나의 어떤 지인은 아예 화장실 안에 책 선반을 따로 마련해 두었다. 그는 배변 활동을 하는 동안 뭔가를 읽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해서 일을 볼 수가 없다고 한다. 읽을거리가 없으면 하다못해 화장실 세제 사용설명서나 방향제 통 뒷면에 적힌 성분 분석표라도 읽어야 쾌변에 닿을 수 있단다. 그러면서 화장실에서 읽기 좋은 글은 심각한 내용이어서는 안되고 유머, 명언 모음 등 가볍게 띄엄띄엄 읽을 수 있는 짧은 글이 좋다면서 추천까지 해준다.

화장실에서 계속 책을 읽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율리시스, 제임스 조이스 작)이 있는가 하면, 어떤 지방자치단체는 화장실에 미니도서관을 만들어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아름다운 화장실'로 지정받은 일도 있었다. 갑자기 궁금해진다. 사람들은 왜 화장실에서 글 읽는 것을 멈추지 않는 걸까? 여러 매체가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해 화장실에서 책을 읽는 것은 변비, 치질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 숱한 경고를 무시하는 데에는 다 나름의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새벽 내내 잠 한숨 못 자고 화장실을 들락날락했다. 지난밤 과음이 문제였다. 위로는 토사물이, 아래로는 설사가 터졌다. 정신없이 변기를 오르내리다가 나는 혼절하기 일보 직전, 신음을 터뜨리며 변기 뚜껑을 부여잡았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인간이 아닌 오직 신(God)을 바라봐야 한다는 깨달음에 이르렀다. 내 울부짖음이 변하여 기도가 되었다.

“아이고 주(主)여, 주여 아버지 살려주세요. 제발! 다시는 술 마시지 않을게요.”

나의 간절함(?)을 들은 누나가 화장실 문을 열고 내 등을 두들겨 주었다.

“야 이놈의 자식아! 주(主)를 찾을 거면 주(酒)를 처먹지 말던가, 주(酒)를 처먹었으면 주(主)를 찾지 말던가. 내가 너 때문에 동네 창피해서 못 살겠다. 이놈아!“

나는 순간 고통 중에 임하시는 그분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 같았다. 라임 제대로 살리는 누나의 잔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우선 위장을 비우는 데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누나의 손길이 등에 닿을 때마다 요란한 폭포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차례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나가고 청각을 재조정해야 할 것은 정적이 찾아왔다. 촉촉해진 눈가를 휴지로 닦고, 주위를 살폈다. 등 뒤에 선 누나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처음 보는 수능시험도 아닌데 거참 매번 요란하게도 뒤풀이 한다. 우리집 아들! 이번엔 대학 갈 수 있는 거야? 이번에 또 떨어지면 군대 가야 하는 거 알지?" 

누나의 잔소리가 정적을 집어삼켰다. 대학이라는 말에 숙취가 싹 달아났다. 연달아 날리는 누나의 팩트 폭행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다. 벌써 세 번째 수능시험이었다. 기술을 배우라는 아버지 말에 잠시 솔깃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푸르른 캠퍼스의 로망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앞서 두 차례나 입영 날짜를 연기하면서까지 “이번에 반드시 된다!”라는 각오를 다지고 치른 수능시험이었다. 하지만 보기 좋게 또 한 번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고등학교 재수 더하기 대학교 삼수, 도합 사수의 초라한 기억만 남기고 나의 가방끈을 이쯤에서 매듭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제 입영 날짜를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다. 병무청 담장자는 곧 입영 영장이 집으로 갈 거라고 알려주었다. 입영 날짜를 기다리며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다. 입대를 앞두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지내고 싶지는 않았다. 이따금 엄마가 주는 용돈에 의지한 채 그냥 놀았다. 그런데 상반기가 다 지나가도록 영장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정말 말도 안 되게 연애를 시작했다. 나의 첫 연애였다. 상대는 한 살 연상의 여인. 명문대 신문방송학과에 다니는 그녀는 방송국 아나운서를 준비하고 있었다. 연애를 시작하기도 전에 나는 잔뜩 주눅 들어 있었다.

“이제 곧 군대에 가야 하는데 왜 하필 이 타이밍에... 운명! 너 참 얄궂다.” 만약 운명에게 인격이 있다면, 운명은 지금 나를 농락하며 야비하게 웃고 있을 것만 같았다. 연애의 과정은 엉망이었다. 끝은 더더욱 비참했다.

"언제쯤 쪽팔리지 않게 살 수 있을까?"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고등학교를 재수하면서부터 시작된 거짓말. 누군가를 속이기 위해서 혹은 부정한 이득을 취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정말 내 인생이 너무 초라하고 쪽 팔려서 하게 된 거짓말이었다.

결국, 2000년 10월. 핑클의 '나우(Now)' 무대를 보지 못한 채 논산훈련소로 가는 입영 열차에 몸을 실었다. 머리 깎고, 각 잡고, 빡세게 굴러다녔다. 인생이 쪽 팔린다느니, 초라하다느니, 운명이 어쩌쿵저쩌쿵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고된 하루하루를 보냈다. 덕분에 잠은 잘 잤다. 기초군사훈련과 후반기 훈련을 마치고,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날 나는 제30기계화보병사단 헌병대로 자대배치를 받았다. 절도와 군기를 중요시하는 헌병대 특성상 낮은 계급의 병사들은 혹독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병장을 제외한 모든 병사는 내무반에서 편지를 읽거나 쓰는 행위를 할 수 없었고, 군매점(PX)에서 사 온 음식도 취식할 수 없었다. 때문에 가장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 화장실이었다. 좌변기 위에 앉아서 군교회에서 받아온 초코파이도 먹고, 제대하는 고참이 두고 간 소설책도 읽고, 심지어 야간 불침번을 서느라 부족했던 잠을 보충하기도 했다. 고참들도 화장실 안에서의 행위는 못 본 척 눈감아 주었다. 그들도 다 일, 이등병 시절에 겪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별없이 화장실을 도피처로 삼았다가 고참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기도 했다. (군대 내 구타가 암묵적으로 허용되던 시절 이야기다. 특히, 영창을 관리-감독하는 헌병대에서는 등잔 밑이 어두운 것처럼 구타가 더 많이 일어났었다.) 병장이 되면서 몸은 편해졌다. 매일 불침번을 서지 않아도 되고 내무반에서의 활동도 자유로웠다. 짬밥 안될 때 고생한 것을 보상받아야 하는 시간이 왔는데 내 마음 속의 불안은 점점 커져갔다. 6개월도 안 남은 제대. 다른 병장들은 달력에 X자를 그려가며 제대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데, 나는 그러고 있을 수가 없었다. 군대 오기 전 초라했던 나로 되돌아갈까 두려웠다. 막막한 마음에 내가 선택한 것은 다시 한번 수능시험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벌써 세 번이나 봤는데... 또?" 마음속 이야기가 들려왔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엔 가고 싶은 학과가 분명했다.

연.극.영.화.과! 일단 엄마에게 전화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부탁했다. 어차피 제대할 때까지 놀고 있느니 부대에서 잘 준비해서 시험을 보겠다고 했다. 엄마는 이번에도 못이기는 척 내 말에 동의해주었다. 하지만 가고 싶은 학과가 '연극영화과'라는 말에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면회 온 부모님에게서 수능대비문제집을 받았다. 반입 허락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많은 양은 받을 수가 없었다. 영역별로 딱 한 권. 문제집과 초콜릿 과자를 넣은 쇼핑백을 들고 부대로 복귀했다. 내무반 병사들에게 초콜릿 과를 나눠 먹으라고 하고선 나는 문제집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오랜만에 좌변기 위에 앉아 문제집을 펼쳤다. 이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기분 좋은 긴장감이 느껴졌다. 앞으로 수능시험까지는 6개월. 한국축구대표팀이 한일 월드컵 4강의 기적을 만들던 그 순간, 나는 암모니아 냄새를 맡으며 다시 일어서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딸이 화장실에 동화책을 가져다 놓았다. 그 이유를 묻자, "엄마, 아빠는 화장실 들어갈 때 스마트폰 보잖아요. 나도 뭔가 봐야 할 것 같아서요."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내 표정이 어땠을 것 같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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