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가 될 수 없는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무수히 많은 대답이 쏟아져 나올 수 있는 것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개념은 차이와 다양성을 특징으로 수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비단 철학에서뿐만 아니라 문학을 필두로 미술, 건축, 영화 등 사회 전반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고 우리의 일상에 깊숙이 뿌리내려 ‘포스트모더니즘 하다’라는 말을 쓸 정도로 대중화된 사상이기도 하다. 도대체 포스트모더니즘이 무엇이길래 사상가나 예술가뿐만 아니라 이렇게 대중들에게까지 공감을 받고 열렬한 지지를 얻었는가. 그리고 유행처럼 선풍적인 인기를 끌은 이 사상이 옳기만 한 것인가. 이 문제들에 대해 포스트모더니즘이 갖고 있는 몇 가지 특성들을 바탕으로 나의 생각을 써 내려가도록 하겠다.
철학이 발생한 그리스 시대부터 포스트모더니즘 이전의 근대사상까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는 보편성이 존재하고 이를 밝혀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학문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이러한 사상은 고대부터 20세기까지 유지되어 인간 개인의 사고, 더 나아가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으로 확장된다. 처음에는 진리탐구를 위한 보편성의 추구가 획일화로 변질되면서 나치즘으로 대변되는 전체주의가 발생하였다. 나치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사상의 가장 무서운 것은 사회가 추구하는 나무에서 밖으로 튀어나온 가지들을 쳐내는 폭력이다. 냉전시대의 이념전쟁까지 이끈 원동력은 하나의 진리만 존재한다는 일원론적 세계관이었다. 이러한 세계관은 후에 자본주의와도 결합하여 사회 구성원들에게 발전을 위한 형식, 그리고 성공과 행복의 공식을 강요하였다. 일원론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폭력과 강요는 사회 구성원들을 불행하게 만들게 되었다.
이에 반발하여 발생한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큰 특징은 ‘차이에 대한 인정’, 즉 다원주의이다. ‘내가 서있는 곳이 지구의 중심이다’라는 속담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주의는 절대적인 진리를 부정하고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둔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사회 전반에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인간을 억압하던 기존의 세계관과 사상을 해체하고 개인의 의지를 존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을 통해서 사람들은 ‘틀리다’와 ‘다르다’를 구분하기 시작하였고 사회에서 규정해놓은 성공이 아닌 개인의 잠재성 발현이 행복의 기준이 되었다. 이로써 인간이 가진 삶의 모습은 더욱 다양해지고 삶의 의미는 더욱 풍부해졌다. 예술도 마찬가지로 포스트모더니즘은 관객과 작가의 상호적(interactive)인 관계, 그리고 그 관계에서 오는 해석과 의미의 다양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그러면서 작품들은 점점 더 그 의미가 모호해지며 풍부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놓아 관객과의 소통을 유도하기도 한다.
이처럼 사회의 폭력과 억압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진리 추구와 작은 것들에 대한 관심은 전체로부터 개인을 해방시키고 개인의 잠재성 실현에 있어서 긍정적인 기여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을 바탕으로 관용과 상호존중의 정신이 널리 퍼지면서 ‘다름’을 인식하였을 때 그 차이를 극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평행선상에서 다 같이 어우러져 공존할 수 있는 세계관은 이상적이고 인간의 행복과 더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관용을 통한 다원주의는 가치판단 문제에 있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극단적인 예로 유영철과 같은 살인마를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으로 ‘유영철은 사이코패스라는 나와 다른 면을 갖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그럴 수 있어.’라며 인정해줘야 하는 것일까. 이처럼 수직적으로 배열할 수 있는 가치문제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 가치들을 탐구하고 올바르게 정립하여 인류가 더 나은 방향으로 가게 만드는 것이 철학의 목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이 모든 것들을 부정하며 무분별한 관용의 정신을 강조하며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이 주장하는 것처럼 발전을 부정하는 세계관은 인간이 살아가게 만드는 존재이유를 부정하는 것인데도 그에 대한 어떠한 대안으로도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닌 주요한 한계는 이전의 모든 사상적 체계를 부정하고 비판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지 기존의 세계관을 해체하면서 중구난방으로 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방향은 이 세계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나 문학가들은 애매모호한 표현을 즐겨 사용하면서 문장의 의미를 풍부하게 만들고 있다고 하지만 이런 점들이 오해와 오해를 낳으면서 한 방향으로 수렴하지 못하고 결국 생산적인 의미를 창출해내지 못하게 만든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글을 읽다 보면 주야장천 비판만 할 뿐 새로운 대안을 내놓지 못해 ‘so what?’, ‘그래서 어떡하자고’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 세계에 어떠한 보편성도 절대적인 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 세상에 똑같은 인간은 절대 없지만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곳에는 분명히 보편성이 존재하며 이 보편성을 밝혀내어 우주의 원리를 인식하고 인간에게 삶의 양식을 제공하는 것이 철학의 임무이다. 근대부터 축적되어온 자연과학의 눈부신 발달은 이미 이 세계에 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이 모든 것들을 부정하며 자연과학에게 뒤처진 진리탐구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마치 유행처럼 순식간에 사회 전반 모든 분야를 강타했다가 그 힘을 유지하지 못하고 지금은 후퇴하였다. 이것이 비판뿐인 사상, 본질의 문제까지 건들지 못하는 사상의 한계이다. 그 전에 권위적이고 수직적인 사회적 상황에 불만이 많던 대중들에게 지지를 받으면서 잠시 스쳐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 개념들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과 반성은 쉽게 지나칠 수 없다. 무엇보다도 거대담론에 먹혀버린 주변 이야기들에 대한 조명과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세계관은 분명 이 세계를 바람직하고 개인이 행복해지는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 추구하는 다양하면서 행복한 세계가 되기 위해서는 총체적으로 보는 관점도 필요하다. 개인과 사회는 끊임없이 상호작용하게 되기 때문이다. 즉 개인의 행복만 추구하다가는 사회적인 큰 틀의 문제를 놓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으로 근대의 사상을 반성하여 수렴적이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갈 수 있게 하고 그 방향은 무수히 많은 ‘다름’ 속에서 서로 ‘같음’을 공유할 때 나타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