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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형 May 16. 2016

미를 바라보는 플라톤과 플로티노스

 오늘날 삶의 모든 분야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이 매우 고조되어 있다. 특히 인간의 육체미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외형상의 감각적 아름다움이 인간이 지니는 무수한 가치들을 압도하고 인간을 평가하는 척도가 되어가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눈을 매혹하는 인간의 외모, 감각적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더없는 쾌감을 선사함으로써, 우리는 더욱 그러한 미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모습이다. 

 이때 점점 더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미에 지배되는 현실 속에서 조금이라도 불편함을 느끼는 인간이라면, 우리를 매혹하는 감각적 아름다움이 주는 강렬한 쾌감을 얼마든지 향유해도 되는 것인지, 이러한 쾌감은 영원한 것인지, 이러한 아름다움은 변치 않는 것인지, 그보다 더 좋은 아름다움은 과연 있는지 등 현재의 아름다움에 회의가 들 것이다. 이점에서 일찍이 미의 본질에 대해 탐구했던 플라톤과 플로티노스의 철학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진정한 아름다움과 영원한 미가 무엇인지 탐구했던 플라톤과 플로티노스의 미학사상은 오늘날의 인간들에게 더 나은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소피스트들은 ‘미는 청각과 시각을 통해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는 미의 정의를 내세웠다. 그러나 플라톤은 소피스트들의 제한된 미의 정의를 거부하면서, 시각과 청각에 의해 자연과 예술에서 지각되는 감성적인 미뿐만 아니라 영혼의 덕, 지성, 법률과 같은 비감성적인 미도 포함시키고 있다. 이러한 종류의 미의 범위는 플로티노스에서도 반복된다. 

 이와 같이 플라톤과 플로티노스는 모두 미를 광범위하게 정의하면서 미의 보편성을 탐구했을 뿐 아니라, 감각계와 예지계라는 플라톤주의적인 이원론적 세계관 안에서 여러 종류의 아름다운 것들이 지니는 각기 다른 가치를 통해 감성적 미와 비감성적 미를 위계적으로 구별하였다. 이러한 미의 근본적인 구별은 우리의 사고가 추구하는 상승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플라톤은 미를 바라보는 영혼의 반응을 인간의 영혼이 육체에 갇히기 이전의 순수한 상태에서 보았던 미의 형상을 상기하는 것으로 보았다. 아름다운 사물들이 미의 형상에 참여하면서 아름다운 사물들은 우리가 과거에 보았던 천계의 형상들에 대한 미적경험의 근원이 된다. 즉, 미에 대한 경험은 우리에게 이데아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주는 것이다.

 여러 아름다운 사물들은 미의 이데아에 근거함으로써 아름답다. 그 이데아는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형상으로서 다양하게 현상하는 아름다움의 기초를 이루며 아름다운 사물들을 아름답게 만드는 본질이다. 따라서 아름다움의 외형들은 그 이데아에 의해 서로 밀접하게 위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름다움 자체는 이데아로서 여러 종류의 아름다운 것들의 원인이며 영원한 것이지만, 감각적인 사물들은 미의 이데아의 모상이다. 그리고 미는 외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다. 

 플로티노스는 미에 대한 범위를 플라톤의 의미에서 더욱 확장시켰다. 또한 여러 종류의 아름다움의 단계들을 거론하면서 아름다움의 본질은 직접적으로 매력을 끄는 육체의 미에서 사고될 수 없으며 감각적으로 아름다운 사물들은 그것을 초월하는 어떤 존재에서 기인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미를 단순히 균제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미의 규정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미의 본질을 말하고 있다.

 첫째, 만일 미의 본질이 전체와 부분들의 비례와 관계를 나타내는 균제에 있다면, 단일자는 아름다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색채의 미와 태양의 빛, 별빛, 황금, 단일한 음과 같은 단일한 실재들도 분명히 아름답다. 둘째, 항상 같은 균제를 지닌 한 얼굴이 때로는 아름답게, 때로는 아름답지 않게 보인다. 그리고 비록 신체가 균제를 지니더라도, 신체에 생명이 없어지면 그것은 미를 잃는다. 셋째, 균제는 아름다운 행위나 훌륭한 법률과 같은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실재들에게도 적용될 수 없다. 넷째, 악이나 추에도 일치가 있기 때문에 미는 상호 일치하는 균제일 수 없다. 위와 같은 이유들로 균제 자체는 아름답지 않다. 그것은 어떤 다른 존재를 통해서만이 아름다워진다. 따라서 균제는 미의 외적 현상 및 결과일 뿐 본질적인 원인이 아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균제란 비판에도 불구하고 플로티노스는 균제론을 제한적으로 수용하여 대안적인 미를 논한다. 우리 감성계에서 실제적인 미는 첫눈에 지각되는 어떤 것이며, 영혼이 옛날부터 알고 있는 것이며, 알아보면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조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 플로티노스의 생각이다. 이러한 미에 대한 반응은 영혼이 내적 형상에 따라 사물을 인식하는 영혼의 활동인 것이다. 이 같은 미적 판단에서 플로티노스는 플라톤의 상기론, 즉 영혼은 아름다운 형상에 참여하는 사물 속에서 그 형상을 상기한다는 생각을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플로티노스는 영혼이 단 하나의 형상, 즉 미의 형상을 상기하는 것이 아니라 형상들의 세계인 예지계 전체를 상기한다고 보았다. 이와 같이 미의 형상이 아니라 예지적 존재 일반에 대한 상기는 플라톤에게도 나타나는 것 같지만, 플로티노스는 상기론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결론을 도출하였다. 영혼이 미를 보면서 예지적 실재를 상기하고 그 상기가 아름다운 사물과 예지적 존재 사이의 어떤 관계에서 나타난다면, 사물들은 일반적인 형상에 참여하는 정도에 따라 아름답다는 것이다. 형상이 훌륭한 비례를 만드는 원인이기도 한 것이다. 

 감성적인 미는 현상에의 참여에 근거하므로, 조화, 균제, 비례, 일치와 같은 현상 형식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감성적 미를 봄으로써 그것 안에서 나타나는 비가시적인 것, 즉 예지계의 단일화의 원리를 바라보는 것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감성적 미는 우리의 시각을 외면의 현상에 고정시키지 않고 우리 내면을 향한 사유의 회귀를 위한 동인이 되어 우리의 심안을 일깨우며 그 사유하는 시선을 미의 본질로 향하게 한다.

 아름다움의 원인, 즉 그 자체로 ‘불가분적인’ 존재는 다양성 속에서 단일자로 나타난다. 아름다움을 바라볼 때 우리의 사유는 이러한 현상하는 다양성을 다시금 통일시키는 것이며, 원인과 현상의 일치를 성취하기 위해 다양성을 내적으로 불가분적인 존재로 환원시키는 것인데, 바로 이러한 원인과 현상의 일치가 인식과 이해이다. 이점에서 외적 경험은 내면으로의 이행을 위한 발단이다. 사물 속에 숨겨져 있는 것들이 감각적인 조화의 원인이므로, 아름다움에 직면한 우리의 영혼은 현상을 근거 짓는 예지적 원인에 대한 사유를 시작하고, 외적 현상과 내적 근거를 능동적으로 일치시키면서 이러한 원인으로 회귀한다. 

 감각적인 아름다움을 바라볼 때에 발생하는 기쁨의 경험은 상기된 예지적인 것과 직면하면서 더욱 강렬해진다. 이러한 경험은 영혼이 육체적인 감상으로부터 시작하여 인식이 지성에 도달하기 위한 자기 자신으로의 사유의 집중이다. 결국 참으로 아름다운 것은 지성 안에서 존재하며 그 안에서 빛난다. 따라서 우리의 영혼을 열광하게 하는 참된 미는 영혼이 간직한 지성의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외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경험은 자신의 본래적 자아로, 그리고 지성으로 회귀하는 것을 통해 자기 자신이 아름다움이 되는 경험을 환기시킨다. 따라서 외적 경험은 우리의 내적 자아로, 자기 인식으로 회귀하는 운동이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영혼은 외적 경험을 통하여 볼 수 없었던 아름다움을 인식할 수 있는 내적 시각을 얻고 더 높은 절대미로 상승할 수 있다.

 위와 같이 영혼이 덕스러워지면 모든 미의 원천인 일자에게 다가가는 것이 가능해진다. 형상 혹은 지성에 참여하고 단일하고 아름다운 존재가 된 영혼은 다시 그 형상과 지성의 원천인 일자를 추구한다. 왜냐하면 스스로 아름다움이 된 영혼은 좀 더 상위의 미를 욕구할 것이고, 그러한 미에 대한 욕구는 일자와 선에 대한 추구가 되기 때문이다. 이때 감각적인 미와 예지적인 미의 경험은 선에 대한 추구에 의해 더 강렬해진다.

 그런데 일자나 선과의 일치를 위해 영혼은 격렬하고 극심한 투쟁을 수반해야 한다. 일상적으로 보는 방식을 초월한 절대미를 보는 능력은 바로 정신적 수양의 결과이기 까닭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적 수양은 조각가가 아름다운 조각을 만들기 위해 깎아 내고 다듬는 것처럼 고된 노력과 인내심이 요구되며, 그럼으로써 자기 내부로 돌아가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는 심안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영혼이 자기 자신으로 회귀하여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은 단지 절대미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인 아름다움을 향한 인격적인 변형으로 나아가야 한다. 플라톤에게 이러한 영혼의 아름다움 추구와 이데아의 통찰은 인간의 행복을 의미한다. 이데아에 대해 사유하는 인간은 덕의 규범적 원리를 인식하고 윤리적인 근본태도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플로티노스에게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의 원천은 보는 이의 영혼에 있다. 진정한 미를 보는 과정은 아름다운 외적 사물에 대한 관심을 자기 자신의 삶으로 돌리는 체계적인 운동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이때 영혼이 자신의 삶을 탐구하는 과정 속에서 영혼은 자신의 존재의 근원을 발견한다. 감각적인 미를 바라봄으로써 영혼은 자신의 근원을 상기하게 되고 자신을 그 원천으로 되돌리는 수양 과정 속에서 그 자신이 아름답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심안을 획득한 영혼은 미의 근원인 일자와의 합일을 이루면서 영혼은 심안을 통해 절대미, 일자를 바라본다. 이처럼 플라톤과 플로티노스는 영혼이 감각미를 바라보는 육안의 눈으로부터 예지적 세계를 관조하고 그 원천인 일자에 도달하게 하는 심안의 획득을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철학적 사고에서 인간 영혼의 상승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플라톤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감각계와 예지계로 이루어진 형이상학적 이원론이다. 그래서 두 세계를 매개하는 영혼의 능력이 중요시되는데, 아름다움과 에로스의 역할은 육체에 갇힌 영혼으로 하여금 기억을 되살려 이데아와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이었다. 

 플로티노스는 플라톤과 같이 감각계와 정신계의 두 세계를 나누었다. 플로티노스의 철학에서 제1원리는 일자이다. 자연과학 분야에서의 창조론인 빅뱅이론과 연결되는 일자는 만물의 근원으로서 자신의 무한한 힘을 만물에게 내보내 만물을 유출하는 자이다. 그리고 일자에서 처음 나온 것은 제2원리인 지성이다. 지성에서 영혼이 나오는데, 영혼은 제3의 원리이다. 그리고 영혼이 육체를 비롯한 자연과 물질을 산출한다. 이처럼 플로티노스의 체계는 일자, 지성, 영혼, 육체의 4단계가 나타난다. 플라톤이 정신계와 감각계로 이 세계를 이원론으로 나누었다면, 플로티노스 철학의 목표는 두 세계의 대립을 극복해서 감각계에서 정신계로 나아가는 데 있으며, 이원론을 일원론으로 환원시키려 하고 있다. 그의 철학적 사고는 두 세계가 대립하여 있지 않고 강한 유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감각계와 예지계의 연관관계를 탐구하였는데, 이때 아름다움은 우주 전체의 연관성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미를 보는 것은 우리 영혼이 이러한 연관성을 가장 잘 의식하게 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플라톤은 개개의 아름다움보다는 보편적인 아름다움에 대해 사변적이고 관념적으로 탐구했고, 플로티노스는 균제론을 반박하고 영혼의 덕의 미를 강조하였다. 그들이 관념론적 성향이 짙어 미의 관조의 측면만이 부각되었지만, 그들은 감각적 미를 비난하지 않았다. 그들은 미의 특별한 성질로서 균제, 조화, 비례라고 하는 구체적이고 현상적인 속성들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었으며, 감각적 미의 의미심장한 측면과 그것을 직면하는 영혼을 정신적 도약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이때 플라톤은 아름다움을 보는 과정을 ‘사다리’에 올라가는 것에 비유했으며, 플로티노스는 아름다움을 보는 것을 정신적 상승의 ‘디딤돌’에 비유하였다. 균제와 같은 감각적 미의 현상적 형태들은 단일성을 지향하는 지성의 힘을 가시화한 것으로, 이러한 예지적 원리의 가시화로 인해 아름다운 사물은 우리의 시선을 끌어당겼고 그 시선이 바로 우리의 지성을 통해 심안을 뜨게 하는 것이었다.


2012. 0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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