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우리가 실수하고 용서하고 다시 시도하는 존재가 되게 하는 근간
내가 연애에 관한 글을 쓰게 된 건 순전히 첫 연애 때문이었다. 첫 각인이 너무나 훌륭했기 때문에 나는 글을 쓰게 됐다. 나의 첫 연인이 J가 아니었다면 나는 전혀 다른 글을 썼거나 아예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나는 첫 연애 이야기로부터 글을 시작해야 한다.
첫 연애는 사랑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시작된다. 첫 연애를 시작할 무렵에 우리는 사랑하는 법도 사랑받는 법도 잘 알지 못한다. 부모와의 관계에서 사랑을 경험하지만 누구나 완벽한 방식으로 사랑받는 것은 아니며, 심지어 인생에서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받는 경우도 있다. 친구와 우정을 나누지만, 그 유년기의 우정이란 강렬하여 어떤 관계는 연애와 거의 같지만, 우리는 우정을 연애와는 다른 방식으로 운용하도록 배운다. 우리는 한 친구에게 모든 것을 기대하지 않고, 암묵적인 선이 있음을 안다. 지나친 열정, 질투, 동경, 집착, 분노 같은 감정들은 친구 사이에 드러내서는 안 된다고 배워왔고, ‘남’에게는 더욱 그러할 것을 배워왔다.
첫 연애를 시작할 무렵의 나도 다르지 않아서, 사랑을 한다는 것, 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했다. 그건 내가 나 자신도 사랑할 줄 몰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스무 살 언저리는 나는 어떠한 사람이리란 짐작과, 어떠한 사람이고 싶다는 열망 사이를 왕복운동하며 분열되기 쉬운 시기였고, 서울에서의 첫 해는 외로웠다. 나는 몹시 사랑받고 싶은 한편 내게 객관적으로 사랑할 만한 구석이 드물다는 데서 연유하는 자기혐오에 자주 휩쓸렸다. 미숙하여 애정과 인정과 관심을 더없이 갈구했지만 그 갈망하는 마음을 어떻게 드러내야 할지 몰라 늘 조금쯤 달떠 지냈다. 서투르게 터뜨려버리거나 꽁꽁 싸매다 들키곤 했으며, 그럴 때면 그 서투름이 부끄러워 모든 것을 거둬들이려 하기도 했다.
그 시절의 연인이 J였다. J는 이런 나의 과도함과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었다. 외로움과 인정욕망과 자기혐오가 꼬여 내가 그를 향해 느닷없는 감정을 쏟아낼 때조차 그는 동요하여 받아치는 일이 없었다. 그는 세상에 느닷없는 건 없다고, 누군가가 감정을 터뜨린다면 거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라 생각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말해주는 J가 있어 나는 용서를 구하고 그에게 향할 것이 아니었던 잘못 배달된 감정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J와 있으면 늘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근 것 같았다. 내가 아무리 가시를 세우고 손을 휘저어 밀어내도 나를 꼼꼼히 에워싸는 물처럼, J는 네가 그렇게 가시 돋고 남을 밀어내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는 듯이 묵묵히 따뜻한 온기를 전해주었다. 욕조는 튼튼했고, 나는 안심하고 모자란 나에 머물 수 있었다. 나는 그 욕조에서 나를 사랑하는 법을, 내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배웠다.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데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사랑받으면, 우리는 우리가 사랑받을 만한 사람임을 알게 된다.
안심하고 모자란 나에 머무는 한편, 나는 아주 강렬하게 지금의 내가 아닌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다고 느꼈다. 으레 하는 자기비하로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지금의 내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아주 심플하게 그가 나로 인해 슬퍼하거나 고통받지 않기를 바랐다. 그가 나에게 그러하듯이 그에게 자랑스러운 존재이고 싶었다. 내가 받은 사랑에 값하는 인간이 되고 싶었고, 더 나은 사람이 되어 그에게 더 나은 사랑을 주고 싶었다.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 채 연애를 시작했던 나는 그제야 어렴풋이 사랑의 모양을 짐작했다. 그 사람을 위해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면 그건 사랑이었다.
그래서 먼 훗날 어느 책에서 사랑을 ‘타인을 지향하며 자아를 확장하려는 의지’라고 정의한 것을 발견했을 때 나는 그 말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누군가를 위해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타인을 지향하며 자아를 확장한다는 사랑에 관한 이 정의는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지, 우리가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또한 알려준다. 우리는 좀처럼 변하려 하지 않는 존재들이다. 인간에게는 자기보존 욕구가 있어 웬만해서는 변하려 하지 않고, 실제로 잘 변하지도 않는다. 변화에는 높은 에너지가 필요한 까닭이다.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적절히 통제하면서 원래 상태에 머무는 ‘현상유지’가 가장 편한 상태로, 인간에게는 이 상태를 유지하려는 관성이 있다.
더 나아지고 싶다는 것, 자아를 확장하겠다는 것은 자기보존 욕구를 넘어 이 안온한 평형상태를 스스로 깨뜨리는 일이다. 원한다면 더 머물 수 있음에도, 나의 경계를 밀어내기로 하는 것이다. 다른 이를 들이기에 나는 너무 비좁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고, 변화를 감행해서라도 그의 공간을 내어주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이로부터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이, 그를 온전히 사랑하고 싶다는 열망이 자기보존의 본능을 이긴다. 타인을 지향하는 동안 우리는 자신을 보존하기를 포기함으로써 타인을 들이는 법을 알게 되며, 강고하게 지켜오던 자아의 경계는 이렇게 조금 더 바깥으로 밀려난다.
우리는 이처럼 성장의 일부를 타인에게 기대고 있다. 그리고 연애는 그런 타인을 가져보는 경험이다. 멋지고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홀로 되뇌는 우리의 결심이 자꾸만 실패하는 이유는 타인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누군가가 곁에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노력할 수 있다. 그런 누군가가 있다면 우리는 심지어 실패해도 괜찮다는 것 역시 알게 된다. 변화는 더디지만 시도하는 한 끝내는 찾아온다. 사랑은 그러므로 “우리가 실수하고 용서하고 다시 시도하는 존재가 되게 하는 근간”(벨 훅스)이다.
인간은 물론 단숨에 변하지 않기에 나는 같은 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를 오래 반복했다. 그가 받아준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받아주지 않을 것 같은 요구를 하고 호소해야 할 때 겁박하는 일을 완전히 그만두지 못했지만, 아주 장기적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 그건 결국 어느 시점에 이르러 우리가 헤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는 J를 만나기 전과 후의 변화를 측정하는 방식으로 나의 성장을 가늠했으므로. 나는 누군가를 아주 깊이 사랑했다는 그 사람의 말은 믿지 않지만 그 사람의 변화는 믿는다. 사랑하기 전과 후의 변화가 그 사랑의 밀도다. 좋은 연애는 우리를 반드시 변화시킨다.
나는 이제 스무 살 무렵의 날들을 일기장 없이는 떠올리기 어렵다. J와 함께 했던 시간들도 디테일이 모두 소실된 추억이 되어버렸지만, 그가 자라나던 나의 몸에 새겨준 것들만은 여전히 고스란하다. 첫 연애가 가르쳐준 사랑은 누군가를 위해 더 나아지고자 하는 열망이자 의지였고, 끝끝내 더 나아지는 경험이었다. 약하고 모난 인간들은 사랑을 통해 구원받는다. 나는 이 연쇄가 끝없이 이어지는 상상을 한다. J는 내게 사랑의 정의를 주었다. 내가 사랑과 연애에 대해 무언가 쓴다면 이것에 대해서다.
“사랑은 우리가 실수하고 용서하고 다시 시도하는 존재가 되게 하는 근간이다.” (벨 훅스, 『사랑은 사치일까』)
연애에 관해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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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저로 『내가 연애를 못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인문학 탓이야』(알마, 2014)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