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과 10월
이제야 완연한 가을이다. 어느새 단풍이 여기저기.
찬바람이 불어오니 2021년도 어느새 끝나가는구나 싶다. 코로나 이후 멀어진 일상도 조금씩 돌아오는 느낌이다.
이번 가을에는 여성이 쓴 작품들, 여성에 대한 작품들을 많이 읽었다. 갈수록 독서도 연쇄적인 활동이 되기 마련이라, 어떤 책을 읽으면 그물 엮듯이 줄줄이 대기가 생긴다.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 <이라영 독서 에세이>에서 소개한 책들을 잔뜩 사서 읽고 있는 중.
이미 읽을 책들도 엄청 사뒀다...있는 책들 다 읽고 새 책을 사야 하는데 그게 또 잘 안된다.
읽고 싶은 책은 많고, 웬만하면 바로 사야 하는 성격 때문에....책 욕심이 많아서 탈이다. 지출도 지출인데, 더 이상 쌓아둘 장소가 없다.
그래도 어찌하리...나이가 들어가서 그런가. 오히려 삶이 고요하니 독서를 향한 집중도가 더 높아진다.
각 책이 구현하는 세계관에 더 깊게 빠지기도 하고.
요새 노라 애프런의 에세이집(<I feel bad about my neck>)을 다시 읽었는데, 그중 독서를 향한 애정을 담은 챕터 On Rapture는 이렇게 끝난다.
I'll find another book I love and disappear into it. Wishi me luck.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은 시대를 앞서가도 너무 앞서간 여자에 대한 책이다. 100년은 족히 앞서간 조선의 페미니스트이자 독립운동가, 소설가이자 화가인 나혜석. 이런 생각을 1920년에 했다고? 싶을 정도로 사이다(?) 글들이 담겨있다. 여성의 사회 진출, 육아와 출산, 연애와 결혼, 정치 활동, 경제력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선구자'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책. "탐험하는 자가 없으면 그 길은 영원히 못 갈 것이오. 우리가 욕심을 내지 아니하면 우리가 비난을 받지 아니하면 우리의 역사를 무엇으로 꾸미잔 말이오. 다행히 우리 조선 여자 중에 누구라도 가치 있는 욕을 먹는 자 있다 하면 우리는 안심이오."
<버드나무 그늘 아래>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딸인 안수산 여사의 일생을 다룬 책이다. 정말 대단한 분임에도 아무래도 남겨진 기록이 풍부하진 않다 보니 이 책은 상당히 귀한 책이다. 정말 영화 같은 삶을 살아간 분이다. 미국 해군 최초의 여성 포격술 장교였고, 미국 해군 특수부대 대위를 거쳐 NSA 비밀정보 분석가로 활동하기까지. 그것도 그 시대의 미국에서 동양여성으로! 시간이 나면 안수산에 대해서는 따로 포스팅을 해보는 걸로...
<이만하면 괜찮은 남자는 없다>는 제목이 좀 강렬하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괜찮은 남자'들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저자의 바람을 담은 듯싶다. 저자는 오마이뉴스 기자로 일하고 있는 '남성'이다. '4년제 대학을 나온, 서울에 사는, 화이트칼라 일을 하는 한국 성인 남성'이 한국 사회에 만연한 여성 혐오와 잘못된 성 관념들을 분석했다. 저자는 자신(남성)의 '권력'을 인정하고 스스로(남성들)에게 질문을 던지며 "우리가 바뀌어야 한다"라고 강조한다.(독자가 대부분 여성이란 점은 아이러니다) 가장 어려운 것이 내가 가진 '권력'을 포기하는 것 아닌가. 저자가 말하고 싶은 요지는 아마 이것일 테지. “살아보지 못한 삶을 존중하는 자만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여름밤 열 시 반>은 뒤라스의 소설인데, 올해 남은 시간 동안 뒤라스의 글들은 차차 탐독할 예정...
<메리 벤투라와 아홉 번째 왕국>은 정말 짧은 소설인데, <벨 자>의 실비아 플러스가 스무 살이 되던 해인 1952년 쓴 소설이다. <벨 자>는 예전에 도서관에서 빌려봤던 기억이 있는데...소장하고 싶어서 이번에 한 권 사면서 같이 <메리...>도 사서 읽어봤다.
<각성>과 <패싱>은 각각 여성 작가가 여성의 삶을 다룬 소설들이다. <각성>은 미국 작가인 케이트 쇼팽의 작품으로, 1899년 출간됐다. 여성의 부도덕한 일탈을 다뤘다는 이유로 출판이 금지됐자만 이후 1960년대가 되어서야 페미니즘 소설의 선구자로 조명되며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이다. 결혼한 상류층 여성인 28세의 젊은 부인이 여름휴가를 떠난 곳에서 만난 젊은 남자와 진정한 사랑(?)에 눈을 뜨고, 나아가 궁극적으로 독립적인 자아를 찾아 나가는 이야기다. 단순히 싱그러운 젊은 청년과의 사랑이 그녀의 삶을 뒤흔들었다기보다, 그 만남을 통해 결국 나 자신이 '자율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즉 '자유로운 존재'임을 깨달으며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것이다. 그 시대 여성들에게 부여된 정해진 역할, 한정적인 삶의 영역, 심지어 어쩌면 제어된 인간 본능까지. 그 모든 것을 '여름날의 사랑'이 뒤집어 놓은 셈이다.
소설도 그리고 있듯, 누군가가 어떤 '깨달음'을 얻고 '각성'한 뒤에는 그 전으로 돌아가기는 쉽지 않다. 각성의 정도가 어느 정도이든,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각성을 겪고 성장하는 것 같다. 주인공이 각성 후 경제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독립적인 자아가 되어가는 과정은 정말 그 시대에는 쇼킹한 이야기였을듯. 그렇게 여성들이 하나둘 '각성'해 온 것이겠지. '마치 익숙하지만 이전에는 몰랐던 세상에 처음으로 눈뜬, 갓 태어난 생명체가 된 기분'을 느끼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꽤나 여운이 남는다.
<패싱>은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저자 넬라 라슨이 1929년 출간한 소설이다. '백인 행세'를 하는 흑인 여성을 소재로 한 이야기다. 치밀한 심리 묘사와 인물 간의 생생한 갈등이 1930년대에 나온 소설이라기엔 너무나 현대적이다. 글로 옮기기가 참 어려운데, 한 사람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이야기였다. 인종이라는 절대 바꿀 수 없는 조건을 거부하고, 속이지만 결국은 '태어난 대로' 살아가는 삶을 욕망하는... '부캐'가 대세인 요즘, '그대로의 나'와 '내가 원하는 나', 그리고 '남들이 보는 나'의 틈은 더 벌어지고 있을까?
마지막은 이번 달에 읽은 책 중 어쩌면 가장 '마음 쓰며' 읽은 책. <그녀가 말했다>는 '미투 운동'을 촉발한 미국의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범죄를 고발한 뉴욕타임스 기사를 쓴 기자들이 펴낸 책이다. 조디 캔터, 메건 투히 기자가 전 세계에 충격을 준 사건을 세상에 알리기까지의 치열한 탐사보도 과정을 생생하게 풀어낸다.
'마음 쓰며' 읽은 이유는 여럿인데, 우선 이 책이 권력에 의한 성폭행 이야기를 다루고 있단 점에서 분노와 안타까움, 무기력함을 동시에 느끼면서다. 얼마나 많은 곳에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얼마나 오랜 시간 이런 일들을 당해왔나. 더 안타까운 것은 '피해자'들이 당당하게 피해자임을 알리는 것조차 조심스럽다는 현실이다.
또 다른 이유는 단순하게 모종의 감동 때문이다. 긴 취재 과정을 보면, 다양한 갈등을 엿보게 된다. 엄청난 사건임을 직감하고 파헤치는 기자들은 피해자들의 절대적인 동의가 필요하고, 그들을 보호하고 싶지만 또 그들을 설득해 세상에 이야기를 알리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고생을 한다. 또 피해자들은 이 일을 드러내면 본인의 삶이 꽤나 시끄러워질 것이고, 긴 싸움이 될 수도 있으며, 어쩌면 내가 살아온 모든 과정이 의도치 않게 공격받을 수 있다는 사실과 잘못된 일을 알리고 더 이상의 피해자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어찌 됐건, 기사가 나가고 변화의 시작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들 결국 하나의 공통 목적이 있어서였다. "더 이상의 피해자가 생겨서는 안 된다". 여성들의 연대와 이타심에 어찌 감동을 안 할 수 있나..
팩트와 공감, 사명감과 공정성을 끊임없이 되새기는 취재 과정도 꽤나 인상적이었다. 기자들은 물론이고 편집자와 언론사 모두가 "당신의 어머니가 사랑한다고 말한대도 사실 확인을 빠뜨려서는 안 된다"는 저널리즘의 만트라를 지키려는 노력이 사실적으로 다가왔다. 그 기사가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어떤 반응과 사건을 불러 올 지 아무도 모른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이야기'를 해야 변화의 방아쇠가 당겨진다.
어떤 이야기가 대중에게 처음 알려지게 되는 그 순간부터 어떤 일이 일어날지, 누가 그 이야기를 읽을지,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고, 의견을 덧붙이고, 반박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이 이야기가 인정받고 영향력을 가진다는 보장도 없다. 우리가 속해 있는 언론의 세계에서 이야기, 즉 기사는 목적이고, 결과이자, 최종 생산물이다. 그러나 세상 전체를 바라본다면 새로운 정보를 담은 기사는 그저 시작에 불과하다. 대화의 시작, 행동의 시작, 그리고 변화의 시작이다. -415p
이 책을 읽고 나서 넷플릭스의 다큐 <우리는 영원히 어리지 않다>를 봤다. 해당 다큐는 하비 와인스타인 이후 또 한 번 미국을 크게 뒤흔들었던 성 학대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미국 국가대표 체조팀의 주치의였던 래리 나사르가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무려 265명에 달하는 미성년 여자 체조선수들을 성폭행해 온 끔찍한 사건. 가학적인 환경 속 소녀들은 수십 년 간 지우지 못할 상처를 안고 살아갔지만, '더 이상 어리지 않은' 여성들은 하나둘 진실을 밝혔다. 시작이 쉽지는 않았지만, 역시나 더 이상의 피해자가 나오길 원하지 않는 생존자들의 용기가 역겨운 진실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낼 수 있었다.
래리 나사르 사건에서도 저널리즘의 역할은 컸다. 공론화를 시작한 것도 언론이고, 생존자들이 발언하고 유대를 찾게 된 것도 언론을 통해서였다. 언론이 항상 옳은 건 아니지만, 알려져야 할 이야기가 드러나는, 그리고 변화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점은 여전히 높은 존재 의미를 가지는 듯 싶다.
https://www.netflix.com/kr/title/81034185?s=i&trkid=13747225&vlang=ko&clip=81248330
유튜브에서 래리 나사르의 재판 영상을 찾아봤다. 래리 나사르는 2017년 연방 재판에서 징역 60년을, 그리고 2018년 1월 미시간주 법원에서 최고 175년을 추가로 선고받았으며 2월 최대 125년 형이 더해졌다. 총 360년형으로, 사실상 종신형이다.
아래는 2018년 재판에서 로즈마리 아퀼리나 판사가 징역 175년을 선고하는 영상이다. 판사는 형 선고를 하면서 "I signed your death penalty"라고 말했다. 그녀는 재판이 열리기 전 나사르가 제출한 편지(반성문)를 가차 없이 던져버렸다. 편지에는 나사르가 아직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음을 암시하는 말들이 있었다.
https://youtu.be/e-nYRmU_Gxo
로즈마리 판사는 법정에서 증언한 생존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통은 여기에 두고 가세요. 그리고 세상에 나가 당신의 근사한 일들을 하세요." 그들이 겪은 고통의 시간들을, 기억들을 완전히 지우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로즈마리 판사의 말처럼 우리가 서로 건넬 수 있는 가장 큰 위로는 "당신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앞으로의 삶을 응원합니다"가 아닐까.
다시금 되새기는 사실은, 그 어떤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일이라도 누군가 '이야기'하고,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면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는 점이다.
모든 슬픔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 이야기를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고통을 견딜 수 있다.
이야기는 일련의 견디기 어려운 사건 자체의 의미를 드러낸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