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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환 Oct 08. 2021

한바탕 웃음으로 모른 체 하기엔

이질감 극복을 위한 프로젝트

한바탕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가 예상했던 반응은 아니었다. 낯선 땅에서 만난, 낯선 학우들 앞에서 나는 본의 아니게 처음부터 큰 웃음을 선사하고 말았다. 푸른빛이 감도는 세미나실 안에서, 당혹감은 좀처럼 진정되질 않았다. 눈동자는 돌부리에 걸린 자전거 바퀴처럼 중심을 잃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정신은 아뜩했고, 목덜미와 등줄기로 척척하게 땀이 배었다.

대체 왜들 웃는 거야? 혹시 내가 말실수라도 한 걸까? 아니면 독일어 발음이 문제였나? 생각하면 할수록 기분이 나빠졌다. 그때 웃음소리를 뚫고 철제 의자가 시멘트 바닥을 긁을 때 내는 쇳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나의 감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던 모양이었다. 학생들 사이에 파묻혀 있던 담당 교수가 허리를 세우고 의자를 끌어당겨 자세를 고쳐 잡으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자네의 말은 나치의 만행이 한국의 근현대사에도 영향을 끼쳤고, 그 영향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건가?”

“네! 독일은 나치의 잘못을 여러 번 사과하고 반성했지만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여지껏 입장을 밝힌 적이 없습니다.”

“어떤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는가? 나치와 한반도? 언뜻 연결이 안 되는데?”

“그러니까… 그 게…”

재차 묻는 교수의 물음에 나는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입안 가득 마른걸레를 물고 말하는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릴 뿐이었다. 말하기 능력의 문제라기보다는 웃음 거리가 되었다는, 괜한 열등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는 꽤나 장신(長身) 축에 속하는 나인데, 덩치 큰 독일 학생들 사이에 있으려니 영락없는 꼬맹이였다. 그들은 말하는데 거침이 없었다. 머리속 생각은 유려한 문장으로 변해 입을 통해 공기 중으로 흘러나왔다. 어디에서든 당당하고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어 있었다.

“다른 학생들이 웃었다고 기분 나빠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앞으로 함께 토론하면서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너의 생각을 보여주면 돼. 그러면 되는 거야!”

독일에서 개념 예술가(Konzeptkünstlerin)로 활동하는 엘리스 크라이셔(Alice Creischer) 교수는 위로하듯 내게 의미심장한 말을 해주었다. 말인즉슨 “억울하면 니껄 제대로 보여줘라!” 너무 맞는 말이었지만 나는 쿨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구덩이에 빠진 사람에게 밧줄을 내려준다 해도 그가 타고 올라올 의지가 없다면 헛된 일일 터. 직장을 그만두고, 독일 유학을 떠날 때 보여주었던 결의에 찬 의지는 온데간데없고, 나는 말라버린 호수 바닥 같은 안쓰러운 몰골로 앉아 있었다.

시작은 그렇게 깔끔하지 않았다. 나 역시 한바탕 웃음으로 모른 체 하고 싶었지만, 열등감에 사로잡혀 주저하는 내 모습을 용납하기까진 시간이 좀 필요했다. 결국, 이날의 에피소드는 대학원 생활 3년 동안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어눌한 독일어 실력으로 내가 살아온 세상의 한숨을 전달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느리더라도 정확하게 전달하려고 애를 썼다.


한국과 독일의 관계는 1883년 체결된 한-독 우호통상조약이 공식적인 시작이었다. 하지만 1945년 이전까지 양국 관계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한국과 독일은 비슷한 역사의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패전국 독일은 동-서독으로, 일본 제국으로부터 해방된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20세기 이후 양국의 주요 키워드를 선정한다면 단연 전쟁, 분단 그리고 통일일 것이다. 왜 그런지는 역사의 타임라인을 조금만 뒤로 돌려보면 금방 알 수 있다.

2018년 4월 27일.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주요 언론들은 일제히 대한민국의 문재인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정은 위원장의 만남을 일제히 주요 뉴스로 보도했다. 사실 독일의 언론들은 한반도와 관련된 내용을 잘 보도하지 않는다. 유럽연합 안에서 쏟아지는 뉴스의 양도 이미 포화상태이니 지구 반대편 나라의 사건은 적당히 넘겨버리기 일쑤다. 그래도 이따금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는 보도했다. 북한이 국제사회에 위협이 되고 있다는 코멘트를 달고선. 그런데 어쩐 일인지 상당수의 언론이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을 비중 있게 전달했다. 비로소 ‘결자해지’하려는 걸까? 나는 신문을 뒤적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역사를 조그만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들이 국제사회에 위협이라고 말하는 한반도 상황은 자신들의 역사가 생산한 산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말이다.

1차 세계대전의 패배는 독일에 치명적인 아픔을 남겼다. 독일제국과 연합군 사이에 맺어진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독일은 해외 식민지를 모두 잃었고, 알자스로렌 지방마저 프랑스에 반납했다. 이때 잃은 영토가 전체 면적의 13%였다. 잦은 전쟁, 승전과 패전을 반복한 결과 독일의 국경은 자고 일어나면 바뀌어 있었다.

20세기 이후 독일의 국경 변화

패전의 결과는 독일인들의 삶을 힘들게 만들었다. 삶의 영토를 잃어버린 독일인의 박탈감은 한 사람이 등장하면서 이상하게 해결되어 간다. 그가 바로 아돌프 히틀러이다. 히틀러는 1924년 뮌헨 폭동으로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자서전 '나의 투쟁(Mein Kampf)'을 집필했다 이 책에서 그는 독일 민족을 위한 '역사적 사명'으로서 동쪽 토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상으로 우리 국가사회주의자들은 우리나라의 세계대전 전의 외교정책에 대해서는 마침표를 찍어주기로 한다. 우리는 600년 전에 도달한 시점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유럽 남쪽 및 서쪽으로 향하는 영원한 게르만인의 이동을 멈추고, 동쪽 토지에 눈길을 돌린다. 우리는 드디어 세계대전 전의 해외 식민지정책 및 무역정책을 청산하고 장래의 영토정책으로 이행한다. 우리가 오늘날 유럽에서 새로운 영토에 대해서 말할 경우 우리는 첫째로 오직 러시아와 그에 종속하는 주변 국가를 떠올릴 수 있을 뿐이다"

(나의 투쟁 제2부 국가사회주의 운동, 제14장 동방노선 대 동방정책 중)


히틀러의 이런 주장의 배경은 19세기 말 독일의 지리학자 프리드리히 라첼(Friedrich Ratzel)의 '레벤스라움'이론에서 나왔다. '레벤스라움'은 독일어 'Leben 생활'과 'Raum 공간'이 합쳐진 조어이다.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국가에 적용한 개념인데 국가도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충분히 자고, 먹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지속해서 진화,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화가 발전하지 못하면 나라가 생존할 수 없고, 그렇다면 자신의 공간을 문화가 발전한 국가에 양도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레벤스라움은 식민지 확대를 정당화해주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히틀러는 '레벤스라움'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그리고 자신의 나치 이데올로기에 곧바로 적용했다. “베르사유조약으로 영토를 빼앗긴 독일은 인구 대비 영토가 부족하니 삶의 공간(Lebensraum)을 잃은 독일인들을 위해 군사적으로 확장정책을 진행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다양한 선전자료를 만들어 레벤스라움을 전파한다. 히틀러의 선전은 복잡한 학술적인 내용을 지우고,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당시 높은 문맹 비율 때문에 그들은 이미지를 이용한 선전 전략을 펼쳐야 했고, 대량 복제가 가능하고 유포가 쉬운 포스터를 선전의 적절한 매개체로 사용했다.

레벤스라움을 설명하는 포스터

‘레벤스라움’이 히틀러의 이론이 되도록 한 사람은 1차 세계대전 당시 뮌헨 대학의 교수였던 칼 하우스호퍼(Karl Haushofer)였다. 하우스호퍼는 어린 시절부터 ‘레벤스라움’이론을 창시한 라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라첼은 하우스호퍼 아버지의 친구였다.

칼 하우스호퍼

그는 히틀러를 만나 ‘레벤스라움’을 나치의 정책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제국주의를 합리화하는 이론으로 만들었다. 1909년 2월 19일 하우스호퍼는 독일 바이에른주 군부가 파견하는 관찰 장교로서 일본, 도쿄에 도착했다. 당시 그의 나이 서른 아홉 살이었다. 그는 약 1년 간 교토 외곽 병영에 머물면서 일본의 군사시설과 지형을 관찰하고, 훈련에 참가하고, 조언하면서 주로 군인, 정치가들과 교류했다. 특히, 그는 도쿄 주재 무관의 업무요청에 따라 1909년 9월 11일부터 1909년 9월 21일까지 서울을 방문한다. 일본군 장교와 독일 영사 등의 안내를 받아 조선의 군 시설을 돌아보았다. 1년에 불과한 하우스호퍼의 일본 체류 기간은 본인의 인생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일본, 한반도, 중국의 운명까지 바꾸어 놓았다. 귀국 후, 그는 이 기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뮌헨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그의 논문 제목은 '대 일본의 군사력, 세계에서의 위치, 미래'였다. 이 논문은 나중에 '대 일본' 제목의 책으로도 출간되었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본에 관한 책을 여러 차례 발간했다. 나아가 독일과 일본의 문화, 정치, 경제, 지리 등은 서로 다르지만, 고대로부터 독일과 일본은 비슷한 삶의 형태를 경험했으며, 양국은 공통으로 러시아와의 관계가 좋지 않고, 식민지를 획득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고 말했다. 심지어 양국은 공통점이 너무 많아서 '운명공동체'라 봐도 좋다고 주장했다.

하우스호퍼는 독일과 일본의 제국주의가 닮은 꼴이 되도록 가교 구실을 자처했다. 또한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어가는 전략을 지켜보면서 '레벤스라움 학문적 이론으로 보충, 발전 시켜 나갔다. 그가 일본을 자신의 지정학적 모델이라고 여기며 자신만의 지정학을 만들어갔다면, 일본의 지리학자들은 하우스호퍼의 '레벤스라움'에서 일본과의 유사성을 발견하려고 노력했다.  결과물로 완성된 것이 바로 ‘대동아공영권이었다. 이것은 만주, 타이완, 한반도 등을 점령하기 위한 근거가 되었다. 하우스호퍼는 자신의 글에 조선에 대해서도 짧게 언급했는데, 조선은 스스로 독립을 유지할  없는 나라라고 기술했다.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압력이 점점  커지는 상황에서 일본이 조선을 먼저 합병함으로써 중국과 러시아  북으로부터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일본의 이익을 지켜낸 것은 적절한 행위라고 평가했다. 독일과 일본이 공유한 ‘레벤스라움’이 한반도 식민 역사의 시작이었다.


열등감에 대해 생각하다가 몇 자 더 적는다. 광복된 이후 우리는 서구사회의 국가 시스템과 가치관의 모방을 최고의 목표로 추구하던 때가 있었다. 서구는 세계의 중심이고, 그들을 닮는 것이 곧 근대화이자 세계화로 여겼다. 변방 국가인 우리는 오랜 세월 쌓아온 고유문화를 부끄럽게 여기며 스스로 열등의식을 내면화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이마저도 일본의 사고방식이라는 거다. 일본의 극우는 자신들을 서구 사회 시민이라고 생각하며 산단다. 머리 까만 서양인. 열등감이 지나치면 사람이 이상해진다. 조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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