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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민 Sep 27. 2016

다자연애를 지지한다

그래도 연애하겠다는 당신에게 필요한 네 번째, 사랑의 제도에 대한 고민

지난 2월 <한겨레21>은 ‘다자연애’를 특집기사(“두 사람을 동시에 사귈 생각 없니?” 그날부터 ‘열린 연애’가 시작됐다)로 다뤘다. 다자연애란 독점적 연애와 대비되는 말로, 세 명 이상의 사람이 합의 하에 동시에 연인관계를 맺는 것을 뜻한다. 기사에 힘 입어, 다자연애에 관한 미디어의 관심이 높아졌던 상반기였다. (이 글이 작성된 시점은 2015년 5월)




다자연애에 대한 높아진 관심


그 역사는 오래이나 한국에서는 활발히 논해진 적 없는 다자연애가 새삼 미디어의 주목을 받을 때는 대중문화 영역에서 논쟁적인 텍스트가 등장했을 때다. 2000년대에는 두 번의 계기가 있었다. 2006년 박현욱의 소설 『아내가 결혼했다』가 세계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됐을 때, 그리고 그 소설이 손예진, 김주혁 주연으로 영화화됐던 2008년이다.


일대일이 아닌 다자간의 연애가 원칙적으로는 모두 ‘다자연애’에 포함되지만 그 결은 좀 더 다양한데, <아내가 결혼했다>에서는 다자연애는 더 사랑하는 이에게 들어온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정도의 차는 있지만 많은 경우 다자연애는 이렇게 시작되며, 자주 한 사람에게 묶이고 싶지 않은 일방의 의사에 주도된다. 이 경우 다자연애는 합법적 양다리에 다름없을 수도 있다.

2006년과 2008년 다자연애 담론의 중심에 <아내가 결혼했다>가 있었다면, 이번에는 웹툰 <독신으로 살겠다>가 화제의 중심이다. <독신으로 살겠다>의 다자연애는 <아내가 결혼했다>에서와는 달리 ‘더 윤리적인 사랑’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도출된 실험이다.


이야기는 6년차 연인인 유희와 형민이 둘의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서로의 새로운 사랑을 인정하며 시작된다. 여전히 아끼고 사랑하지만 연애 초기와 같은 열정은 꺼진 둘의 관계에 각자의 새 연인은 활력을 불어넣는다. 내가 사랑하는 이가 다른 이를 나처럼 사랑한다는 사실이 두 사람 모두에게 질투와 고통을 유발하지만, 유희와 형민은 관계의 실험을 포기하지 않는다. 새 사랑으로 인해 내 연인의 삶이 더 풍요로워진다면 내가 그에게 독점을 요구할 근거는 과연 무엇일 수 있는지 <독신으로 살겠다>는 묻는다. 이 도발적인 웹툰은 사랑의 본질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아내가 결혼했다>뿐이던 다자연애에 대한 대중적 상상을 확장시키고 있다.





윤리적 실험으로서의 다자연애?


윤리적 사랑의 실험으로서 다자연애의 기본적인 전제는 질투나 소유욕은 자기애와 관련이 있지, 상대방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감정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이라 불리는 것을 하며 우리는 상대만 사랑하는 게 아니라 자기애 역시 살찌운다. 내 욕망을 투사하고 내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 타자를 옭아맨다. 사랑에 들러붙은 이 미성숙한 자기애의 영역을 다자연애는 단호히 거부한다.


따라서 이러한 다자연애는 방종보다는 더 많은 책임, 더 많은 자기억제를 필수적으로 요청한다. 내가 관계 맺었기에 보살피고 책임져야 할 상대가 하나가 아니라 둘인 것이며, 그러나 그들 각각에 대해 주장할 수 있는 권리라 할 만한 내용은 훨씬 적은 것이다. 다자연애를 하는 이에게 허락되는 것은 더 많이 사랑할 권리뿐이다. 다자연애가 이상으로 추구하는 사랑에서 핵심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주는 것이 된다. 잘 운용된 다자연애는 그러므로 독점적 연애 일반보다 사랑의 본질을 더 많이 보존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을 하겠단 일념으로 몸을 닦고 닦아 일만 번 고쳐 닦아야 ‘잘 운용된 다자연애’에 근접한 것에 이를 수 있으니, 일종의 ‘수행’인 셈이다.


“질투가 생기면 나를 지운다. 죄책감이 생기면 너를 지운다.” 다자연애를 유지하기 위한 유희와 형민의 원칙이자 약속이었다.




독점적 연애 vs. 다자연애


그럼에도 다자연애에 관한 세간의 반응은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다. <독신으로 살겠다>의 댓글란은 물론, 다자연애를 소개하는 기사에도 태반은 악플이고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가 나왔을 때도 다르지 않았다.


<한겨레21> 기사에 달린 댓글. 다자연애의 제안은 곧잘 ‘짐승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으로 비화된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다자연애를 논하는 것 자체에 불쾌감을 느낀다. 첫째는 다자연애의 이론과, 성욕을 관계 내로 제한하고 싶지 않은 (주로) 남성들에 의해 이용되기 쉬운 그 실제 사이의 간극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다자연애의 높은 윤리적 이상을 실현하는 데 힘쓰지 아니하고 성욕 발산과 관계의 책임 완화에 이를 악용하고 있는 무리들의 잘못이지 다자연애 자체가 비난 받을 이유는 되지 못할 것이다. 중요한 건 두 번째인데, 다자연애를 주장하는 이들이 자신들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독점적 연애 혹은 일부일처제와 과도하게 대립 및 우열관계를 설정하기 때문이다. ‘다름’이 아니라 ‘우열’의 문제가 되는 순간 사람들은 다자연애가 자신이 하고 있는 평범하나 숭고한 사랑에 대한 공격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반(反)제도가 지배적 제도에 반한다는 사실 그 자체로 선이 아니듯, ‘제도=악’도 아니다. 다자연애가 더 윤리적인 사랑을 위한 것이라면 잘 조율된 다자연애 만큼이나 잘 조율된 독점적 연애 역시 그러한 사랑의 본질을 충분히 구현할 수 있다. 구속과 집착을 다른 방식으로 지양하며 풍성한 사랑을 하고 있는 독점적 연애인(戀愛人)들의 사랑이 그것을 다자연애의 방식으로 지양하는 것보다 억압적이고 위선적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사랑의 질은 그렇게 일괄적으로 평가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편이 더 쉽냐고 묻는다면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개인적으로 독점적 연애를 잘 구현하는 것이 다자연애를 잘 구현하는 것보다 훨씬 용이하리라 본다. 윤리적 다자연애는 준 ‘무소유’를 지향하는 수행이자 고행이다.)

2차 대전을 배경으로 1명의 여성과 2명의 남성의 사랑을 다룬 영화 <글루미 선데이>



 

사랑·결혼·가족제도의 지각변동


독점적 연애와 다자연애 중 어느 것이 더 우월한가 하는 소모적인 논쟁에서 벗어나, 다자연애 담론이 놓인 맥락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독점적 사랑은 근대적 결혼에 맞게 디자인된 사랑의 형태다. 말은 안 해도 연애의 끝엔 이별 아니면 결혼이 있었다.


그런데 이 결혼 자체가 근래에 들어 위험에 처한 것이다. 물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의문 없이 결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이 ‘선택’의 영역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는 건 우리 세대에겐 분명한 사실이다. 사랑과 결혼, 가족 구성에 있어서의 대규모 지각변동이다. 여성들의 경제활동률 증가가 기여했고, 4인 가족 부양을 보장할 만한 양질의 일자리들이 줄어든 것이 이러한 경향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했다는 삼포세대 현상이란 실상 이런 조건 속에서 개별 주체들이 합리적으로 선택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포기했다고 한다. (출처: 오피스엔)

연애의 끝에 이제 결혼이 없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결혼은 안 하는데 한 사람하고 평생 연애? 아니면 힘닿는 데까지 상대를 바꾸어가며 연쇄적 연애? 그러다 늙으면? 결혼을 향해 달려가는 독점적 사랑의 방식이 아닌 다양한 연애 방식의 상상이 가능해진 것이다. 실험에 참가하려는 사람 역시 늘었다. 이 상상과 실험에 대한 담론으로서 다자연애에 대한 대중적 재현과 논쟁이 많아지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사르트르-보부아르처럼 다자연애를 실험한 이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존재했으나,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고 앞으로는 더 많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비단 ‘다자연애’에만 한정되지도 않을 것이다. 비혼공동체와 같은 대안가족 모델에 관한 논의들도 이와 유관하다.


이러한 논의들은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사랑법을 반성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왜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걸 당연하다고 여기게 됐을까? 두 사람을 사랑하는데 그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둘 다와 연애를 할 수 있다면 어떨까? 사랑은 두 배가 되는 게 아닐까? 질투와 집착을 어떤 식으로 관리할 수 있을까? 다자연애가 내게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왜일까? 다자연애를 하든 독점적 연애를 하든 더 낫게 사랑하고자 한다면 우리 모두 마주해볼 필요가 있는 질문들이다. 




다자연애를 지지한다


다자연애는 아니었지만, 동시에 두 사람을 사랑한 적이 있었다. 한 사람에게는 연인의 이름으로 요구하거나 강제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그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에 행복한 것 외에는 고통뿐인 관계였지만 놓을 수가 없어 이어갔었다. 상대에 대한 요구가 권리가 아닌 사랑, 그건 확실히 사랑의 본질이 더 가까워보였다. 다자연애를 주장하는 이들이 무엇을 극복하고자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확신 속에 사랑 받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주체적으로 사랑하자고, 자율적인 인간이 되자고 수없이 되뇌었음에도 그 계절 내내 나는 자주 휘청였다. 그 시간들은 누군가를 사랑하여 그로부터 사랑 받기를 열망하는 인간이 그런 ‘주체성’과 ‘자율성’을 가지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하게 했다. 다자연애의 목표가 닿을 수 없이 모순적이란 점도 깨달아야 했다. 사랑과 인정의 갈구에서 시작된 행위가 그것을 추방해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독립과 자율의 확보는 어쩌면 사랑하지 않는 상태일 때만 가능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다자연애를 결단하는 이들을 지지한다. 나는 이들이 아무 고민 없이 독점적 연애를 받아들이는 이들보다 사랑에 대해 훨씬 더 많이 고민해보았다고 믿는다. 지난 경험은 다자연애의 지속불가능성에 대한 체험이기도 했지만, 나의 습관적인 의존과 권리처럼 휘두르는 인정에 대한 요구를 반성하는 계기이기도 했던 탓이다. 우리가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불완전성을 안고 사랑하고자 한다면, 그 극복은 타자로부터의 완전한 독립과 비의존의 지향이 아니라 서로 의존한 가운데 무엇을 개선시킬 것인가를 조율해가는 방식이어야 한다고 스스로 결론 내릴 수 있었던 것도 그때의 경험을 통해서였다. 내게 다자연애는 자신에게 더 행복하고 온당한 사랑의 방식을 디자인해가는 과정으로서 의미가 있었다.


독점적 연애든 다자연애든 어느 방법이 그 자체로 더 우월하거나 열등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잘 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그리고 타인을 제대로 사랑하는 일은, 어느 방법이든 어렵다.






이 비(非)연애의 시대, 
그래도 연애를 하겠다면
그런 당신에게 필요한 연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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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저로 『내가 연애를 못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인문학 탓이야』(알마, 2014)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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